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3)
제 27대조 이름(한글):순종효황제 이름(한자):純宗孝皇帝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건강하여 만인의 칭송을 받던, 비단 우리 나라 사람뿐 아니라 청나라 사신조차 풍채가 좋고 매우 수려하다고 경탄할 정도의 남다른 용모를 갖추었던 그가 일본인들에게 꼭두각시 황제로 지목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1898년에 일어난 이른바 김홍륙의 독다사건(?茶事件)에 기인한다. 당시 고종은 비대해진 친러파 세력의 김홍륙을 견제하던 중에, 그를 수뢰죄로서 흑산도 유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처음 맞이하는 만수절(萬壽節)이 되었고 축하행사 중 황제와 황태자, 신하들이 마시는 커피가 내어져 왔다. 이전에 이미 어머니에게 커피 마시는 법을 배워 커피를 즐겼던 황태자는 이날 역시 커피를 즐거이 마셨다. 그러나 그 커피 안에는 김홍륙이 흑산도로 귀양을 떠나면서 황제를 음해하기 위해 서양 요리 숙수 공홍식 등에게 사주한 다량의 아편 독이 들어 있었고 이를 마신 황태자는 정상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상태의 황태자를 황제위에 올리면 훨씬 쉽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고종의 퇴위를 강력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목표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는 달성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은 1907년 7월 목적 달성을 위해 여러 가지 범죄행위들을 저질렀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통감 이토가 본국 정부로부터 받은 7월 12일자에 대한 처리 방침은 황제의 양위와 통감에 의한 섭정체제로의 확립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통감이 두 가지 안건 중 황제의 양위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하였다. 양위요구의 사유로 내건 것은 고종의 해아밀사 파견이 그 이전에 체결한 을사조약의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퇴위 강요과정에서 통감은 시종 내각을 앞세워 통감부는 이와 무관한 것처럼 가장하였다. 이는 통감부가 나서면 내정간섭이란 불쾌한 인상과 함께 증거를 남기게 될 것을 우려한 이유에서였다. 통감으로부터 양위 건의의 임무를 부여받은 대한제국 내각은 연일 계속된 회의를 벌였고, 7월 16일에서야 고종에게 양위의 주청을 처음으로 알렸다. 그러나 이 양위요구 내부에 일본의 간악한 의도(침략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황태자를 이용)가 있음을 누구보다고 잘 알고 있었던 고종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 후 계속된 양위 요구와 일본 외상 하야시의 협박에 고종은 7월 19일 황태자 대리정을 알리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대리의 형식으로 물러나는 고종이 언제든지 다시 친정에 나설 수 있는 것이 한국 전선(傳禪)의 전통임을 알게 되자 내각으로 하여금 진짜 양위를 고종으로부터 받아내도록 강요하였고, 이에 내각 대신들은 19일 낮부터 진정한 양위를 표시하도록 요구하였다. 황제측에서 조칙을 수정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자, 내각과 통감부는 형식면에서 양위를 기정사실화 하는 작전을 세웠다. 19일 밤 태묘(종묘)에 칙사를 보내고 20일 아침 7시에 중화전에서 양위식으로 권정례(權停禮)를 거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흉계에 조정 신하로서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의 반발이 있었다. 박영효는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군으로 중심이었지만 민비 시해사건에 연루된 이 후 오랫동안 귀국하지 못하다가, 1907년 6월 11일자로 고종에 의해 석방되어 곧 궁내부 대신에 위임되었다. 이는 비록 과거에 박영효가 친일적 경향이 있긴 하였지만, 마지막 남은 종척 출신으로 황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고종의 믿음감에서 내려진 조처였다. 이런 고종의 기대에 박영효는 충실하였다. 궁내부 대신은 권정례 의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는데, 이날 박영효는 병을 칭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식의 주인공인 고종과 순종이 모두 불참함으로써 사실상 권정례는 진행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통감부와 내각측은 식을 늦출 수 없다는 판단아래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궁내부 대신 서리를 겸하도록 하고, 고종와 순종의 역할은 내관 2인이 대역하는 것으로 하여 식을 강행하였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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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권정례에 박영효 등 양위에 반대하던 몇몇 뜻있는 인사들은 21일 어전에서 내각측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22일 새벽 1시경 상황은 역전되어 시위대가 거사를 음모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퇴궐하던 박영효와 내대신 겸 시종원경 이도재 등을 기습적으로 체포함으로써 양위를 강력히 반대하던 세력이 일시에 타진되었다. 