문종대왕 - 군사력의 강화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군사력의 강화
문종은 앞장의 생애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文)을 위주로 하는 문치적인 유교정치를 펴 나갔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연구한 군주였다.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구체적 정책입안과 실천이 구현되고 있었다. 왕의 관심이 문치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 힘이 없을 경우 닥치게 될 어지러움을 생각한다면 변방의 안정과 군사력의 정비는 결코 소홀 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국방과 군사의 여러 가지 측면에 대한 작업을 연구하고 실행하여 군사적 기반을 안정시켜 나갔다.
먼저 즉위 초 1450년 3월 11일에
“지금 중국에서 변고가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 변방을 방비하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 역대의 일은 사책(史冊)에 상고하면 알 수 있는데, 우리 나라의 일은 가장 마땅히 먼저 알아야만 할 것인데도 전연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원컨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저들 외적이 와서 침범한 일과 우리 나라에서 미리 준비 하고 방어한 계책의 수미(首尾)와 득실을 자세히 참고하고 모아서 전하여 관람(觀覽)에 대비하겠습니다.”
라고 하여 고려 때까지의 전쟁사를 기술하여 오늘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내용을 의정부가 밝히고 있었다. 문종은 이에 대해 그 뜻이 매우 합당하니 빨리 찬집하여 널리 공포하도록 하였다. 후에 이의 찬집이 완성되니 이를 인쇄하고 그 이름을 <동국병감(東國兵鑑)>이라 하였다.
문종대왕 - 군사력의 강화 (2)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먼저 국방의 강화를 위해 문종이 행하였던 정책은 성벽의 구축과 군사훈련, 그리고 새로운 무기체제의 도입 등을 꾀하는 것이었다. 왕은 즉위년 말인 그 해 12월 28일에는 다음과 같이 군사적 목적을 갖는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의 여러 도의 군 · 읍은 서로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비록 혹은 군사를 징발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멀고 가까움이 애매하여 조치하기를 잘못할까 두렵다. 각 도로 하여금 주 · 군간의 거리의 이수(里數)를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고, 참고하여 지도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면서 지도를 만드는 목적이 군사를 징발하는데 원근을 살펴 신속히 할 것에 대해 이렇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군사적 목적하에 지도를 만든 적이 없던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각 지역간의 거리를 정확히 실측하고 이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는 일은 특히 적이 침입하였을 때 일사불란한 대응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군작전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와 더불어 1451년(문종 1) 5월 29일에 예조참판 정척(鄭陟)은 문종의 지도작성의 하교에 따라 <양계지도(兩界地圖)>를 수찬하여 바치었다. 문종은 정척의 노력을 치하하고 아직 그 세밀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교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내가 지도를 많이 보았거니와, 이번에 그린 것이 가장 자세하다. 그러나, 그리려면 각 고을의 서로 떨어진 이수(里數) 및 상대의 지방을 모름지기 자세히 살펴서 이를테면 아무 고을의 사면은 아무 현에서 몇 식(息) 몇 리(里) 떨어져 있다고 하여야 하고, 만약 사방위(四方位)로는 바르게 그 곳을 잡을 수 없다면 십이방위의 범철(泛鐵) 즉 나침반을 놓고 방 위를 정하는 것으로써 정하여야 할 것이다. 각각 그 지경 안의 명산 · 대천 · 대령 · 옛 관방 · 옛 읍이 어느 방위의 어느 땅에 있다는 것도 상세하지 않아서는 아니되니, 양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척량(尺量)하여 올려 보내게 한 뒤에 다시 참고하여 교정하라.”
라고 세밀하게 살펴본 뒤 다시 하교를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지시와 더불어 문종은 재위 1년째인 1451년 1월부터 성벽의 수축을 시작하여 도성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여기에 같은 날 병조에서 아뢰고 있는 정군(正軍)의 숫자는 그 동안 군사력의 증강을 위해 기본적으로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을 늘리는 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하여 늘어난 각도의 정군의 총계는 모두 2만 3,486명에 이르렀다.
