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황제 - 4대조(四大祖)를 추존(追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내림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 문무 양과 중의 어느 하나도 폐지할 수 없으니 서울에는 국학과, 지방에는 향교에 생도를 더 두어 강학(講學)과 권선(勸善)에 더욱 힘써 인재를 양육하겠다. 과거라는 제도는 본래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취하려는 것이었는데, 좌주(座主 : 試官)니 문생(門生)이니 하면서 공변된 천거를 가지고 사사로운 은혜로 삼고 있으니 애초에 제도를 만들었던 뜻과 달랐다. 지금부터는 중앙은 성균정록소(成均正錄所 : 성균관 직원이 時政을 뽑아 적어 둔 곳), 지방은 각 도의 안렴사(按廉使)가 그 학교에서 경의에 밝고 행실이 바른 자를 뽑아 연령 · 본관 · 삼대(三代 : 증조부 · 조부 · 부) 및 능통한 경서(經書)를 기록하여 성균관장에게 올리게 한다. 둘째 시험장에서는 능통한 경서를 시강(試講)하는데, 사서부터 오경 · 통감 이상까지 통한 자는 통한 경서의 많고 적음, 알고 있는 문리의 정밀하고 소략함으로 등급의 고하를 정하여 제일장(第一場)으로 삼는다.

그리고 입격한 자를 예조에 보내면 예조에서는 표문(表文) · 장주(章奏) · 고부(古賦)를 시험하여 중장(中場)으로 삼는다. 책문(策問)을 시험하여 종장(終場)으로 삼아 삼장(三場)을 통하여 입격한 사람 33명을 상고(相考)해서 이조에 보내도록 한다. 그러면 이조에서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탁용하도록 하고 감시(監試)는 폐지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강무(講武)의 법은 주장(主掌)한 훈련관(訓練觀)에서 때때로 무경칠서(武經七書 : 孫子 · 吳子 · 司馬法 · 尉?子 · 三略 · 六韜 · 李衛公問對)와 사어(射御)의 기예를 강습시켜 통한 경서의 많고 적음, 기예의 정밀함과 거침으로 등급의 고하를 정한다. 거기에 입격한 자 28인에게 문과의 예에 의하여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병조에 보내어 탁용에 대비하도록 하겠다.

 1. 관혼상제는 나라의 큰 법이다. 예조에서는 경전을 자세히 연구하여 고금의 예를 참작해서 확실한 법령을 정해 인륜을 후하게 하며 풍속을 바르게 하라.

 1.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므로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대간(臺諫) · 육조(六曹)에게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되 공변되고 청렴하며 재간이 있는 자를 얻도록 한다. 그에게 적당한 직책을 맡겨서 30개월의 만기가 찼을 때 정치의 실적이 특별하게 나타난 자를 탁용할 것인데, 만약 천거한 사람이 그 적임자가 아니었다면 죄가 그를 천거한 사람에게 미칠 것이다.

 1. 충신 · 효자 · 의부(義夫) · 절부(節婦)는 풍속과 관계되는 것으로 권장해야 할 것이다. 소재 관사(所在官司)가 순방하고 위에 아뢰도록 하여 우대해서 발탁 · 등용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旌表)하게 할 것이다.

 1.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으로서 먼저 할 일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해야 하는 것으로 부역을 면제해 주겠다.

 1. 외방의 이속(吏屬)이 서울에 올라와서 부역에 종사하는 것이 기인(其人 :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로 데려와 볼모로 삼고, 그 출신 지방의 고문으로 삼았음)과 막사(幕士) 같이 하고 있다. 선군(選軍)을 설치하면서부터는 스스로 그 임무가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겨 노예와 같이 노역을 하고 있으니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앞으로는 일체 선군을 폐지하겠다.

 1. 전곡(錢穀)의 경비(經費)는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 의성창(義成倉) · 덕천창(德泉倉) 등의 여러 창고와 궁사(宮司)는 삼사(三司)에서 회계 출납하는 수효에 의거하고, 헌사(憲司)의 감찰은 풍저창(豊儲倉) · 광흥창(廣興倉)의 예와 같이 할 것이다.
태조고황제 - 4대조(四大祖)를 추존(追尊)하고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내림 (3)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 역(驛)과 관(館)을 설치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 사명(使命)이 번거롭게 많아서 피폐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이제부터는 차임하여 보내는 공적인 사행(使行)에게 관에서 급료를 주는 일을 제외하고 사적인 용무로 왕래하는 사람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공급을 정지하도록 한다. 이를 어긴 자는 주객 모두 논죄하겠다.

