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의 왕권의 확립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 놓음으로써 더욱 확고해 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왕실의 정통을 세우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즉 왕실의 정통성의 범주를 태종 자신의 혈족으로만 정하고 여기에 적계 · 서계의 구분을 엄중히 하였다. 적계 왕자는 대군으로, 서계 왕자는 군으로만 봉하였다. 또한 종친이나 왕실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이와함께 1409년(태종 9) 9월 9일에는 외척으로 인하여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자 공신이 아니고 중궁의 부친을 제외하고는 외척은 봉군(封君)하지 말라고 명하며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 12월 18일에는 원경왕후의 가족인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를 각각 여원군(驪原君), 여산군(驪山君)으로 삼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태종이 특별배려한 것으로 외척이 관직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봉군한 것으로 보인다.
1412년 5월 26일에는 종실의 작질(爵秩)이 이미 등차가 있는데에 따라 그 동서반(東西班)의 차서도 또한 정하였는데, 종실의 위판(位版)을 모두 서쪽에 베풀어 위차는 마땅히 본품의 앞에 있고 위차를 달리하여 한 줄로 하였다. 대군은 서쪽에 있어, 동쪽 세자 위차 뒤 두 줄에 당하고, 만일 대궐 뜰이 좁으면 4품이하는 정(正) · 종(從)을 한 줄로 하게 하였다. 또 한 적자(嫡子) · 서자(庶子)를 봉작하는 법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선원록(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非太祖系)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다. 왕실 및 종실, 외척에 이르기까지의 구성범주를 확정하여 왕실의 정통을 분명히 하였다.
왕실과 외척, 공신들에 대한 통제와 정리를 마친 뒤 1414년에는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킴으로 해서 태종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臣權)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최고관직체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직의 비대함을 줄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것이 바로 도평의사사 · 중추원의 해체와 의정부(議政府)의 신설이다.
건국초기에 도평의사사 체제는 공신과 재추(宰樞)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어 왕권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공론을 광범하게 수렴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도평의사사에 참여하는 재상의 수가 많다는 것을 용관(冗官)을 없애자는 지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1400년 당시 문하부와 중추원의 재상 수가 40명을 넘어서 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도평의사사 중심으로 되어있는 관제를 혁파할 것이 요구되었다. 정종 2년 4월의 사병혁파와 관제의 개혁은 바로 이들에 대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개혁의 골자는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대신 의정부를 신설하며, 나아가 중추원의 기능을 분산 · 해체시키려는 것이었다. 도평의사사는 물론이거니와 군사에 관한 모든 권한과 아울러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지의 기능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중추원도 해체시켜 버렸다.
즉 중추원을 삼군부로 개칭하고 권한도 삼군에 관한 사항에만 국한시켰으며, 삼군부를 장악한 인사들이 의정부에 임명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그리고 중추원에 소속된 승지들의 권한을 승정원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 독립시켰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지 거의 3년이 지나서야 도평의사사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이 현실화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공신 재추들의 합좌에 의한 도평의사사 정치를 극복하는데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개혁의 근본적인 요지는 이와 동시에 이루어진 사병혁파와 그에 이은 군통수권 재확립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이었다.
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3)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도평의사사 체제를 계승한 의정부의 기능은 국정의결기관의 기능과 문하부의 백관의 서무를 관장하는 포괄적인 기능을 맡는 것이다. 의정부는 위의 기능과 주관(周官)에서의 삼공(三公)의 직장(職掌)인 논도경방(論道經邦) · 섭리음양(燮理陰陽)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리(經理)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정종 2년인 1400년 4월에 처음으로 의정부의 이름이 거론된 후, 이듬해인 태종 원년 7월과, 4년의 두 차례의 정비를 거쳐 의정부 · 육조(六曹) 중심의 새 왕조의 통치제도는 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1414년 4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면서 마침내 국사를 총괄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즉 태종 원년 7월 13일에 하륜의 건의를 바탕으로 관제를 개혁한 것이다.