같은 해 5월 초에는 황해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芬)이 황해도의 성에 대해 자세히 측량하여 보고하고 있는 내용 중 의정부에서 아뢴 황해도의 연안(延安) · 배천(白川) · 평산(平山) · 해주(海州) 등지의 성 쌓는 일에 대해 평산부터 시작하여 관방(關防)과 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또한 평안도 · 함경도의 토민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따로 설치하는 토관(土官)을 함길도 부령부(富寧府)에도 두게 하고 계속해서 함길도 종성부(鐘城府) · 경성부(鏡城府)에도 설치하게하여 변방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0월 20일에는 함길도 보화(保和)의 벽성 (壁城) 4,410척(尺)과 적대(敵臺) 42개소에 대한 역사(役事)와 갑산군(甲山郡)의 허천행성(虛川行城) 2,360척과 삼수군(三水郡)의 기지(期地) 나난석보(羅暖石堡) 825척을 쌓았다. 여기에 종성의 읍성(邑城) 1만 276척도 모두 쌓았던 것이다. 변방의 경계를 철저히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문종대왕 - 군사력의 강화 (3)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성의 수축과 더불어 문종은 군사력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책을 마련하고 이를 실시하였다. 특히 진법(陣法)을 만들어 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에는 도진무 황수신이 진법을 연습하는 일에 대한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다.
“진법을 연습하는 것은 다만 유군(遊軍)과 적의 침입을 받는 지방의 군졸만을 운동시켜 전진하여 싸우고 퇴각하여 지키는 형상을 하고, 그 나머지 사졸들은 행렬을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그런 까닭에 군사들이 생각하기를, 진법의 싸우고 지키는 방법은 다만 이 같은 것뿐이라고 여기며, 행군의 완급과 전진하고 퇴각하며 한 곳에 모였다가 여러 곳으로 흩 어지는 법은 전연 익히지 않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매양 진법을 연습하는 날을 당하면 군진(軍陣)을 풀고 돌아올 때에 행진을 만들어 그 깃발을 휘두르고 징을 울리며 전진하고 퇴각하는 절차를 익히도록 하여 항식으로 삼고, 그 이십오변진(二十五變陣)은 매월 초2일, 12일, 22일에 돌려가면서 연습하도록 하되, 병조 · 도진무 · 훈련제조(訓鍊提調)는 장부에 기록하고 여러 사람이 서명하여 후일의 빙고(憑考)로 삼게 하소서.”
라고 하여 군사의 나아가고 돌아옴이 깃발과 징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훈련할 것을 아뢰었던 것이고 문종은 황수신의 이같은 말을 그대로 따랐다. 또 적을 방어하는 선봉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방패군(防牌軍)의 증강을 위해 특히 마 병(馬兵)을 보충하고 훈련하도록 하며 말의 관리에도 각별히 신경 쓸 것을 사복시(司僕寺)에 명하였다.
더구나 문종은 자신이 직접 진법훈련을 보고서 이에 대한 정확함과 신속함을 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전고를 참고하여 진법을 직접 만들었다. 왕 자신이 고쳐 만든 <신진법>을 수양대군(首陽大君) 및 김종서 ·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게 하여 문종 원년 5월 19일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그 내용은 분수(分數) · 형명(形名) · 결진식(結陣式) · 합진(合陣) · 오위연진(五衛連陣) · 군령(軍令) · 장표(章標) 등의 내용으로 그 대체의 형상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운용형을 보면, 용겁지세(勇怯之勢) · 승패지형(勝敗之形)의 각각 세가지 단계로 나누고 있다.
문종의 <신진법>에 대해 사관들은 평하길, 그 형명 · 분수가 지극히 정교하고 지극히 상세하며, 기(奇) · 정(正)의 상생(相生)이 신변불측(神變不測)하면서도 개사(改司) · 분군(分軍)함에 각각 통속(統屬)이 있으니, 진실로 병사(兵事)에 뜻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 법(舊法)을 가벼이 고치기에는 물의(物議)가 자못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사실 문종이 지은 진법서는 상당히 실제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실용진법서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문종의 병사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자신이 직접 진서를 만들 정도에 이르렀고, 이는 그 동안 문종이 닦아온 제왕의 능력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군사력의 증강은 성의 축조와 훈련을 통해 정예화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무기체제의 개발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문종은 완구(碗口) · 철신포(鐵信砲) · 장군화포(將軍火砲) · 세총통(細銃筒) 등에 대한 개량으로 신무기를 개발하여 그 효율성을 높였다. 다음으로 그것은 일단 화차(火車)의 제작과 보급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한 작업으로 먼저 즉위 년 9월 19일에 화약생산을 꾀하고 있다. 그것은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뢴 내용을 따른 것이었다.