 1.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이었는데, 고려 말기에는 호포를 받고 또 잡공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호포를 일체 감면하고 각 도에서 구운 소금은 안렴사에게 부탁, 염장관(鹽場官)에게 명하여 백성들과 무역해서 국가의 비용에 충당케 할 것이다. 국둔전(國屯田)은 백성에게 폐해가 있으므로 음죽(陰竹)의 둔전을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겠다.

 1. 고려 말기에는 형률에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형조(刑曹) · 순군부(巡軍府) · 가구소(街衢所)가 각기 소견을 고집, 형벌이 적합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형조가 형법(刑法) · 청송(聽訟) · 국힐(鞫詰)을 관장하고 순군(巡軍)은 순작(巡綽) · 포도(捕盜) · 금란(禁亂)을 관장할 것이다. 형조에서 일단 판결을 내리면 설사 태죄(笞罪)를 범했더라도 반드시 사첩(謝貼 : 職牒)을 빼앗고 관직을 파면시켜 그 부러움이 자손에게 미쳤었는데, 선왕이 법을 만든 뜻은 이런 데에 있지 않았다. 지금부터 중앙과 지방의 형을 판결하는 관원은 모든 공법 · 사법의 죄 중에서 대명률(大明律)의 선칙(宣勅 : 교지)을 추탈(追奪)하는 것에 해당 되어야만 사첩(謝貼)을 회수하고, 자산이 관청에 몰수되어야 할 죄를 범해야만 가산을 몰수하도록 할 것이다. 공무상 과실이 있을 때에는 처벌 대신 관원의 명부에 기록해 두고, 환직(還職) · 수속(收贖) · 해임(解任) 등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율문(律文)에 의하여 과죄(科罪)하고 결단하여 전날의 폐단을 밟지 않을 것이며 가구소(街衢所)는 혁파하겠다.

 1. 전법(田法), 즉 토지법은 모두 고려의 제도를 따를 것이며, 증감할 것이 있으면 주장관(主掌官)이 재량하여 위에 아뢰어 시행하도록 하겠다.

 1. 경상도의 배로 운송해 오는 공물은 민간에게 폐해가 많으니 감면해야 마땅하겠다.

 1. 유사(有司)가 `우현보 · 이색 · 설장수 등 56인은 고려 말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 재앙의 시작이 되었으니 마땅히 법에 처하여 장래를 경계해야 한다\'고 상언(上言)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가엾이 여겨 목숨을 보전하게 하겠다. 우현보 · 이색 · 설장수 등의 직첩을 회수, 그들의 직위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바닷가로 유배시켜 죽을 때 까지 관직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홍수(禹洪壽) · 강회백(姜淮伯) · 이숭인(李崇仁) · 조호(趙瑚) · 김진양 · 이확 · 이종학 · 우홍득(禹洪得) 등은 직첩을 회수하고 장 1백을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이다.
 
최을의(崔乙義) · 박흥택(朴興澤) · 김이(金履) · 이내(李來) · 김무 · 이종선(李種善) · 우홍강(禹洪康) · 서견 · 우홍명(禹洪命) · 김첨(金瞻) · 허응(許膺) · 류향(柳珦) · 이작(李作) · 이신(李申) · 안노생(安魯生) · 권홍(權弘) · 최함(崔咸) · 이감(李敢) · 최관(崔關) · 이사영(李士穎) · 류기(柳沂) · 이첨(李詹) · 우홍부(禹洪富) · 강여(康餘) ·김윤수(金允壽) 등은 직첩을 회수하고 장 7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귀양 보 낼 것이다.
 김남득(金南得) · 강시(姜蓍) · 이을진(李乙珍) · 류정현(柳廷顯) · 정우(鄭寓) · 정과(鄭過) · 정도(鄭蹈) · 강인보(姜仁甫) · 안준(安俊) · 이당(李堂) · 이실(李室) 등은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안치할 것이며, 성석린(成石璘) · 이윤굉(李允紘) · 류혜손(柳惠孫) · 안원(安瑗) · 강회중(姜淮中) · 신윤필(申允弼) · 성석용(成石瑢) · 전오륜(全五倫) · 정희(鄭熙) 등은 본향(本鄕)에 안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든 죄인 중에서 일죄(一罪 : 사형수)를 범하여 사유(赦宥)가 용납되지 않는 자를 제외하고 이죄(二罪) 이하의 죄, 즉 1392년(태조 1) 7월 28일 이른 새벽부터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않은 죄를 지은 자 모두를 사면할 것이다.
 이처럼 즉위한 후 처음으로 내린 교서를 보면 민생에 폐해가 되는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다짐했으며, 또 조선의 개국에 불만을 품고 반대를 모의했던 고려조 관료들의 죄과에 대해 그 형벌을 경감해 주고 사면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왕조 혁명에 따른 개혁 정책에 모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태조고황제 - 문무백관의 제도 결정과 공신(功臣)에 대한 관작제수(官爵除授)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문무백관의 제도 결정과 공신(功臣)에 대한 관작제수(官爵除授)