이날 낮, 내각 대신들은 태황제 존봉을 지시하는 조칙에서 황태자에게 대리라는 칭호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통감부와 이들의 사주를 받은 내각의 고종황제 퇴위작전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황제 교체작전이 국새, 어새 등의 보인들을 미리 확보해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칙은 황제의 승인 아래 내대신이 관리하는 어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의 입인(押印 : 수결인)으로 반포 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통감부 · 내각측이 21일 태황제 존봉을 지시하는 조칙을 만들 때 이미 보인을 관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황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이 이 일을 감행한 것은 황제가 가지고 있어야 할 어새를 그들이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면 22일 새벽에 일본군에 의해서 궁내부 대신과 내대신이 함께 강제로 체포 된 사건은 어새 탈취가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어새가 이 때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감으로써 이 후 수개월 안에 빚어지는 순종황제 서명 위조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위의 태황제 존봉의 조칙 역시 21일에 문안을 준비한 다음 22일 새벽 어새를 탈취한 직후에 압인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감부 · 내각의 황제 교체 기정 사실화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7월 22일을 교체일로 잡고 24일에 한일협약(정미조약)을 통과시키고 7월 31일에 역시 위조된 조칙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다음 8월 2일에 연호를 융희로 정하고(3일부터 사용), 태황제의 궁호를 덕수, 부호를 승녕으로 정하였다. 또 7월 24일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두 황제의 격리 문제도 8월 14일에 일단 확정을 보았다. 이 격리문제는 고종의 영향력에서 순종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목표 달성을 좀더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작 순종의 즉위식은 8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러면 이렇게 일본의 음모로 황제에 오르게 된 황태자(순종)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앞에서 그는 1897년 김홍륙의 독다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장애 상태를 겪고 있는 상태로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행동화 시키기가 어려웠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의 의도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그는 주권유지의 강력한 의지를 가진 부황의 진정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황제로 행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순종의 다음과 같은 행동에서 엿 볼 수 있다. 고종은 1907년 11월 15일, 양위한 후 처음으로, 태묘와 영녕전을 참배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강제 양위한 현실을 더 이상 거부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양위를 열성 신위에 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돌아오는 길에 창덕궁에 들른 것도 황태자에게 정식으로 제위에 오르는 절차를 밟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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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있은 3일 후, 11월 18일 순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처음으로 태묘를 참배하여 조종의 여러 신위, 사직의 신령들에게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서고문(誓告文)을 올렸다. 그리고 즉위에 따른 대사면 조치와 앞으로의 정사를 전망하는 국시 · 응행육조목 등을 밝히는 조칙을 내렸다. 따라서 순종의 황제위는 11월 18일자로 정식 유효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본정부와 통감부가 이 순간조차도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필제위조를 악용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왕이 태묘(종묘)를 참배할 때 읽는 서고문에는 왕 자신이 직접 이름을 써 넣는 자리가 있다. 순종 역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써 넣었는데, 순종의 이름자가 친필로 서명된 이 서고문을 통해 순종의 필체를 알게 된 통감부는 이 후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여러 법령 제정 등에 이것을 위조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통감부가 이 무렵 대한제국의 공문서 서식을 일본식 공문서 서식으로 바꾼데 있다. 그들은 고종이 을사조약의 법적 결함을 잡아 저항하자 각종 법령 및 조약 등에 관한 공문서 처리제도의 장악이 국권침탈의 절대적인 요건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1907년 7월 보호권의 확충이라는 구실 아래 고종황제 강제 양위를 실현시키는 한편 내정권 침탈공작차원에서 국새, 옥새 등의 보인을 탈취하고, 한편으로는 문서상의 합법적인 처리를 위해 공문서 결재제도를 바꾸는 공작을 벌인 것이다.