“군기감에서 염초(焰핇)를 구워내는 방법은 이보다 먼저 각 도에서 도회(都會)를 두고 일정한 장소로 정하였으니, 다만 도회의 읍(邑)만 해마다 폐해를 받을 뿐 아니라, 소속된 군현이 길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무릇 염초에 소용되는 흙을 준비해 두었다가, 쓰는 잡물을 수송 운반하는 즈음에는 온 경내가 소요하여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다단하니, 청컨대 지금 부터는 각기 그 부근 지방에 도회를 나누어 두고는, 해마다 봄 가을에 1도(道)의 1도회(都會)에서 염초를 구워내게 하고, 한 차례 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번갈아 가면서 휴식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면서 모두 25개의 각 도에 도회를 정하고 또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밝히고 있었다.
문종대왕 - 군사력의 강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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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문종 1) 3월 7일에는 화차를 제작하게 되었다. 화차는 문종의 계획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군기감 제조(軍器監提調) 이사임(李思任)이 가볍고 편리하게 하기 위해 화차의 왼쪽과 오른쪽에 방패를 연하여 붙이지 않게 할 것을 아뢴 뒤 문종이 의정부에 전교하면서 이루어지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종은 제작된 화차를 곡산(谷山) · 수안(遂安) · 황주(黃州) 등 고을에 각 20대를 만들게 하려 했으나 의정부에서 반대하였다. 문종은 이에 대해 승지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르길, `화차는 곧 내가 창작한 것인데, 여러 대신이 옳지 못함을 알고 이런 논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의정부에서도 논의하길, `화차는 매우 유익한 것이니, 만일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이것으로 막으면 누가 감히 당하겠는가?\' 하였다고 정이한은 아뢰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문종은 병조에 전지(傳旨)하여 경중(京中)은 군기감으로 하여금 50대를 만들게 하고, 평안도의 안주(安州) · 의주(義州) · 함길도 길주 및 도절제사의 본영에는 이를 만드는 차장(車匠)을 보내어 각각 20대를 만들게 하였다.
문종의 화차의 제작과 보급노력은 일단의 성과를 보았으나 이 후 더욱 이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사장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혹 문종의 재위가 좀 더 이루어졌더라면 우리 나라 무기사에 있어 또 다른 획을 그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사용한 조총에 대해 그토록 무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까지의 백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치의 발전도 없었으니 어찌보면 전쟁이 없었던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화를 입었던 것이니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문종대왕 - 역사서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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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의 정리
문종은 세자시절부터 세종의 배려와 집현전 학사들과의 토론,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군왕지도(君王之道)의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유신(儒臣) 및 학자들과 시무 및 학문적 관심에 대해 토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섭정한 시기에 이어 재위한 기간 중에 많은 역사서와 주석서를 내어 그 성과를 보았다.