 한편 동반(東班)의 정1품은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 보국숭정대부(輔國崇政大夫)이고 종1품은 숭록대부 · 숭정대부이다. 정2품은 정헌대부(正憲大夫) · 자헌대부(資憲大夫)이고 종2품은 가정대부(嘉政大夫) ·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정3품은 통정대부(通政大夫) · 통훈대부(通訓大夫)이고, 종3품은 중직대부(中直大夫) · 중훈대부(中訓大夫) 이다. 정4품은 봉정대부(奉正大夫) · 봉열대부(奉列大夫)이고 종4품은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봉대부(朝奉大夫)이다. 정5품은 통덕랑(通德郞) · 통선랑(通善郞)이고 종5품은 봉직랑(奉直郞) · 봉훈랑(奉訓郞)이다. 정6품은 승의랑(承議郞) · 승훈랑(承訓郞)이고 종6품은 선교랑(宣敎郞) · 선무랑(宣務郞)이다. 정7품은 무공랑(務功郞)이며 종7품은 계공랑(啓功郞)이 다. 정8품은 통사랑(通仕郞)이고 종8품은 승사랑(承仕郞)이다. 정9품은 종사랑(從仕郞)이며 종9품은 장사랑(將仕郞)이다.

 서반(西班)의 정3품은 절충장군(折衝將軍) · 과의장군(果毅將軍)이고, 종3품은 보의장군(保義將軍) · 보공장군(保功將軍)이며, 정4품은 위용장군(威勇將軍) · 위의장군(威毅將軍)이고 종4품은 선절장군(宣節將軍) · 선략장군(宣略將軍)이다. 정5품은 충의교위(忠毅校尉) · 현의교위(顯毅校尉)이고 종5품은 현신교위(顯信校尉) · 창신교위(彰信校尉)이며, 정6품은 돈용교위(敦勇校尉) · 진용교위(進勇校尉)이고, 종6품은 승의교위(承議校尉) · 수의교 위(修義校尉)이다. 정7품은 돈용부위(敦勇副尉)이고 종7품은 진용부위(進勇副尉)이며, 정8품은 승의부위(承議副尉), 종8품은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이 밖에 동반과 서반 문무 백관의 직품과 각 아문의 직제 및 인원수(人員數)에 대해서는 너무 번다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개국에 공이 있는 공신들에게 관작을 제수하였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문하부에 교지를 내려서 홍영통(洪永通)은 판문하부사로,
안종원(安宗源)은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배극렴은 익대보조공신 문하좌시중 성산백(翊戴補祚功臣門下左侍中星山伯)으로,
조준은 좌명개국공신 문하우시중 평양백(佐命開國功臣門下右侍中平壤伯)으로,
이복제(異腹弟) 리화는 좌명개국공신 상의문하부사 의흥친군위 도절제사 의안백(佐命開國功臣商議門下府事義興親軍衛都節制使義安伯)으로,
윤호는 판삼사사로, 김사형은 좌명공신 문하시랑 찬성사 판 팔위사 상락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上洛君)으로,
정도전은 좌명공신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봉화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君)으로,
정희계는 좌명공신 참찬문하부사 팔위상장군 계림군(佐命功臣參贊門下府事八衛上將軍鷄林君)으로,
이지란은 보조공신 참찬문하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청해군(補祚功臣參贊門下府事義興親軍衛節制使靑海君)으로,
남은은 좌명공신 판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 의령군(佐命功臣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宜寧君)으로,
김인찬은 보조공신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 절제사 익화군(補祚功臣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益和君)으로,
장사길은 보조공신 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 절제사 화령군(補祚功臣知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和寧君)으로,
정총은 보조공신 첨서 중추원사 서원군(補祚功臣僉書中樞院事西原君)으로,
조기(趙琦)는 보조공신 동지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 은천군(補祚功臣同知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事銀川君)으로,
조인옥은 보조공신 중추원부사 용성군(補祚功臣中樞院府事龍城君)으로,
황희석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남재는 좌명공신 중추원학사 겸 사헌부 대사헌 의 성군(佐命功臣中樞院學士兼司憲府大司憲宜城君)으로 삼았다.