본래 대한제국의 문서결재는 황제의 재가시 국새, 어새의 날인과 함께 수결인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7년 10월 통감부가 통감관방 문서과의 기능을 대폭 강화한 직후인 11월에는 황제가 친필로 이름자를 서명하는 일본식 공문서 제도가 도입되었다.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정부조직을 통감부 산하로 집어 넣으면서 공문서 형식 역시 일본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황제 친서제도는 마치 모든 일이 황제의 지휘 아래 직접 이루어지는 인상을 주나, 정미조약 이후 통감의 섭정체제하에 있는 대한제국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사후 형식적인 서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본식으로 대한제국 공문이 황제가 이름자를 서명하고 어새를 찍는 것은 1907년 11월 18일 조칙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 후 만 2개월간 약 60건의 법령이 황제 모르게 제정되었다. 이는 통감부로 넘어온 문서가 통감의 승인만을 받은 후(여기서 해당 법령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지만), 해당 문서를 내각이 순종에게 올려 어명의 친서 결재를 받는 과정에서, 최종 단계를 생략함과 동시에 황제의 서명을 위조했기 때문이다.
11월 18일 이후 2개월간 처리된 60개 법령에 가해진 순종의 이름자 척(拓)의 서명상태는, 육안으로도 5∼6명의 필체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목적아래 필체 수(5∼6)만큼의 사람에 의해 서명위조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법령들은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통감부가 한국의 내정권 장악을 위해 필요시 되는 대한제국 정부 조직법 개편, 재판소제도에 관한 법, 잡세(상공업세) 처리권에 관한 법, 대한제국 황실 소유 재산 처분에 관한 것 등으로 어느것 하나 대한제국 국권과 관련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순종 재위 초기에는 이렇듯 중요한 법령제정이 순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이 위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이 달성된 후에야 비로소 결재권자인 황제에게 직접 서명을 받는 상태로 돌아갔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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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가 피침략 대상국의 국새 또는 어새를 탈취해 중요 공문서에 마음대로 사용하고, 법령의 발령자인 황제의 서명을 위조한 사실은 법령 자체의 효력 상실은 물론 범죄행위이므로 지탄 받아야 할 것이다.
고종 황제의 양위 직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시위 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특히 격분한 민중은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각처에서 일본인을 저격했으며,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 찬성한 을사오적의 집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무력으로 이를 진압한 일본은 더욱 가혹한 속박을 가해 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순종 즉위 직후 이등박문은 순종을 위협하여 한일신협약(일명 정미7조약)을 맺었다. 1907년 7월의 정미조약은 2년전의 을사조약과는 달리 `한일협약\', `일한협약\'이라는 공식 명칭을 머리에 붙인 것으로 통감부 통감이 한국의 내정권에 섭정으로 관여하는 체제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을사조약\'에 버금가는 비중을 가졌다. 그 내용은 “조선은 시정 개선에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법령 제정과 중요 행정처분은 통감의 사전 승인을 받는다. 고등관리 임명이나 외국인의 고문임명도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통감이 추천하는 다수의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관리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통감은 한국 최고의 통치자로서 행정, 사법 일체를 감독하게 되었고, 한국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가지게 되었다. 또한 각부의 차관 이하 고위직에 다수의 일본인 관리가 임명되어, 일본인이 정치 실권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정치를 마음대로 운영하는 차관 정치가 시작되었다. 더욱이 2조의 한국정부에서 제정하는 모든 법령은 황제가 재가하기 전에 통감의 승인을 미리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앞에서 설명한 황제 서명 위조사건과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해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해산이 이루어졌는데 해산에 관한 조칙도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서 불법적으로 작성되었다. 군대해산은 일본이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과 한국의 내정권 장악을 보다 손쉽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다. 통감부는 비밀리에 계획한 위조된 해산조칙을 7월 31일에 내리고, 8월 1일 군대해산식을 가졌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방위력마저 공식적으로 없어져 버렸다.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되자 서울에 주둔해 있던 시위대 소속 제 1대대장 박성환은 자결하면서, 나머지 동지들에게 조국독립을 위해 끝까지 항일 투쟁을 할 것을 당부했다. 