조선왕조의 개창에 따른 역사서의 편찬과 이에 대한 군주의 도, 그리고 신료들의 정치적 지향점이 그 역사서에 사관(史觀)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세종조의 정치가 큰 변화 없이 문종조에 이어지는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고 하였을때 바로 문종조에 이루어진 역사서의 편찬에서 읽을 수 있다. 사실 <고려사>의 편찬 노력은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1449년 세종 말 년에 춘추관에 <고려사>를 기(紀) · 전(傳) · 표(表) · 지(志)의 기전체로 개찬하도록 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1451년 8월에 이르러서 완성이 될 수 있었다. 그 편찬배경에 대하여서는 정인지의 <고려사>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문종대왕 - 역사서의 정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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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선왕의 모유(謀猷) 지혜를 그대로 따라서 문화(文化)를 크게 선양(宣揚)하시어 역사를 수찬(修撰)하면 모름지기 해박(該博)하게 갖추기를 요한다 하시고, 다시 국(局)을 열고 재차 엮어서 가다듬게 하였으나, 아직도 기차(紀次)가 정(精)하지 못하고 또 빠진 것도 많은데, 하물며 편년(編年)은 기(紀) · 전(傳) · 표(表) · 지(志)와 달라서 사실을 서술하는 데 그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에 용렬(庸劣)하고 우매(愚昧)한 신(臣)들에게 명하시어 찬술(纂述)을 맡도록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편찬방법은 <고려사>를 찬진한 후 올린 김종서의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범례(凡例)는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법받았으며,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모조리 성재(聖裁)에 품신(稟申)하였습니다. 본기(本紀)를 피하고 세가(世家)로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함을 보인 것이요, 위조(僞朝)의 신씨(辛氏)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것 은 참절(僭竊)에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 충영(忠쨻)과 사정(邪正)을 유(類)별로 나누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을 유(類)대로 모으니, 통기(統紀)도 문란하지 않고 연대(年代)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사적(事迹)은 상세하게 밝히기를 다하려고 힘썼고 궐류(闕謬)된 부 분은 반드시 보완(補完)하고 교정(校正)하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그 찬술 방법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고려사>의 찬진은 세종의 명에 따라 시작되었지만 사실상의 군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세자 문종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김종서 등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바이며 이에 대해 문종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것이 명분상으로 올린 것 일지라도 군주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종서는 이러한 생각을 그의 전문 말미에 밝히고 있다.
“신(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려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그 원대한 계책을 이어받으시어 큰 공렬(功烈)을 더욱 빛나게 하셨습니다. 유정 유일(惟精惟一)하시어 성학(聖學)이 그 고명(高明)을 극(極)하셨고, 비현 비승(丕顯丕承)하시어 효도(孝道)의 지극하심이 그 계술(繼述)에서 나타났습니다. 전대의 일이 아직 성취하지 못함을 생각하시어 미신(微臣)으로 하여금 이를 책임지고 이루도록 하시니, 신 등이 다같이 천박한 재질로서 외람하게도 융중(隆重)하신 부탁을 받고, 혹은 패관(稗官)의 잡록(雜錄)을 채택하기도 하고, 비부(秘府)의 고장(故藏)을 들추어서 3년간 노고를 다하여 드 디어 일대(一代)의 역사(歷史)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찬진된 <고려사>에 대해 문종은 상당히 흡족함을 표시하고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3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려사>는 그 동안 이루어져 왔던 편찬 성과와 자신들의 노력을 합하여 고려전사를 완성하였으니 이로써 고려왕실의 세계(世系)와 정사 · 제도 · 인물들을 망라하여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당대의 학문적 수준이 높은 경지 에 올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고려사>는 이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다.
문종대왕 - 역사서의 정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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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등은 다시 문종 2년 2월 19일에 이르러 편년체로 서술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문종에게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학문 능력과 그 동안 경험, 조직적인 편찬계획 등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 문종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이 그 속도를 배가시켰던 것이다.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후 문종은 김종서가 올린 전문과 아뢴 것을 듣고는 “역사란 것은 후세에 보여서 권선징악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숨겨서는 안되니, 마땅히 인쇄하여 이를 반포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여 곧 바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려사>의 간절하고 요긴한 것만 모아서 사략(史略) 즉 <고려사절요>가 찬술, 반포된 것이다.
그 동안 그렇게도 많은 인원과 세월이 걸렸어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던 고려왕조의 역사를 문종대에 이르러서 이렇게 완성을 보게 된 것은 문종시기외 역사의식이 조선초의 지성이 공감하는 역사인식을 토대로 객관성, 정당성을 역사서술에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종은 이렇게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한편으로 문종 1년 11월 1일 고려 왕씨의 후예를 찾아 그 작위를 높여 제사를 이어가게 할 것을 명하였다. 문종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우부승지(右副承旨) 박중손(朴仲孫)을 인견하면서 이와 같은 그의 뜻을 밝혔다. 그것은 사실 문종 당대에만 왕씨의 후손을 예우할 것에 대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태조조 이래로 선왕인 세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왕씨의 후손을 찾아 이들을 대우하려고 힘썼던 것이다. 문종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그의 의사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개국(開國)할 초기에 왕씨를 참혹하게 대우한 일은 진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고, 바로 그 때의 모신(謀臣)들이 한 바인데, 태조께서 항상 몹시 애도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선왕께서도 왕씨의 후예인 왕걸우음[王巨乙于音]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추도하여 마지 않으시 고 항상, `왕씨의 후손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하건대, 전대의 후손으로 왕가(王家)에 빈(賓)을 삼는 것은 고금의 통의라고 여긴다. 하물며 5백 년의 조업(祚業)을 가지고도 제사에 주인 없는 것이 옳겠느냐? 이제 조종의 뜻을 이어서 왕씨의 후예를 구하여 역대로 빈(賓)을 삼았던 예에 의거하여 그 작위를 높여 줌으로서 제사를 이어가게 하고자 하니, 집현전 문학(集賢殿文學)이 선비를 불러서 나의 뜻을 상세히 말해주고 교서를 지어 올리게 하라.”