태조고황제 - 제왕자(諸王子)의 봉군(奉君)과 세자책봉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제왕자(諸王子)의 봉군(奉君)과 세자책봉

 1392년(태조 원년) 8월 7일 병진, 강씨(康氏)를 세워 현비(顯妃)로 삼았고 여러 왕자를 각각 군으로 봉하였다. 방우(芳雨)를 진안군(鎭安君)이라 하고 방과(芳果 : 후에 정종대왕)를 영안군(永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았다. 방의(芳毅)를 익안 군(益安君)이라 하고 방간(芳幹)을 회안군(懷安君)이라 하였다. 방원(芳遠 : 태종대왕)을 정안군(靖安君)이라 하고 방연(芳衍)을 덕안군(德安君)이라 하고 방번(芳蕃)을 무안군(撫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았다. 부마 이제(李濟)를 흥안군(興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삼았고, 이복형(異腹兄) 원계(元桂)의 아들 양우(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라 하였다.

 8일 정사, 태종대왕을 동북면에 보내어 사대(四代)의 능실에 제를 올려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게 하고 이어 능호(陵號)를 올렸다. 황고(皇考)는 정릉(定陵), 황비는 화릉(和陵), 황조(皇祖)는 의릉(義陵), 황조비는 순릉(純陵), 황증조(皇曾祖)는 지릉(智陵), 황증조 비는 숙릉(淑陵), 황고조(皇高祖)는 덕릉(德陵), 황고조비는 안릉(安陵) 이라고 하였다.
 
왕요(王瑤)를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하여 간성군(杆城郡)에 두었고, 요의 아우 우(瑀)를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해 마전군(麻田郡)에 두어서 왕씨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고려의 왕대비 안씨를 의화궁주(義和宮主)로 봉했다.예조전서(禮曹典書) 조박은 종묘 · 적전(籍田) · 사직 · 산천 · 성황 · 문선왕(孔子)의 석전제(釋奠祭)가 고금에 통하는 국가의 상전(常典)이므로 월령의 규식대로 거행하도록 유사(有司)에게 명하였다. 또한 원구(圓丘 : 천자가 동짓날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는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예절이니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20일 기사, 태조는 어린 방석(芳碩)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당초에 공신 배극렴 · 조준 · 정도전이 세자를 세울 것을 주청할 때 나이와 공로를 따져 세울 것을 청하려 하였는데, 태조가 신덕왕후를 존중하여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芳蕃)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었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서로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신덕왕후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고 한다면 막내아들이 조금 낫겠다.”
라고 하였다. 때가 되어 태조가
 “누구를 세자로 삼을 만한가?”
하고 물었으나 반드시 장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는 사람도 없었고 공로가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배극렴이
 “막내아들 방석이 좋겠습니다.”
하자, 태조가 드디어 뜻을 정해서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교지를 내려 개국공신의 위차(位次)를 정하였는데, 문하좌시중 배극렴, 우시중 조준, 문하시랑찬성사 김사형 · 정도전, 흥안군 이제, 의안백 리화, 참찬문하부사 정희계 · 이지란, 판중추원사 남은, 지중추원사 장사길, 첨서중추원사 정총, 중추원부사 조인옥, 중추원학사 남재, 예조전서 조박, 대장군 오몽을 · 정탁(鄭擢) 등 44인의 위차를 정해 주었다. 그리고 배극렴 · 조준 등이 시무책을 이렇게 올렸다.

태조고황제 - 배극렴 · 조준 등의 시무책 상언(上言)  과 주상(主上)의 수용(受容)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배극렴 · 조준 등의 시무책 상언(上言)  과 주상(主上)의 수용(受容)

 1.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며 농상(農桑)은 의식의 근본입니다.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양성하고 농상을 권장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하소서.

 1. 수령은 전야(田野)가 황폐한가 개간되었는가를 보고, 호구가 증가되었는가 감소되었는가를 보아 출척(黜陟)을 하소서.