여기서는 문하부를 혁파하고 그 기능의 일부를 의정부에 이관하며, 문하부의 낭사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독립시키는 한편, 재정을 맡았던 삼사(三司)를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의흥삼군부를 승추부(承樞府)로 개편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태종 원년의 관제개혁은 의정부가 서정(庶政)을 총괄하는 재부로서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데 초점이 모아지기는 했지만 실상 서정 총괄의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따라서 태종 4년에는 의정부는 정책의결권만을 가지고 행정적인 서무는 육조(六曹)로 넘겨 모든 행정체계는 육조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태종 4년에 확정을 본 의정부 · 육조 중심의 정치체제는 그 짜임새로 보아 <주례(周禮)> 총재와 주관육익(周官六翼)의 이상을 그대로 구현시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 5년 정월에 다시 한차례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초에는 전조의 구제를 따라 의정부로 하여금 각사(各司)를 총괄하게 하고, 사평부(司平府)는 전곡을, 승추부는 갑병(甲兵)을, 그리고 상서사(尙瑞司)는 인사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좌우정승으로 하여금 육조의 판서를 겸하게하여 육조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평부를 혁파하고 그 기능을 호조에 일임하고, 승추부의 권한은 병조에 맡겼다. 그리고 동서반의 인사권은 이조와 병조에 일임하였다. 의정부의 서무를 나누어서 모두 육조로 귀속시킨 것이다.”
[<태종실록>권9 5년 정월 임자(15)]
여기서 개혁의 초점은 의정부 즉 사평부 · 승추부 · 상서사가 장악하고 있던 행정업무를 모두 육조로 이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정부 즉 대신들에 집중되었던 권력이 분산되어 이들의 권한이 약화되게 되었으며, 이것은 왕권이 전보다 더 강력하게 행사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몇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통해 태종은 일단 권력의 분산과 기능별 업무 분화라는 측면에서 일정정도의 성과를 거두긴 하였지만 의정부와 육조의 관계가 분명치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4)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 8년 정월 초3일에 좌정승 성석린(成石璘) 등이 상언한 바에 따라 제도개혁이 이루어진다.
“대저 재상의 직책은 인주(人主)를 보필 협조하고 중요한 사무를 운행 알선하니, 백관에 비교하면 지위가 높고 책임이 중하여 천하의 일을 총할(總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겸하는 것이 많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고, 작은 일에 자세하게 하려면 큰 일에 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형세의 필연한 것입니다. 지금의 육부상서가 열부(列部)를 나누어 관령(管領)하니, 위탁하고 선임한 것이 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성중(省中)의 사무를 경하고 중한 것을 종류별로 나누어, 전부터 조례(條例)가 있고 일이 큰 것이 아닌 것은 아울러 육부장관에게 위임하여, 응당 주상할 것은 주상하고 응당 행하 (行下)할 것은 행하하고, 혹시 조관(條貫)을 고치거나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되어 육부에서 전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곧 도성(都省)에 신정(申呈)하고, 만일 육부상서의 판단이 부당하거나 지체되어 판결하지 못하는 것은 따로 관계되지 않는 관원에게 위촉하여 시비를 결정 하소서. ( 중략 ) 이제부터 범사가 전례가 있는 것은 모두 각조에 맡기도록 하고, 각조에서 별례(別例)가 있은 연후에 본부에 정보(呈報)하면, 본부에서 경중을 참작하여 계문할 것은 계문하고, 행이할 것은 행이하며, 각조에서 한 것이 만일 착오와 정체된 것이 있으면, 본부에서 근만을 고찰하여 시비를 결정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유지 되고, 번잡하고 간단한 것이 서로 이루어져서 재상은 세무(稅務)에 시달리지 않고 서관은 직무를 폐하는 데에 이르지 아니하여, 강목이 거행되고 베풀어져서 치도가 거의 체통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태종실록>권15 8년 정월 임자(3)]
이로 인하여 의정부의 실질적인 권한은 축소되고 육조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의정부는 육조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여 서로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개혁으로 비록 의정부가 행정실무에 대한 권한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육조의 상급기관으로서 육조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장악할 수도 있었고 이로인해 정부의 권력이 의정부 대신들에게 집중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왕권의 강화를 표방하고 있는 태종에게 있어 이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여기서 바로 태종 특유의 정면돌파방식이 다시금 나오게 된다. 바로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군무를 장악한다는 것으로 삼군진무소를 설치 하여 병조에 집중된 병권을 분할 통솔하고 이를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다시금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한 첫 시도였다.