이를 계기로 제 2대대까지 일어나 일본 군대와 시가전을 전개해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나 병사로나 무기 보유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 우리 군인들은 일본의 강력한 진압책에 눌려 지방으로 흩어졌다. 이 후 해산된 군인들은 대부분 의병에 가담하게 되어 이 때부터 의병의 규모와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일본의 식민화정책을 찬양한 미국인 스티븐스가 장인환과 전명운에 의해 저격되었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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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속 심화되고 있는 한국민의 저항을 1906년 1월말부터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는 침략현장의 총책으로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한국민의 정치적 구심이던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장본인으로서 그는 한국민의 날로 거세어지는 저항을 완화시킬 방도에 대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토는 1909년 1∼2월에 순종의 대구, 부산, 평양, 의주 등지의 순행을 주선하였다. 이는 황제의 순행을 통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순행을 알리는 조칙문이 내려졌다.
“…짐이 생각컨대 민은 나라의 근본으로 근본이 튼튼치 않으면 나라는 편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근심하여 분발하고 확실하게 자단하여 이번 신년으로 먼저 유사(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몸소 국내를 돌아 지방의 형편을 두루 살피고 적자(赤子)의 고통을 물어보려고 할새 짐의 태자태사통감공작(太子太師統監公爵)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짐의 나라를 정성을 다해 몸을 보도(輔導)하고 지난 여름 한참 더운 때에 나의 동궁의 학식을 넓히기 위하여 그 노령의 병구(病軀)를 아끼지 않고 일본국 각지에 배순(陪巡)한 노고는 짐이 늘 감사하는 바이라 지금 짐의 이 행차에 특별히 배호를 명하여 짐의 지방 급무를 애써 도와 근본을 튼튼히 하고 나라를 편안케 하여 어려운 국면을 속히 구제하려고 애쓰니 너희들 대소 신민은 모두 반드시 이를 알도록 하라.” [융희 3년 1월 4일]
이 조칙이 통감부가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순종의 순행을 주선하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은 그 내용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조칙은 통감 이토의 공적으로 저들이 표방한 시정 개선 성과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번의 순행에 그를 대동하게 한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토는 자신이 추진해 온 정책들에 한국민의 소요가 날로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여 황제를 지방 순행에 동원하여 건재함을 보여주면서 황제에 의해서 통감부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행결과는 오히려 황제가 일본인들에게 둘러싸여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고, 서북 순행 중에는 일장기 거부 사건이 일어나는 등 계속적인 민의 의병활동이 진행되었다. 통감 이토는 순행이 끝나자마자 2월 중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6월에 그의 사임이 처리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통감부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한국민의 저항때문이었다. 이 후 이등박문은 같은 해 10월 러시아 대표와 만주문제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갔다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당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 정계의 거물들을 암살하려는 우국지사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고, 이런 한국민의 저항에 대해 일본이 택할 수 있는 대안은 강경론으로서의 병합밖에 남지 않았다. 이토의 사임에 뒤이어 일본정부의 대한정책은 대폭적으로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토가 견제해 온 병합의 강경론이 우세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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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병합론은 1907년 7월 해아밀사 사건에 대한 응징을 강구할 때 이미 대두하였으나 이 때는 통감 이등박문이 고종황제를 강제로 양위시키는 정책의 성공으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이 후 한국민의 항일투쟁전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이토의 이른바 이토의 자치육성정책이 여러가지 한계를 드러내면서 재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이토의 통감직 사임과 때를 같이 하였다. 1909년 6월에 이토가 사임한 후, 7월 6일에 일본 정부 각의는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확정지었다. 이 결정에서 적당한 시기가 올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방침이 제시되었다. 1909년 후반 일본은 러시아에 접근하여 만주에서의 철도운영권 확보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였다. 양국의 유대는 1910년 1월 하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제시한 만주철도 중립화 안을 다 같이 거부할 정도로 성숙되어 갔다. 