 1. 신구 수령이 바뀔 즈음에는 관사(官事)가 해이해지는 일이 많으니, 지금부터는 서로 해유(解由)를 주고 받은 후에 임지를 떠나게 하소서.

 1. 봉명사인(奉命使人)과 군관(軍官) · 민관(民官)에게는 관청에서 미곡을 급여하고, 말을 주어야 할 곳은 양부(兩府) 이하의 관원까지 모두 정해진 수효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일정한 법을 삼게 하소서.

 1. 각 도에서 경의(經義)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도덕을 겸비해 사범이 될 만한 사람, 시무에 통달하고 재주가 경제에 합당하여 사공(事功)을 세울 만한 사람, 문장에 익숙하고 필찰을 전공하여 문한(文翰)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 형률과 산수에 정통하고 행정에 통달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 모계(謀計)와 도략(韜略)이 깊고 용맹은 삼군에 으뜸가는 장수가 될 만한 사람,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고 봉술(棒術)과 투석에 능하여 군무를 담당할 만한 사람, 천문 · 지리 · 복서 · 의약 등 한 가지라도 기예를 전공한 사람을 자세하게 방문하고 독촉하여 조정에 보내 발탁해 쓰는데 대비하게 하시고, 서인 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며 농사에 힘쓰는 사람에게는 조세의 반을 감면해 주어 풍속을 권장하소서.

 1. 민정(民丁)은 16세부터 60세까지 부역을 맡게 하는데 10정(丁) 이상이면 대호(大戶)로, 5정 이상이면 중호(中戶)로, 4정 이하이면 소호(小戶)로 정(丁) 수를 계산해서 백성의 수를 등록케 하고, 요역(?役)이 있으면 대호에서는 1명의 장정을 나오게 하고, 중호에서는 둘을 합하여 1명의 장정이 나오게 하며, 소호는 셋을 합하여 1명의 장정이 나오게 하여 부역을 고르게 하소서. 그리고 만약 떠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이유를 묻고 더욱 불쌍히 여겨 구휼 을 해 주어 부락을 이루고 모여 살게 하소서.

 1.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래 곤궁한 사람을 진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농사철을 만나 곤궁한 사람에게 먼저 양식과 종자를 주되 줄 때에는 반드시 두량(斗量)으로 하고, 추수 후에는 본래의 수량만 바치게 하소서. 출납하는 수량에 대해서는 해마다 마지막 달에 삼사(三司)에 보고하게 하고, 두량을 하지 않거나 부유한 사람에게도 주는 수령이 있으면 죄를 논하여 벌을 주도록 하소서.

 1. 여러 고을의 향리 중에서 과거에 오르거나 공을 세운 사람 외에, 본조(本朝)의 통정(通政) 이하 향리와 고려 왕조의 봉익(奉翊) 이하 향리는 모두 본역(本役)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1. 수령에게는 때때로 민전(民田)을 조사하게 하고, 가을이 되면 그 손실을 자세히 갖추어 써서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조세를 감면토록 해 주소서.

 1. 각 관역(館驛)마다 마필의 상 · 중 · 하 3등의 수효를 관(館)의 벽에 써붙여 두고 봉명사신으로서 지방에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공역서의 마부(馬符)를 상고해서 증명을 검사한 뒤에 체송(遞送)하게 할 것이나,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를 제외하고는 봉명사신으로 가는 모든 사람에게 함부로 마필을 내주지 못하게 하소서.

태조고황제 - 배극렴 · 조준 등의 시무책 상언(上言)  과 주상(主上)의 수용(受容)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1.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에서는 죄수의 정상을 도관찰사에게 진술 · 보고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토록 하고, 사형죄 이상은 도평의사사에게 보고해서 임금에게 계문하여 명령을 받아 결정하도록 하소서.

 1. 문선왕[孔子]의 석전제와 여러 고을의 성황제는 관찰사와 수령이 제물을 풍성하고 깨끗하게 하여 때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부정한 제사는 일체 금하소서.

 1. 봉명사신 이외에 관역을 빌려 유숙하는 사람에게는 관(館)에서 미곡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며, 봉명사신과 수령이 잔치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또한 때 아닌 사냥을 금지 단속하소서.

 1. 친상을 당하여 상주된 자가 부모의 빈소에 있을 때에는 조석으로 곡하고 제사지내며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1. 각 도와 주에서는 그 노정(路程)을 헤아려 원관(院館)을 짓거나 수리하여 나그네를 편리하게 하소서.