다시 병권을 장악한 태종은 마침내 왕이 정부운영에 상징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운영주체가 되고자 하였다. 명나라에 승상부가 없으니 마찬가지로 의정부도 없애야 하며, 육조로 하여금 각각 직사를 바로 아뢰게 하고 왕지를 받들어 시행하게 하며, 의논할 일이 있으면, 육조장관이 같이 의논하여 아뢰게 하자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는 그 의지표현이 었다.
이것은 결국 의정부 자체를 없애려는 의도이며 왕이 직접 모든 일을 처결하겠다는 의지였다. 곧 왕이 직접 육조의 업무를 결재하는 육조직계제인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에서는 이러한 개혁이 어떻게 현실화되었느냐 하면, 의정부와 육조로 양분된 조정의 권력구조를 왕을 중심으로 한 삼극체제로 전환하면서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육조의 실무권한을 강화하였다. 강화된 육조의 실무권한에 대하여 왕이 직접 이들을 감독처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5)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세 축의 세력균형론 속에서 한 축이 무너질 때 그 권력이 나머지 두 축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두 축 모두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두 축의 세력균형에서 다른 한 축이 대등한 힘을 가지고 세 축을 만들 수는 있다. 말하자면 가감의 당연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태종 자신이 왕권을 보다 강력히 행사하기 위해 육조에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이른바 육조직계제가 세워지고 의정부의 정치적인 권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치운영이 보다 왕 자신의 의지에 따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단은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비된 국왕중심의 집권체제는 정도전 등 개혁파 관리들 이 추구하던 재상중심의 집권체제, 즉 재상들의 합의기관에서 정무의 의결권을 갖고 육조를 재상산하의 실무집행기관으로 정립시키려는 체제와는 다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자칫하면 상징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국왕의 위치를 확고히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훗날을 바라본 태종의 안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과전(科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여 관료들의 사적 경제력을 간섭하였다.
태종은 이와 같은 중앙의 관제를 개혁함으로써 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으로도 치안의 유지와 안정을 도모하여 실질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하는 사회질서의 운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신문고(申聞鼓)제도와 순위부(巡衛府) ·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 의금부(義禁府)의 경찰제도이다.
신문고제도는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를 설치하여 하정(下情)을 상달하게 한 제도를 본받아 실시하게 된 정치의 득실을 살피고 억울한 형을 받은 자에게 소원(訴寃)의 길을 열어주고 반역과 국가의 혼란을 예방하려는 복안에서 마련된 제도였다. 백성들이 수시로 입궐하여 대궐에 설치한 북을 두드려 그들의 노원을 개건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태종 원년 8월 초1일에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나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라고 명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서울과 외방의 고할 데 없는 백성이 원억(寃抑)한 일을 소재지의 관사에 고하여도, 소재지의 관사에서 이를 다스려 주지 않을 때 등문고를 치도록 허락하고, 등문한 일은 헌사(憲司)로 하여금 추궁해 밝혀서 아뢰어 처결하여 원억한 것을 펴게 하고 그 중에 사(私)를 끼고 원망을 품어서 감히 무고를 행하는 자는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여 참소하고 간사한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본래 제도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회에 정착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제도를 시행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이들이 사사로운 감정을 숨기고 있을 때는 피해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 신문고제도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후에는 두차례의 개정이 있게 되는데 신문고제도를 악용하거나 혹은 자주 소란스런 일이 발생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절차를 명확하게 하는 한편 북을 친 자의 사는 곳 등도 정확히 조사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법과 경찰은 치안유지의 목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국왕의 뜻에 따라 움직여질 때는 왕권강화의 도구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태종 때의 사법 · 경찰제도는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먼저 태종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 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1414년에는 의금부로 개편되었다.
의금부는 국왕에 직속한 기구로 도적방지, 국사범 · 역모 · 반역죄인 등을 사찰 · 심문 · 처벌하는 등 광범위한 권한이 있었다. 그것은 최고의 사법기관인 동시에 경찰기관으로서 왕권강화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6)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으로 호패법(號牌法)을 또한 들 수가 있겠다. 이는 대체로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패로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 그 목적은 호구파악, 유민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질서의 확립, 향촌의 안정유지 등을 위한 것이었다.
태종 13년 8월 21일 전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 황자후(黃子厚)는 상언하여 청하길,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流移)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비단 이러한 무리뿐만 아니라, 또 모든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지급하소서.”
