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왕 - 생애 (6)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세종의 세조에 대한 믿음은 깊었다. 세조의 나이 스물 셋이 되던 1439년 7월에 세조를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宗簿寺)의 제조(提調)로 삼았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그를 제조로 삼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질병이 있고 몸도 약하므로 종부시를 영솔(領率)할 수 없으므로 진양대군(晉陽大君) 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려고 한다. 다만 본래의 벼슬이 높고 덕망이 있는 자로 하여금 종친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는 이미 그 마땅한 사람이 없고 진양대군이 비록 젊기는 하나 또한 그 수신(守身)의 법을 알고 있다. 예로부터 종실들은 방위하는 것이 매우 급무였다. 이제 방종하고 태만하여 종친의 종복까지도 이에 인연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자가 많다. 너를 서용하여 제조로 삼는 것은 또한 너로 하여금 이직(吏職)에 종사하게 하여 국법(國法)을 배우도록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여 국법을 익히라는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그 이외에도 종친 중 어른이 있기는 하지만 수양대군 자신으로 하여금 그 제조를 맡게 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그만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와 함께 훗날 형인 문종을 적극 보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후 세조는 자신이 맡은 종부시 제조를 무리없이 해나가면서도 틈틈이 사냥을 하여 체력을 다지기도 하였다. 앞서 말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고 또 그만큼의 수준에 올라있기도 했다.
 당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냥솜씨와 마술, 활쏘기의 솜씨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활솜씨는 북방의 야인들에게까지도 소문이 나 그들은 세조에 대해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1442년(세종 24)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 되던 해 세종이 평강에서 강무(講武)를 한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세조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당시 이 행차에 와있던 야인 동나송개(童羅松介)가 이러한 그의 신이함을 보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참으로 우리의 주장(主將)이라 할 수 있는 나연(那衍)이십니다. 우리 땅에서라면 진실로 `바투(拔都)\'이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세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나를 알았는가?”
 하니, 동나송개가 말하기를,
 “우리 지방 사람들 누가 이를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 북방 야인들이 세조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진양대군(晉陽大君)은 큰 호랑이다.”
라고 하였다. 또 동나송개가 도대체 세조의 활솜씨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확인하려고 그 솜씨를 눈여겨 보던 중 세조가 가지고 있던 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활은 다른 이들 것과 달리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잠깐 달래서 당겨 보았는데 되지 않았다. 자신도 완력만 가지고 본다면 부족의 어느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당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조대왕 - 생애 (7)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세종 25년은 조선 왕실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기이다. 그것은 세종이 병치료를 위해 세자인 문종에게 섭정을 맡긴 해이기 때문이다. 세자의 나이 서른이 되었으니 그것은 무리가 될 것이 없었다. 그만큼 왕실과 대소 신료들이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시기에 세조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은 세조의 앞날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실록> 총서에서 쓰고 있는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해 6월 21일에 세조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인생의 고락이 자기로 말미암아 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진 자는 그 업을 탐하여 기(氣)가 저상(沮喪)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물욕을 한껏 부리다가 몸을 망치는데 이는 함께 그 괴로움에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그 업을 탐하면서도 기를 조절하고, 작은 욕심을 버리고 큰 욕심을 이루게 한다. 그대는 혹시 이 지인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있지는 않는가? 한 잔의 물을 떠낸다 하여도 강하(江河)에는 손실이 없으며, 뜬구름이 잠시 가리운다 하여 태양에 무슨 훼손이 되겠는가마는, 태산(泰山)의 그 큰것도 한 미세한 티끌의 모임이요, 성인의 덕도 작은 선(善)을 쌓고 쌓아 이룬 것이니, 그대는 힘쓰기 바란다.”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은 바로 지나치게 독주해 나가는 세조의 현 위치를 다시금 수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라에서 그 지위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이들의 경우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스스로를 조심해야 하고 거만함이 있어서는 안되며 또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부정적인 정치력을 발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당장의 이익은 될지라도 곧바로 자신의 지위를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약관을 넘어 입지의 나이로 접어드는 중간에 위치해 있는 세조는 바로 이러한 자세를 갖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한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夜中聞松風
뚫린 창 너머로 별을 헤아려 본다. 穿窓見天星
탄식한다. 나의 노둔한 재질을 歎我駑劣才
학업에 진력한들 어이 능히 이루랴? 服業安能成
한없는 고요 속에서 박명을 알지만 窮靜知薄命
그 누가 이 심정을 위로해 주리. 誰能尉此情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의 사람들을 我懷古之人
행하신 바가 성실 않음이 없네. 所用無不誠
성실은 도를 행하는 방법 誠以履道方
옛 것을 익혀서 더욱 정진하리라. 業故用彌精
큰 근본이 잘 정해져야 大原旣克定
온갖 인재들이 많은 영화를 누리리라. 百才享多榮