 1. 재인(才人 : 광대)과 화척(禾尺 : 백정)은 농업을 생업으로 삼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떠도는 사람이 있는 주군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그곳에 안착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죄를 주도록 하소서.

 1. 지방의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에서는 양민을 남몰래 데려다가 자기집 사역(私役)꾼으로 삼고 있으니, 바라건대 그런 자들을 찾아내어 엄격하게 등록시켜 부역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1. 중이 되는 사람이 양반의 자제라면 5승포(五升布) 1백필을, 서인(庶人)이라면 1백 50필을, 천인(賤人)이라면 2백필을 바치게 하소서. 소재 관사(官司)에서는 관에 들어온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중의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하게 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은 엄격히 치죄토록 하소서.

 1. 공사(公私)의 전물(錢物) 가운데 자모전(子母錢 : 본전과 변리)은 이식(利息)을 정리하도록 하는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만, 무식한 무리들이 이자에 이자를 붙이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연월(年月)이 아무리 많이 걸리더라도 1전(錢)의 본전에 1전의 이자 이상은 더 받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중들이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리들과 결탁 하여 절을 건축하기도 하고 혹은 불서를 인쇄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관청에까지 물자를 청구하여 백성들에게 폐해가 미치게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그것을 일체 금지 단속하소서.

 1. 바라건대 육지에서 싸울 때 쓸 무기를 수리하고 점검하여 불의에 일어날 변고에 대비하게 하소서.

 1. 시위군(侍衛軍)과 기선군(騎船軍)은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돌아가며 번을 서도록 하소서.

 이상과 같은 22개 조목의 급한 시무책을 주달하자, 태조는 주저 없이 모두 그들이 건의한 바를 따랐다. 이는 개국 초기에 있어 전조의 문란했던 정책을 새롭게 바로잡아 백성에게 혁명에 동참하는 명분과 희망을 줄 수 있는 혁신적인 정책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그래서 그 건의들을 흔쾌히 받아들여 백성과 관리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갖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태조고황제 - 명나라에 국호의 개정신청과 조선(朝鮮)으로의 결정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명나라에 국호의 개정신청과 조선(朝鮮)으로의 결정

 태조 원년 임신 11월 29일 병오, 예문관 학사 한상질(韓尙質)을 중국 남경에 보내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둘 중의 하나로 국호를 고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주문(奏文)은 다음과 같다.

 “배신(陪臣) 조림(趙琳)이 경사에서 예부(禮部)의 자문을 받아왔습니다. 그 자문은 황제의 칙지를 받든 것으로, 그 내용에 `고려가 과연 천도에 순응하고 민심에 합하여 동이의 백성을 편안하게 보호하고 변방에 전쟁할 트집을 만들지 않는다면 사신이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니 참으로 나라의 복이다. 문서가 도착하거든 그날로 즉시 나라 이름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를 빨리 달려와 보고하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에서는 왕씨 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였고, 온 나라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관장하고 있는데, 신은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옵니다. 하온데 지금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허락하시고 이어 국호를 물으시니, 신은 나라 사람들과 함께 감격하여 기쁜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소유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기에 조선 · 화령 등의 칭호를 가지고 황제께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래 임금이 사신을 보내고 싶었으나 그 적임자를 찾느라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한상질이 자청하여 사신으로 가겠다고 하였으므로 태조가 기쁘게 여기고 보냈던 것이었다.
 1393년(태조 2년) 계유 2월 15일에 주문사(奏聞使) 한상질이 중국에서 돌아와 예부의 자문을 전하니, 태조는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예를 행하였다. 자문의 내용은
 
“동이의 국호로는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후사를 영구히 번성케 하라”
는 것이었다. 태조가 감격하고 기뻐서 한상질에게 전지(田地) 50결을 내려 주고 경내에 다음과 같이 교지를 내렸다.

 “지난번에 중추원사 조림을 중국에 보내어 황제에게 주문했더니, `나라를 무슨 칭호로 고쳤는지 속히 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첨서중추원사 한상질을 보내어 국호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왔는데, `본부(本部)의 우시랑 장지(場智) 등이 동이의 국호로서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칭호가 전래한 지가 오 래 되었으니 그 명칭에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 한 조칙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지금 불선(不善)한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경하하겠는가? 이는 종사와 백성에게 무한한 복이다. 중외에 널리 알려서 그들과 함께 혁신하려 하니, 지금부터는 고려라는 국호를 없애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할 것이다. 처음으로 교화를 시행하는 시기에 있어 마땅히 관대한 은전을 보여야 한다. 아! 제왕의 기업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게 되었고 또 이어 국호를 고쳤으니 정사(政事)를 발포하고 인정(仁政)을 시행해서 백성을 걱정하는 정치를 펼쳐야 할 것이다.”