하니, 태종은 자신 또한 호패법을 실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지니고 있었는데 마침 황사후가 상언하였으므로, 시산(時散) 양부(兩府) 각사(各司)에 명하여 이에 대한 검토를 지시하였다. 마침내 가부(可否) 중에 가하다고 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이를 시행하게 한 것이다. 태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길,
“호패의 법은 지난해에 시행하기를 청하는 자가 많았으나 내가 곧 중지시켰다. 이제 시행하고자하여 백사(百司)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가(可)하다고 하는 자가 많이 있다. 또 호패의 설치는 백성에게 해가 없고 나라에 유익하며, 또 초법(쿘法)의 시행이 이로 말미암아 쉽게 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 초1일에 의정부에서 올린 호패사목을 내용으로 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먼저 신분에 따른 호패의 규격 · 재질을 정하고, 두 번째는 호패면에 기재하는 양식을 정하며, 세 번째로는 호패에 관련한 명령은 같은 해 10월 초1일에 영(令)을 내려 두루 알리고 11일부터 차례로 만들어 지급하여 12월 초1일까지 마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호패법을 위반했을 경우의 처벌에 관련한 내용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호패법은 실제 그 운영면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애초에 태종이 백성에게 해가 없고 나라에 유익하다고 말은 하였지만 호패를 착용하고 다니는 일반 양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오히려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호패법이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유망(流亡)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또 양인들은 호패를 받으면 과중한 각종 국역을 부담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백방으로 호패받기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태종 14년 1월부터 실시된 호패법은 16년 6월에는 다시 폐지된다. 이러한 치폐의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나지만 지금과 같은 행정망과 전산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근본 적인 해결책은 제시되지 못하고 말았다.
국가에서 호패법을 아무리 좋은 의의를 가지고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그 적용 대상이 일반 백성들로 이들이 그 불이익과 불편함을 받는다면 실제 그 제도는 실시되기가 어렵다. 상층의 신분층에게는 그들의 신분을 확인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들은 각종 국역을 부담하는 층이 아니다. 또한 호패는 위조하거나 혹은 호패를 지니지 않은 자들, 호패를 고치지 않은 자 들이 있게 되자 그 불편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 13년 이후로 세종 때까지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 2할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국초의 호패법은 이상은 훌륭하였으나 운영면에서 실패하였다고 하겠다.
태종대왕 - 지방제도의 정비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지방제도의 정비
지방통치제도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정비되다가 15세기에 들어와 그 틀이 잡히게 되었다. 즉 고려의 다원적인 도제(道制)가 일원적인 8도체제로 개편되고 신분적 · 계층적인 군현 구획을 실질적인 행정구역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속현(屬縣)과 향 · 소 · 부곡 · 처 · 장 등 임내의 정리, 속현의 병합, 군현명칭의 개정 등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군현제 정비는 위로는 8도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를 확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지방통치는 군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지방행정은 수령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읍격과 수령의 직급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었으나 행정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다만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 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 → 감사 → 수령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적 계통과 경재소 → 유향소 → 면리임으로 연결되는 사족 중심의 자치적인 향촌지배 체제 및 이들 중간에 개재한 경저리(京邸吏) · 영리(營吏) · 읍리(邑吏)의 향리계통, 이 3자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통치제도가 이렇게 정비되는 것은 15세기 초로서 태종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지방에 대한 통제와 질서유지, 수취체계의 정비는 국가기반의 확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태종의 고심은 지방세력을 통제하면서도 그들을 중앙과 연결시켜 개국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종의 지방제도의 정비노력은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즉 1403년 윤11월 19일 사간원의 상소에서 비롯된다. 일대의 제도를 세워 새것을 취하고 묵은 것을 고치어 서로 인습하지 않은 것을 보인다는 뜻에서 부 · 주 · 군 · 현의 이름을 정하자고 하였다. 또한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1유도부(留都府)·6부(府)·5대도호부(大都護府) · 20목(牧) · 74도호부 · 73군 · 154현으로 군현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 · 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 · 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都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 · 영길도를 황해 · 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 밖에 1409년에 전라도 내의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 · 소 · 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그러나 태종 때에 단행된 지방제도 정비책은 몇가지 점에서 한계성을 갖고 있었다. 즉 도제와 군현구획의 개편, 임내의 직촌화, 군현병합과 같은 시책을 실시하였지만 호구와 전결수를 기준한 합리적인 개편은 끝내 되지 못하였다. 또 임내의 직촌화에 따라 면리제는 정착되어 갔지만 국가 의지에 의해 구획된 행정촌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군현 병합의 한계, 경재소와 유향소의 존속, 임내와 직촌의 병렬, 월경지(越境地)와 견아상입지(太牙相入地)의 광범한 존속은 강력한 재지(裁知)세력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중앙집권화와 지방분권적 요소가 맞닥뜨려진 결과였다.