 같은 해 11월 세종은 공법(貢法)의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토지의 생산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일정한 양의 조세를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항상 같은 양의 수입이 있어야 국가재정의 예산을 기획할 수 있는 만큼 이는 그 필요성과 효과에 있어 지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해 나갈 수 있는 인물로 세종은 바로 세조를 지목하였다.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뒤 세조를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세조대왕 - 생애 (8)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곧 세종은 문종에게 진양대군(晉陽大君)을 전제소 제조로 삼을 뜻을 비추었고 진양대군에게 명하길,
“이러한 큰 일은 네가 주재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여 확정지었고 이듬해 전분 6등과 연분 9등제로 정해지는 공법이 되어 그 뜻을 충분히 살리게 되었다.
 세종의 신망을 받고 있는 세조인지라 그에게 청탁하여 한자리 해 볼까 하는 이들이 그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사실 정치권력의 핵심, 그것도 지존(至尊)의 둘째 아들로서 그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에게 접근하여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뇌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를 싸들고 오게 된다.
 그는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조직화하고 확대시켜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사조직이 될 수도 있고 또 국가통치력에 막강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 아홉이 되던 이 해는 그에게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바로 그의 대군 칭호가 진양에서 수양(首陽)으로 개칭되었고 이 후 그를 지칭할 때에는 묘호인 세조외에는 이 칭호로 불리워진다. 더불어 이러한 대군 칭호가 주어지면서부터 그는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대군으로서 해야하는 종실의 일과 여러 가지 공식 직함을 수행하는 과업이 그를 바쁘게 하였다. 그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였고, 이에 대한 평가는 많은 이들에게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으로 대신되었다.

 왕도정치하에서의 정치 권력은 극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인 세조가 그 뜻을 분명히 깨달아 공연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가만히 있어도 정치적 견제를 받을 자신인데 공연히 서툰 행동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판단, 자신을 억제하고 다스려 갔다.
 세종은 김종서, 황보인 등과 여러 대신들을 적재적소에 쓰면서 항상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실을 능가하는 정치권의 노출이 없었다. 한편으로 집현전을 통하여 학문과 의례, 제도 등을 연구하게 하면서 이로써 그 학식과 정견을 키운 이들을 정치권 내로 흡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장래를 책임지게 하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종실인 왕자대군들과 대신들 간의 충돌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이들을 잘 조정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일들은 터질 일이 없었다. 문제는 훗날 벌어졌고 결국 그들과 세조와의 대결 양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세조는 1446년(세종 28)에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활달함과 영특함이 지나쳐 다른 형제들의 질시를 받을 것을 항상 우려하던 모후였건만, 그리고 아버지인 세종보다도 평상시의 건강이 훨씬 좋았었건만 모후는 한순간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부왕인 세종은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불교에 더욱 관심을 가졌고 사찰을 짓거나 법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불경을 언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에 세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종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세종은 중요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결재를 하였지만 그 밖의 일은 세자인 문종으로 하여금 처결케 하였다. 왕자들도 이제 거의 장성하였고 누구하나 모자란 점이 없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제군(諸君)들의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별로 없을 듯하였다.

 30여 년이 넘는 치세동안 그러한 여지를 모두 없앴다고 할 정도로 정국을 안정시켜 놓았고 경제, 군사, 외교 등의 면에 있어 어느 하나 소홀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은 더욱 깊었다. 또 왕 자신의 건강도 바쁜 정무에서 벗어나 휴양을 취하니 어느 정도 나아가는 듯 하였다. 1450년 2월 54세를 일기로 세종이 승하한 것은 바로 그러한 기우가 적중된 것이었다.