태조고황제 - 명나라에 국호의 개정신청과 조선(朝鮮)으로의 결정 (2)
제 1대조   이름(한글):태조고황제   이름(한자):太祖高皇帝

이처럼 태조는 국호까지 새로 정함으로써 명실공히 역성 혁명을 창업으로 연결, 5백년 조선조의 기업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 놓았다. 태조의 위대한 창업이야말로 천명에 순응한 것이었다. 탁월한 지혜와 출중한 용략, 그리고 불세출의 왕재로서 북호(北胡)의 침입과 왜적의 창궐을 평정하여 고려의 위기를 막고 종사의 안정을 기해 왔었지만 기우는 태양은 어찌할 수 없는 것, 우왕의 망령된 요동정벌 강행이 결국 고려의 국운을 종식시키고 말았다. 기미(幾微)에 밝은 태조의 예지는 위화도 회군이라는 영단(英斷)으로 나타나 삼한(三韓)의 생령(生靈 : 백성)들을 어육(魚肉)에서 구원하였으며, 천명(天命)을 받들어 건국(建國)을 함으로써 5백년 기업의 초석을 단단히 박아 놓고 빛나는 새 역사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재위 7년동안 수많은 기초 작업을 착오없이 실행해 나갔으며, 토지 개혁과 한양 천도와 같은 대역사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택현립공(擇賢立功)의 착오로 인해 왕자간의 알력을 초래함으로써 왕위를 둘째아들 정종(방과)에게 물려 주고 함흥 고향으로 낙향함에 따라 유명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전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불교가 고려를 병들게 하였으므로 배불숭유(排佛崇儒)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국시(國是)로 삼아 해이해졌던 국가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인륜도덕을 바로잡아 놓았는가 하면, 사대교린(事大交?)의 외교로써 국가 안보를 꾀하였고 생민의 안녕과 복리를 도모하였다.

 태조는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태상황으로 있다가 1408년(태종 8) 무자에 승하하였는데 74세의 천수를 누렸다. 능은 건원릉이다. 고려조에서는 출장입상으로 기우는 국운을 붙들어 세우기에 충성을 다하였다. 견줄 바 없는 용맹과 지략으로 북호 · 남왜를 물리쳐 국토와 민생을 수호하였으며, 천명을 받아 혁명 건국을 하여 5백 년 유구한 왕업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아 놓았으므로 생전과 사후에 무궁불멸 숭덕의 복을 누리는 것이라 하겠다.

정종대왕 - 생애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생애

 공민왕이 즉위한 뒤 대륙의 원제국(元帝國)은 점차 허물어져갔고, 고려 역시 계속되는 개혁정치에도 불구하고 원과 연결된 정치세력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 효과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공민왕은 과감하게 원과의 관계를 끊으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의 기황후(奇皇后)와 연결되었던 기철(奇轍) 등의 기씨 일가를 평정함과 동시에 쌍성(雙城 : 영흥부)을 토벌하여 나름대로 국세(國勢)를 떨치기 시작했지만 잇따른 개혁의 실패와 권문세족(權門勢族)의 정치 · 경제 · 사회 등 전반에 걸친 침탈과 탈점, 폭정으로 고려는 점차 왕 조 말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종대왕(이하 정종이라 함)이 태어난 해인 1357년(고려 공민왕 6)은 번영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근근히 유지되어 오던 고려의 400년 왕업이 허물어져 가던 무렵이었다. 또 이 해에는 왜구가 개성에까지 침입하여 흥천사(興天寺)에 있는 충선왕(忠宣王) 및 계국대장공주(줔國大長公主)의 영정을 가져가는 등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한편으로 중외학 교(中外學校)가 수리되고 성균관을 동대문 밖에 옮겨서 신축하였으며 또 대사성(大司成)의 관제를 신설하여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당시 국내외의 정황이 어수선한 틈속에서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후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된 할아버지 리자춘은 동북면 방면의 실력자로 그 가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 휘 자춘(子春)은 그 동안 쌓아온 지위와 명망을 업고 북방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의 아들로서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는 환조가 쌓은 이 같은 배경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무예와 병서, 그리고 경서(經書) 등을 두루 익혔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미 촉망받는 젊은이로 북방의 별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천명(天命)으로 받은 군주(君主)의 운명은 자신의 노력이 없었다면 허사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터인데 태조는 이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태조는 당시 22세였는데 이 때 그는 그의 탁월한 기마(騎馬)와 격구(擊毬) 솜씨 등을 바탕으로 단오절(端午節) 격구경기에서 놀라운 기예를 보여 공민왕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비로소 벼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무인으로서의 기예와 출중한 용병술로 용맹을 떨치게 된다. 이 해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기거하던 그의 부인 한씨(韓氏)는 둘째 아이를 잉태하였다. 태조의 출사(出仕)와 아기의 잉태라는 겹경사는 집안 사람들 뿐만아니라 인근의 사람들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1357년(고려 공민왕 6) 6월을 지나면서 한씨는 만삭의 몸으로 항상 만사에 신중하고 몸가짐을 삼갔다. 그리고 7월 초하룻날 한씨는 마침내 고성을 울리는 아기씨를 순산하게 되었으니, 이 아기가 바로 훗날 태조를 옆에서 수행하면서 왜구를 물리치고,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 태조의 2남 방과(芳果)인 것이다. 왕위에 오른 뒤 그는 휘를 `경(툏)\'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광원(光遠)이라 하였다.  
정종대왕 - 생애(2)
제 2대조   이름(한글):정종대왕   이름(한자):定宗大王