일본은 이러한 새로운 국제적 상황을 한국병합을 실현할 적당한 시기로 간주하고 같은 해 2월 말부터 열국으로부터 승인을 얻기 위한 접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민의 저항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져 병합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한반도 장악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일본은 국제적 상황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5월 일본의 육군대신 사내정의(데라우치 아사다케)는 통감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2개 사단의 군대를 한국에 배치하고, 한국 주재 일본 헌병대를 새로 편성하여 경찰 임무를 담당시켰다 (이를 헌병 경찰 제도라 한다). 일본인 헌병 2만 2천명과 한국인 헌병 보조원을 채용하여,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 경찰권을 통감 밑에 두고, 직접 지휘해 강력한 헌병의 권한으로 항일 의거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황성신문>, <대한민보>,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기관을 폐쇄, 정간시켰다. 통감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일한병합 추진이 그것이다.
일한병합은 8월 22일 조약에 서명된 것이 29일자로 공포되었다. 병합의 내용은 한국 황제가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제1조)한다는 것과, 일본국 황제는 이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정미조약으로 내정권을 박탈한 다음 마지막 과정으로 병합에 이른 것이다. 이제는 병합조약이 진행된 과정과 그 절차, 특히 마지막 공포 단계의 칙유가 날조된 사실을 중심으로 이 조약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병합조약이 체결된 경위에 대한 파악은 통감부에서 간행한 <한국병합전말서>에서 밝혀진 내용에 의존하여 왔다. 이에 반해 조선 총독부 총독 사내정의의 <한국병합시말>은 조약 진행에 있어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일방성, 강제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일방적 진행에 대해 대한제국측의 적극적인 반대가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학부대신 이용식의 반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주무대신이 아닐 뿐더러 그의 반발은 내각 밖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뜻인데 이 보고서는 황제도 22일의 어전회의에서 대세가 이미 정해진 이상 속히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의사표시를 한 후 조약 대표 위임장에도 순순히 서명하고 국새를 찍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색뿐인 황제라 하더라도 조선왕조 500년의 사직을 내놓는 큰 일 앞에 이 기록이 남긴 것처럼 순순히 응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는 시종원경 윤덕영이 나라를 내주는 조칙을 만들어 황제에게 어새를 찍을 것을 요청하자 황제가 흐느끼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자, 황제가 침실로 들어간 틈에 몰래 찍어 이완용에게 건네주었다는 내용을 적고 있으나 이는 소문에 근거한 것이므로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황제가 일본측의 요구에 쉬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진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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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합방조약의 부당성에 관한 비판적인 인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을사조약이 무효이므로 이에 근거한 병합조약도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이를 더욱 구체화 시켜 통감은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闕下)에서 외교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는 직책이므로 이에 의하면 한국의 외교권 행사의 대표가 되어야 할 이 직책이 일본을 대표하여 조약에 기명조인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 직임이 정미조약을 통해서는 한국내정에 섭정의 역할까지 겸한 상태이기에 더욱 일본을 대표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 통감이 한국의 외교와 내정을 모두 총괄하는 직임이기에 한국 내각의 총리대신과는 실질적으로 상하관계를 이루고 있어 그런 두 직임이 서로 다른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조약에 각국의 대표로 기명 · 조인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등이다. 위와 같은 병합조약의 형식상 문제점과 더불어 황제가 조약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시하였다는 증거가 확보되었다. 순종이 8월 22일 1시에 열기로 한 어전회의에 2시가 다 되어서야 임어하였다는 사실은 황제가 이 조약 체결에 대해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때 서명한 전권위원 위임장의 친필 서명이 떨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흔적은 법적 결함을 따지는 데에는 증거가 되기 어렵다. 보다 명확하게 일한병합의 법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위임장이나 조약문이 아니라 그것에 후속된 병합을 알리는 황제의 조칙이다.