세조대왕 - 생애 (9)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문종은 대행대왕의 상을 치르느라 거의 혼신의 정기를 다 쏟았다. 가뜩이나 병으로 쇠약해진 몸이었는데 그의 건강은 위태위태할 지경이어서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대리청정을 하면서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세종 생전과 비교할 때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또 세조도 그가 가진 모든 능력으로써 문종을 보좌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 귀화해 온 여진족들이 서울에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하는 일 없이 봉록만을 먹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국가의 여론은 이들을 추려서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 때 세조가 문종에게 말하기를,
 “이는 향화(向化)하려는 마음을 막는 것이니,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법은 그들을 부지런히 부리고 편히 거처하게 하면 일없이 봉록 먹는 것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부지런히 부리는 것은 그 기운을 제어함이요, 편히 거처하게 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문종의 동의를 받게하였다.

 세종이 승하하기 전인 정월에 세종은 문종과 세조를 불러 유교(遺敎)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들 두 사람이 서로 도와 나라를 다스려 나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즉 세종은 그 유교에,
 “나라를 가진 자는 멸망을 은휘(隱諱)하지 않으며, 삶을 가진 자는 죽음을 은휘하지 않는다. 내 이제 너희 두 사람에게 말하거니와, 대저 신하들이란 임금이 죽는 그 날로 즉시 그 형제들의 허물을 공격하는 법이다. 내가 죽는 날에는 너희 형제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친애하는 마음을 위주로 하면 밖의 사람들이 능히 이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부득이 해서 비록 죄를 주더라도 재삼 생각하고 그 정리를 익히 헤아려서 속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효령대군 등을 공격하는 자가 많았는데 내가 아니었던들 능히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응대군(永膺大君)이 항상 내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는 그 소중함이 음식먹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주의를 아끼지 않았다.

 문종의 경우 그 동안 섭정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별다른 정책의 변화를 꾀할 필요는 없었다. 세조는 문종을 보좌하기 위해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문종의 체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와 비례하여 신하들, 특히 원로 대신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왕권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문종은 강한 성격으로 신하들을 휘어잡고 자신의 의지를 펴나가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외유내강형으로 신하들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나가거나 그들 사이를 균형있고 조화롭게 해나가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였다. 이것은 신하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영역을 마련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문종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표면화되었다.