[<문종실록> 권10 원년 11월 을미(1)]
라고 그 간곡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시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6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씨의 후손을 찾고 제사를 받드는 일, 그리고 이를 법도로 삼는 것이니 당연히 시일이 걸 리는 것이었지만 문종은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문종이 승하한지 닷새 뒤인 5월 19일에 완성되었는데 이로써 고려 왕씨에 대한 봉사조건(奉祀條件)을 만들어 이들에 대한 예우를 남달리 하도록 한 것이다. 문종은 한 시대의 흥망성쇠가 아닌 우리 역사상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려이고 또 그들이 말년에는 권신들과 왕권의 미약함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그 천명이 조선왕조에게로 넘어왔 지만 그렇더라도 고려의 존재는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세종과 문종 2대에 걸쳐 고려 왕실에 대한 봉사 조건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학사들에 대한 지원과 교육, 그리고 왕 자신의 관심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문종대왕 - 역사서의 정리 (4)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이러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문종 1년 11월 25일에 이루어지고 있는 경외수의독서(京外隨意讀書)에 대한 허락이다. 즉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서거정(徐居正) · 수찬(修撰) 허조(許?) · 정언(正言) 홍응(洪應) 등에게 명하여 경외에서 자기 마음대로 독서하는 것을 허락하고, 달마다 쌀과 술을 내려 주게 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오히려 더 풍족한 오늘 날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격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당시 문종이 행한 이 독서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의 핵심적인 연구기관의 연구원들에게 마음놓고 그 학문을 연구하고 닦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뢰와 지원은 그들이 후일 정국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때 그 의미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의 하나가 학문적 영역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역사서의 편찬인 것이다.
문종의 이러한 입장은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양성지(梁誠之)와의 윤대(輪對) 후에
“국가에서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그 조석(朝夕)으로 의논하고 생각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너희들이 모든 국가의 일에 대하여 극진하게 의견을 말하고 숨김이 없으니, 내가 대단히 아름답게 여긴다.”
라고 하는 것에서 그 신뢰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종대왕 - 언로(言路)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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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로(言路)의 확대
문종은 누구보다도 이들 언관과 간관, 그리고 언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던 군주이다. 문종 즉위년 7월에 사헌부에서 올린 시무와 관련한 상소문에서 언로에 관련한 항목이 있는데 당시 유자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언로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1.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언로가 가장 급합니다. 언로가 열리면, 하정(下情)이 위로 올라가고, 상택(上澤)이 아래로 내려와 위와 아래가 서로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지니, 이른바 태(泰) 괘(卦)요, 언로가 갇히면, 하정이 억눌려 펴지 못하고, 상택이 막혀서 시행되지 않아, 위와 아래가 사귀지 못하여 그 뜻이 같지 않으니, 이른바 비(否) 괘입니다.…… 천리 · 만리 의 먼 것은 달을 지나고 해를 넘어도 혹은 전하여 들을 수 있지마는, 당하와 군문의 먼 것은 죽을 때까지 서로 듣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 얻어 들을 수 있다면, 옛날부터 어찌 패가 망국하는 임금이 있겠습니까? 언로의 통하고 막힌 것이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언로가 통하면 국가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어지러워 망하는 것이 또 명확합니다. 인주가 오래 정권을 잡고 편안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지마는, 언로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혹은 스스로 말하길, `남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하고 신하에게 진언하라고 책하나, 그 신하가 과감하게 말하지 못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저 나라를 편안히 다스리려고 하는 마음은 같으나 언로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언로를 서로 통하게 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신하로 하여금 과감하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병을 얻은 근원이 있을 것입니다.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이 여기에 깊이 반성하여 깨달으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거의 그 도를 얻게 될 것입 니다. 지금 새 정사를 당하여 백료 신민이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과감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평상시보다 배나 됩니다. 만일 마음을 열어 놓고 넓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듣기를 좋아하는 아량을 보이시고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을 진작시키지 않으면, 누가 즐겨서 몸을 버리고 임금의 뜻에 거슬리고, 평상시보다 배나 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새 정사를 시험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여러 신하의 행동하기 어려운 형세를 살피시고 언로의 통하고 막히는 근원을 생각하시고, 세도(勢道) 비태(否泰)의 기미를 규명하시어, 국가의 장원(長遠)한 계책을 삼으소서…….”