일본인들은 최종적으로 나라를 병합하는 조약에서만은 모든 형식을 제대로 갖추어 놓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이전의 어느 협정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권위원 임명장과, 전권위원들이 서명날인한 조약문, 조약문을 조칙과 함께 공포하기로 한 두 전권위원들의 각서, 병합을 알리는 한국황제의 조칙 등의 문건들을 모두 갖추었다. 한편으로 사내는 일본인 부하들을 시켜 한국측 내각대신들, 궁내부 대신, 시종원경 등 황제의 근시직 등에게 사전통고를 하면서 무언의 압박을 가해 소요없는 완벽한 합의적 조약을 만들고자 하였다.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그들은 전권위원 위임장에 황제가 직접 서명하고 국새를 날인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1907년 7월 통감부가 탈취한 대한제국의 국새와 어새 중에서 국새는 순종이 정식으로 즉위한 무렵에 돌려지고, 일반 재가용인 어새는 정미조약 2조의 규정의 실천을 구실로 통감부가 계속 관장하고 있었음). 이완용은 이를 받아 조약문에 대한 설명을 마친 다음 통감 관저로 가서 사내정의와 함께 조약문에 기명 날인함으로써 일한병합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일한병합시 준비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전권위원 위임장은 어디까지나 위임장이기에 그들(전권위원)이 서명 날인한 조약문은 다시 양국 황제의 재가 승인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조약은 공포와 동시에 쌍방 중 한나라가 없어지므로 한국측 국가원수의 비준 절차를 거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두 전권위원은 조약문 서명날인과 동시에 비준의 효과를 기한 공포의 방법을 양국 황제의 조칙으로 할 것을 각서로 약속하였다. 이에 관한 모든 준비는 공포일을 이틀 앞둔 8월 27일에 끝났다. 그런데 이렇게 최종 승인 절차로 택해진 조칙들 중 한국 황제측의 조칙에 결정적인 결함이 발견되었다. 한국황제의 조칙 그 자체가 통감부에 의해 미리 준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조칙에 반드시 있어야 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빠진 채, 어새만이 덩그라니 찍혀 있는 것이다.
순종효황제 - 생애 와 시대상 (10)
제 27대조 이름(한글):순종효황제 이름(한자):純宗孝皇帝
병합을 알리는 조칙이라면 그 승인 형식은 전권위임장과 마찬가지로 국새가 찍히는 문서로 택해졌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칙으로 택해진 이상 어새를 찍을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어새의 날인 위에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반드시 있어야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정미조약 이 후 그들이 도입한 공문서법이었다. 1907년 11월 18일 이 후 조칙 13건과 법령 368건의 재가에 모두 이름자 서명이 있는데 유독 이 마지막 조칙에만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는 것은 결국 비준의 효과를 기한 이 조칙을 황제에게 직접 보이지 않았거나 보였어도 황제가 서명을 거부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조칙 날조 행위에 해당하며, 후자가 사실이라면 황제가 병합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다는 말이 된다. 이 두가지 모두는 어느 쪽이든 조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 동안 일본이 이 조약에 대해 보여왔던 용의주도성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황제의 재가를 고려하지 않았다기 보다 재가를 품청하였으나 순종이 서명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결정적 결함이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본측이 한국황제의 조칙 문안을 총리검열까지 끝내고 완성한 시기는 공포일을 이틀 앞둔 8월 27일이었다. 이 때 이미 일본정부는 병합의 공포일을 미국, 영국 정부에 통고해 둔 상태였다. 완성된 조칙은 순종에게 재가가 품청되었으나, 황제가 계속 서명을 거부함으로서 통감부가 시한에 쫓긴 끝에 가지고 있던 어새만 찍어 내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어새 역시 고종황제 강제 양위 때 통감부가 빼앗아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니 그 날인만으로는 재가를 거쳤다고 볼 수 없다.