 세조에게 있어 이 시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문종은 세조로 하여금 <병요(兵要)>, <무경(武經)>도 그러하도록 하였으며, <음양서(陰陽書)>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그 동안 <동국병감(東國兵鑑)>을 찬집하면서 보였던 세조의 능력은 단연 뛰어났고, 아우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문종이 그에게 맞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리고 진법(陣法)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져 진법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을 하면서 문종은 세조와 더불어 군국정사를 무리없이 처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세조대왕 - 생애 (10)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수양대군은 서른 여섯의 나이가 되면서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하였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맡아 왔던 여러 직임과 서적편찬 및 연구 등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로 하여금 모든 능력을 발휘하게끔 후원해주던 형 문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함으로써 시련을 맞게 된다. 그것은 세종의 승하보다도 그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때부터 서서히 불거져 나오던 자신과 다른 대신 및 대군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552년 세조는 왕실의 가장 웃 어른으로서 관습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 어린 단종이 국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권력의 실질적인 운영자로서 또 단종의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수양대군 세조였지만 그만큼의 갈등도 커졌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점을 그가 아직은 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히 지존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의 조카인 단종이었던 것이다. 형 문종이 승하하면서 대신들에게 유언을 남겨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한 것도 역시 단종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들은 바로 김종서, 황보인 등과 같은 고명대신들이었다. 단종을 둘러싸고 있는 두 부류의 비등한 세력은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경오년(庚午年 : 1452년)의 여름은 지리하게도 더웠지만 문종의 장례와 단종의 즉위라는 대사를 치러야 하는 왕실과 신료들은 그저 흐르는 땀을 훔칠뿐 누구 하나 큰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자신의 강성함을 유(柔)함으로 이끌어주던 문종을 잃은 세조로서는 더욱 큰 슬픔에 젖어 있었다. 문종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채 뒤늦게 달려와야 했던 그인지라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 단종을 둘러싼 암투가 본격화되는 시점은 바로 문종이 붕어하면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고명대신들이 `황표정사(黃標政事)\'로 일컬어지는 전횡을 행하면서부터였다.
 단종 재위 3년간의 정치는 바로 수양대군과 대신 김종서 · 황보인들간의 대립양상이 표면화되면서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 작용을 하였다.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권력의 집중과 동시에 공동화(空洞化)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반대로 질서를 다시금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것이 정난(靖難)이든 개혁이든, 혹은 혁명이든 간에 결국은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수양대군 세조는, 서른 여섯이라는 장성한 나이로 그 누구못지 않은 정국의 추세를 읽을 줄 아는 혜안(慧眼)이 있었다. 이 동안 그는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 등을 만나면서 그 힘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그의 움직임을 김종서와 황보인 측에서 약간은 눈치를 챈 듯하였고 그들은 이에 대한 대비를 꾀하고자 하였다. 바로 왕실 종친을 염두에 두고 내놓은 분경(奔競) 금지의 시행령이었지만, 세조와 안평대군 등의 반발이 거세자 이를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적극적인 대응책이 아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대로 두는 미온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세조는 1452년 10월에 명나라에서 고서(誥書)와 면류관(冕旒冠)을 내려준 것에 대해 사례하려고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논할 때 스스로 자청하여 갈 것을 청하였다.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이는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세조대왕 - 생애 (11)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세조의 명나라 행은 사실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포함한 안평 · 임영 · 금성 · 영응대군이 왕실에 포진해 있고, 김종서 · 황보인 · 정분 등의 재상이자 고명대신들, 정인지 · 최항 · 신숙주 · 성삼문 등의 집현전 출신 및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신진 세력들이 어느 정도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완충적 힘으로 일시적인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자신의 공백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권람과 한명회 등을 통해 충분히 메꿔나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여기에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대동하여 인질아닌 인질로 삼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더구나 명나라 행으로 인해 얻는 실리적인 면과 명분적인 면에서의 이득과 성과는 컸다. 자신의 존재를 명나라에 알림으로써 자신이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성공하였다. 이 한 번의 사행(使行)으로 뒷날 왕위에 오른 뒤 명의 승인을 큰 무리없이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즈음 안평대군 등은 많은 문인재사(文人才士)를 문객(門客)으로 받아들이면서 매일 그 저택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반면 세조의 경우는 평소의 검소한 성격탓으로 그들에게 술이나 음식 등을 대접하거나 시회(詩會) 및 천렵(川獵), 뱃놀이 등을 하여 풍류를 즐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인 안평대군의 경우 사실 정치적 지략의 면에서 세조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문인으로서의 재질은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고, 또 문물을 아끼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정치적 야심을 성공시키기에는 미흡하였다. 세조가 사행길을 떠났을 때 고명대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오히려 왕실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풍류적 기질과 우유부단함은 그의 판단력을 결정적으로 막아버렸다. 오히려 그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혼란속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할 뿐이었던 것이다.

 세조는 계유년 4월에 명나라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왕실의 실질적 주인으로 나서기 위한 계획을 급진전시켰다. 권람 · 한명회 등을 통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 류수(柳洙) 등을 받아들여 마침내 같은 해 10월 거사를 일으켜 먼저 ] 김종서를 죽인 것을 시발로 황보인 등을 처단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대권을 잡았다.

 계유정난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세조의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정난의 과정에서 희생된 사육신(死六臣) 및 생육신(生六臣), 단종의 사사, 안평 등 여러 대군들의 죽음이라는 피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일어선 정권이라는 비판적 시각의 평가와 다른 한 가지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권력의 실질적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권력공동화 현상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정치행위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왕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일이 결정되는 왕도정치 체제에서의 주인은 실질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군주이다. 군주는 자신의 혈족들로 왕실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명을 대행하는 신료로 구성한다. 이것은 곧 왕과 왕실, 신료라는 세 축이 형성됨을 뜻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간에 왕권이 미약해진다는 것은 곧 전체 정치 상황을 조감하고 이를 조정하는 조율자로의 위상이 미약해짐을 의미한다.