[<문종실록> 권2 즉위년 7월 정미(5)]
문종대왕 - 언로(言路)의 확대 (2)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여기서 사헌부에서는 문종이 즉위 초년을 당하여 염두에 두고 행하여야 할 것 중의 하나로 언로가 제대로 통해야 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종과 문종의 언로에 대한 정책은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세종이 간관 즉 언관 그리고 제반 언로를 통해 항시적으로 지적받았던 것은 큰형인 양녕대군과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일, 그리고 유교정치를 표방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왕실내의 호불적 성향, 훈민정음의 창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주된 것이었다. 사실 이 속에서는 극단적으로 세종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앞서도 밝혔듯이 이들 언관들은 그들이 올린 의견에 대해 신분을 보장받았다. 혹은 오히려 군주로 하여금 일의 심각성을 다시금 깨닫게하여 국정의 운영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많았다. 결국 제대로 언관을 두고 운영한다면 다소 번잡하기는 하겠지만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종은 더욱 언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그 입장을 강화하였다. 그 방법도 호학적인 성향을 지닌 문종다운 방도를 취하였다. 신하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의사를 밝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번째로는 당연히 조회에 참석하여 하는 것을 들 수 있고,
두번째로는 상소 등을 통하는 방법,
세번째로는 직접 임금을 뵙고 아뢰는 것 등이다. 이 중 자신 의 생각을 가장 잘 피력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세번째의 방법일 것이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빨리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문종은 이 방법을 가장 선호하였다. 이것이 신하들의 생각과 백성들의 움직임, 그리고 학문적 입장에서의 논의 등을 쉽고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문종은 이에 따라 경연을 자주 열면서 참석한 신하들과 시무(時務)와 경서 등에 관해 토론하였다. 또한 신하와 독대를 통해 그 생각을 분명히 읽으려 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혹 그 생각을 미쳐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까 염려하여 윤대(輪對)의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 윤대의 방법은 사실 군주 자신이 어느 정도 일에 대해 알고 있고 또 신하와 더 불어 논의함에 있어 모자라는 점이 없어야 그 효율성을 높일 수가 있다. 이 점에 있어 문종은 당연히 자격이 된다. 아니 넘칠 정도이다.
이 윤대를 통한 언로의 확대는 이미 세종조에도 어느정도 이루어지긴 했지만 문종조에 더욱 진전되었다. 즉 1425년(세종 7)에 동반 4품 이상, 서반 2품 이상이 날마다 차례로 입대(入對)하도록 하는 윤대제(輪對制)가 마련된 적이 있었고 이에 따라 조계(朝啓)에 참여하지 않던 돈녕부(敦寧府) · 예문관(藝文館) · 인수부(仁壽府) · 경창부(慶昌府) 등 24개 아문 (衙門)에 차례를 정하여 매일 1인이 예궐(詣闕)하여 각사(各司)가 조계한 후에 입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조치로 인하여 조계에 참여하지 못하던 아문의 관원도 윤대를 통하여 왕과 개별적으로 의사를 개진할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 조치의 내면적인 효과로는 왕이 많은 신하들을 개별적으로 인견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북돋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즉 왕권의 강화와 신하들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