이렇게 무인의 가문에서 성장한 정종은 자라면서 태조를 옆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형인 방우(芳雨)가 당시 권신(權臣)인 지윤(池奫)의 딸과 혼인을 한 뒤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데 반해 정종은 오히려 태조를 따라 왜구의 침략을 막았으며, 또 조정에 들어와서도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장남인 방우가 지윤의 몰락과 함께 그 출사의 길이 막히게 된 뒤 차남인 방과의 역할은 더욱 커지게 되었으며, 그의 이러한 모습은 다른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정종은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약관의 나이를 넘긴 21세가 되던 1377년(우왕 3) 5월에 태조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즈음에 정종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김천서(金天瑞)의 딸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량하면서도 남편의 일에 대해 내조를 잘하는 부인에 대해 정종은 더할 수 없이 기뻤으며, 전장(戰場)에 나가더라도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훗날 정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안왕후(定安王后)에 봉해진 분이나 안타깝게도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당시의 권력관계에서 정비(正妃)로서 아들을 두지 못했다는 것은 국정의 혼란을 예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종은 태조를 보좌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그 관품도 뛰어올라 점차 권력의 핵심에 접근해 갔다. 물론 여기에 태조의 존재가 그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일 것이지만 정종 자신이 그 만큼 여론으로부터 호평을 얻었던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종이 입지(立志)의 나이인 서른이 지나면서 고려의 조정은 지윤 · 임견미(林堅味) · 염흥방(廉興邦) ·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조정을 농단하면서 당여(黨與)를 만들거나 뇌물을 수뢰하거나, 다른 이의 전장(田莊)을 강탈하거나 혹은 관직의 수여를 마음대로 하였다. 이 때 우왕은 이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당시 태조는 수문하시중의 지위에 있었 다. 우왕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를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도록 한다. 일대 정치판도를 바꾸었다. 당시의 이 사건으로 이인임 등은 완전히 실각되었고 염흥방 · 임견미 등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찌보면 조선의 건국은 우왕 14년 정월에 벌어진 이 옥사사건(獄事事件)으로 잉태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해 5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우왕과 최영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니, 앞서의 정계개편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1389년(고려 창왕 원년) 7월에는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정종은 절제사(節制使) 류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海州)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창왕 원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해이다. 태조는 우왕을 폐위한 뒤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면서 개혁정치를 외치던 이색(李穡) 등과 정치적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갈등은 사전개혁(私田改革)에 비롯되었다. 이색 등은 사전의 개혁에 대해 미온적이었고, 태조와 정도전 등은 공전화(公田化)할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여주(驪州)에 안치되어 있던 우왕이 궁궐과 연락하여 다시금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왕은 다시 강릉부(江陵府) 로 옮겨졌고 창왕은 폐하여져 강화에 안치된 것이다.

 이 때 정종은 1390년(고려 공양왕 1) 정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 여절 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또 같은 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