세조대왕 - 생애 (12)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단종 재위년간의 상황은 바로 이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단종 자신은 매우 총명하고 그 자질도 훌륭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과 문종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니 그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문제는 왕권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 또 이러한 상황을 보좌해 줄 모후가 일찍 죽었다는 점 등이 왕권의 약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단종의 역사적 상황이었다.

 수양대군 세조는 그 동안 세종조와 문종조를 거치면서 왕권의 유지 및 강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이를 보좌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굳이 명분상으로 왕은 천명을 받아 인간사회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사회에서 군주가 갖는 위상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왕권은 절대적인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꾀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군주의 덕(德)과 인(仁), 예(禮) 등은 신하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왕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신권(臣權)의 확대를 의미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라든가 소수 집정대신에 의한 정치에 대해 그 바탕에서부터 배치되는 것이었다. 왕권의 위상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세조의 어록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인(仁)을 좋아하는 데도 폐단이 있으니 그 폐단이 임금을 속이게 되고, 의(義)를 좋아하는 데도 역시 폐단이 있으니 그 폐단이 갑자기 반역을 일으키기도 한다. 폐단이 되지 않는 일이란 오직 극히 높은 덕을 갖춘 사람만이 능히 할 것이다.”

라고 하여 극히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을 군주로 본다면 군주가 갖는 위상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유정난은 세조의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하고 실현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정난 후 곧바로 군국(軍國)과 관련된 요직을 맡음으로써 첫발을 내딛었다. 즉, 영의정 · 이조판서 · 병조판서와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임하게 된 것이다. 이 때가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일은 세조가 개인의 영달과 부귀를 쫓아서 만사를 처리하지 않았음이다. 그는 본래 성품이 검박하고, 스스로의 덕을 수양하는데 온 힘을 쏟았고, 또 그의 자식들도 그와 마찬가지의 생활을 했음이 보인다. 이는 동생인 안평대군이나 그 외의 대군들의 어찌보면 사치스러웠던 생활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품성은 훗날 왕위에 있으면서 또 장자인 의경세자의 능과 자신의 능을 조성할 때 제왕으로서의 화려하고 웅장함을 갖추기보다는 검소하면서도 단아하게 만드는 것을 위주로 하였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력을 동원하여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을 숙청한지라 그 반발도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자의든 타의든 간에 단종을 주심점으로 해서 모든 일들이 계획되어졌다. 이러한 거사는 단종이 죽는 1457년 10월까지 신하들과 대군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조대왕 - 생애 (13)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1453년 10월 25일 함길도 종성에서 일어난 이징옥의 난과 1456년 6월에 일어난 상왕복위사건, 1457년 9월에 일어난 넷째 동생 금성대군의 단종복위계획 등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세조로 하여금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왕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고자 했던 그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의 흐름은 그에게 모든 책임을 지웠고 그는 차마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을 가슴에 안고 인고의 세월을 사직의 창업과 보존이라는 대의를 위해 결정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수양대군 세조는 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단종이 결심하게 된 계기는 친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대신하여 단종을 보살핀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상궁 박씨, 한남군, 영풍군 등의 잇따른 유배로 인한 불안감과 모든 정치구조가 세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즉 단종은 이에 대해, 윤 6월 11일에 한확 등에게 전교하였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라고 하여 자신으로 인해 생겨나는 더 이상의 희생을 줄여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이상 왕실과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단종에게 있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 빠른 속도로 국정을 장악해 나갔다. 내부적으로는 일단 원자인 장(暲)을 왕세자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9월 2일 그는 갑자기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앞서의 죄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조는 그 동안 정책을 과단성있게 처결해 나가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가 가장 아끼던 왕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렇게 강건하고 굳세던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세자가 숙성하지 못할 경우 다시 단종과 같은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세자를 곧바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세조는 왕자 황(晄)을 세자에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세조의 뒤를 잇는 예종이다.

 왕실과 조정은 안정을 찾아갔다.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 정난공신과 원종공신들이 자신의 위치를 찾고 세조의 의지를 쫓아 많은 일들을 해나갔다.  특히 세조는 세자의 왕자수업에 자신이 직접 온갖 정성을 쏟았다.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자신과 왕실의 힘, 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그가 전개한 일들을 후계자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자로 하여금 철저한 왕자수업을 하게 하였다. 세자가 학교에 들어갈 때 신분에 따르지 않고 연령에 따라서 다른 학생 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인 치주례(齒胄禮)를 행하고 박사(博士)를 따라서 수업하게 하였다.