병합조약 역시 강요된 것이었기에 그 강제와 허위를 완전히 위장할 수 없었다.
한일병합으로 조선은 5백년의 막을 내렸다. 이 후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이왕(李王)으로 불려졌다. 폐위된 후 16년간 살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계기로 일반시민과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 · 10만세 운동은 민족 · 사회 양사상이 힘을 합한 항일 운동이으나 서울과 지방의 학생간에 사전 충분한 조직적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의민황태자(영왕)
제 28대조 이름(한글):의민황태자(영왕) 이름(한자):懿愍皇太子(英王)
의민황태자(영왕, 懿愍皇太子)는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로 1897년 10월 20일 엄귀비(嚴貴妃) 몸에서 탄생하였다. 의민황태자의 이름은 은(垠). 1900년 영왕(英王)으로 책봉되고 해이그밀사사건 직후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고 이어 8월 7일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敦德殿)에서 황태자 책봉식을 가졌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이토(伊藤博文)에 이끌려 10세 나이로 1907년 12월 5일 신교육 이수를 위한 일본 유학의 명분이나 인질로 일본에 가 그곳에서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딸 마사코(한국명 方子)와 1920년 4월 혼인하였다. 일본에 강제체류하는 동안 일본육사에 입학하게 된다. 이어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국의 어머니 엄귀비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였다. 1911년 7월 18일 사후에야 귀국, 모자상봉을 하게된다. 일본황실의 예우의 명목으로 영친왕(英親王)으로 칭호를 하였다. 황태자는 1922년 5월 4일, 1938년 4월 23일, 1943년 7월 1일 세차례 황태자비와 함께 진명학교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1963년 11월 23일 인질생활 56년만에 정식으로 환국, 황태자비와 동행하였다. 그러나 귀국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하여 실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황태자는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봉사의 뜻을 펴고자 태자비와 함께 1966년 심신장애자재활원 자행회(慈行會), 1967년에는 신체장애자훈련원 명휘원(明暉園)을 설립 하였다. 사후에 태자비에 의하여 1971년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 자혜학교(慈惠學校), 1982년 신체장애아 교육시설 명혜학교(明惠學校)를 설립, 황태자의 사회봉사정신은 계승되었다. 태자비와의 사이에서 진(晉),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은 성장하니 곧
황태손(皇太孫) 구이다. 유택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내에 영원(英園) 이다. 1989년 4월 30일 태자비전하가 작고하자 합장하였다.
황태손 구(玖)는 아버지 의민황태자와 어머니 태자비 사이에서 1931년 12월 29일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왕공귀족학교(王公貴族學校) 학습원 중등과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1950년 8월 학습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어 맥아더 사령부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캔터키주 센터칼레지고등학교에 편입하고, 1956년 5월 보스톤 메사추세츠 MIT 공대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여인과 혼인하였다가 이혼했다. 슬하엔 자녀가 없다. 15년은 일본에서, 15년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1963년 11월 12일 국적을 회복하여 일시귀국,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건축설계학을 강의하였다. 1966년에서 1978년까지는 트란스아시아사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에는 본원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71년 5월에는 사단법인 영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96년 11월 25일에는 영구 환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