 고금을 들어 친절하고 간절하게 논설하여 세자를 훈도(訓導)하였고, 유사(儒士)를 가리어 경사(經史)를 교수하게 하였으며, 친히 훈사(訓辭) 1편을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항덕(恒德) · 경신(敬神) · 납간(納諫) · 두참(杜讒) · 용인(用人) · 물치(勿侈) · 사환(使宦) · 신형(愼刑) · 문무(文武) · 선술(善述)의 10가지 일을 항목으로 삼고, 나라에 중요한 것을 갖추어 기술하여 세자로 하여금 항상 외우게 하여 철저한 세자 수업을 시켰다.
세조대왕 - 생애 (14)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1465년(세조 11) 2월 6일, 길창부원군 권람이 세상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가장 어려울 때 고락을 같이하였던 그의 죽음은 세조에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세조도 지천명(知天命)이라는 오십의 나이로 접어들었다. 대군 시절부터 정신없이 달려온 그 인지라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후궁을 둔다거나 연회를 자주 베푼다거나 등의 사치는 벌인 적도 없었다. 다만 그는 불공을 드리거나 불경을 언해하면서 소박하면서도 희미한 미소를 얻을 수 있었다.
 성리학으로 이념적 기반을 다진 신료들이 왕에게 반대하더라도 이것만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희생한 만큼의 대가로서 받을 즐거움은 왕위에 올랐다는 자체 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에게 그만큼의 세월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세조 자신이 그 동안 노력하였던 왕권의 강화와 왕실 위상의 확립은 이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남은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면서 후사를 정하는 것이었다. 세조 13년 5월에 일어난 이 시애의 난은 이러한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고, 신숙주나 한명회 등에 대한 무고가 밝혀지는 과정은 이들이 왕의 사후를 도모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갖게 만들었다.
 또 한가지 남은 것은 결코 자신 못지 않은 판단력과 용기, 지혜와 과감성을 가진 정희왕후 윤씨에 대한 애정이었다. 사실 세조는 많은 부분에서 그녀의 내조를 받았다. 특히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그녀가 손수 갑옷을 입혀주며 출정할 것을 간곡히 말하지 않았다면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도 사세의 판단과 정사의 처리 등에서는 고금에 드문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세조 자신이 왕위에 있을 시에는 왕후로서 내전을 다스려 무리가 없도록 하여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왕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이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윤씨에 대한 세조의 믿음이었고, 그녀는 이를 어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행한 대왕대비였다.

 세조 14년 무자년의 하늘은 많은 변화를 이 땅에 내려주었다. 특히 8, 9월에 접어들면서 혜성이 자주 관측되었고, 세조의 병세도 더욱 나빠졌다. 나이와 함께 그 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이 그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의 병세가 나아지고 또 나아질 수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운(運)이 다한 영웅(英雄)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는 9월 7일에 세자에게 전위(轉位)하고자 그 뜻을 전지(傳旨)하였을 때, 정인지 등이 불가하다고 한데 대한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친히 경복궁에서 면복(冕服)을 가지고 오게 하여 세자에게 내려주고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즉위토록 하였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기력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순간이었다.
세조대왕 - 생애 (15)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예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본 세조는 다시금 병환이 악화되었고, 이튿날 수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는 용맹함과 총명함을 보이고, 장성해서는 세종과 문종을 보좌하다가 왕권의 강화라는 자신의 의지를 펴기 위해 정난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또 다른 왕업을 일으켰던 그의 생애는 많은 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희생과 고통도 따랐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누군들 친혈족을 베는데 아픔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의 운명과 번민, 그리고 영광은 이제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의 광릉(光陵)에 묻혀 역사의 큰 획을 그으면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리고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 14년(1483) 3월 30일 임술(壬戌)에 온양(溫陽) 행궁(行宮)에서 승하하였는데, 이 때 그녀의 세수가 66살이었다. 그녀는 세조의 곁에 묻히면서 세조가 승하한 뒤 남겨진 시간을 정리하고 다시금 그와 함께 하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12일 광릉(光陵) 동편 언덕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