특히 군현 병합책이 끝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된 배경은 대체로 국가적인 의도와 재지세력의 이해관계에서 긴장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즉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할해서 지배\'한다는 원리 하에서 전국을 8도로 나눈 다음 각 도내를 다시 주 · 부 · 군 · 현으로 구획하여 대 · 소읍을 뒤섞어 설치하고 군현 경계도 견아상입지와 월경지 를 존치시킴으로써 군현끼리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지속하려 했던 것이다.
태종대왕 - 지방제도의 정비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이렇게 정비된 지방통치제도와 함께 지방관으로 파견된 수령은 왕을 대신하여 그 왕도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임무와 포폄의 법을 정하게 되었다. 태종 6년 12월 20일에 사헌부에서 아뢴 것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령을 포폄하는데 있어 덕행(德行) 등제(等第)로 범칭하고 실효의 유무를 논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수령은 힘써 허예(虛譽)를 구하고, 사신과 과객에게 아첨하며, 품관과 향리에게 잘 보이려 하여, 힘써 행해 실효가 있는 자 없습니다. 금후로는 장(狀)의 뒤에 적은 칠사(七事)로써 고찰하고, 등제와 실효의 사목을 나누어 만들어 각각 명하(名下)에다 갖춰 기록하여 신문(申聞)해서 출척의 빙거(憑據)로 삼으소서.
1. 마음을 인(仁)과 서(恕)에 두어 궁핍한 사람을 진휼한 것이 몇 사람이며, 늙고 병든 사람을 혜양한 것이 몇 사람인가?
1. 몸소 행함에 청렴근신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어떠 어떠한 일에서 절감하였는가? 수렴(收斂)을 감손한 것이 어떠 어떠한 일이며, 아침 저녁으로 노고한 일은 어떠한 일인가?
1. 조령(條令)을 봉행하였으되, 도임(到任) 이래 행한 것이 어떠 어떠한 일이며, 판방(板쮠)에 걸어 놓고 대중에게 깨우쳐 신명한 것이 몇 조인가?
1.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여 경내에 제언을 수축한 곳이 몇 곳이며, 도임 후 백성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고하여 매 1호에 몇 주씩인가?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 권경(勸耕)한 것은 몇이며, 온 집안이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이웃으로 하여금 경작해 주게 하고, 그가 회복하기를 기다려 값을 갚아주게 한 것이 몇인가?
1. 학교를 수명(修明)한 것으로, 학교 몇 간내에서 수리한 것이 몇 간이며, 생도 몇 사람 내에서 독서하는 사람이 몇 명인데, 경서를 통한 사람은 몇 명인가? 1. 부역을 균평하게 하였으되 공부의 수렴은 어떠어떠한 일이 균평하며, 군역의 차정은 어떠어떠한 일이 균평한가?
1. 결송(決訟)을 밝게하여 노비의 상송(相訟)이 몇 건 내에 결절(決絶)한 것이 몇 건이며 잡송(雜訟)은 몇 건이었는가?”
[<태종실록>권12 6년 12월 을사(20)]
즉 기왕에는 수령을 포폄하는데 있어 덕행 등제를 살필뿐 그 실효의 유무를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 백성의 안녕과 조세수취 등을 위하여 정한 구체적인 수령칠사(守令七事)의 내용을 수령이 얼마만큼 실효있게 실행하였는가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그 고과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태종이 행한 지방통치제도의 확립은 이후 조선왕조를 통하여 그 뼈대를 구성하였으며 지방관의 포폄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왕(중앙정부) → 감사 → 수령 → 면리임으로 이어지는 지방 통치체제와 서울 → 도 → 주·부·군·현 → 면(방·사) → 리(동·촌)으로 편성되는 행정구역의 틀이 완성된 것이다.
태종대왕 - 토지·조세제도의 정비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토지·조세제도의 정비
고려말기 권력가들에 의한 토지의 겸병과 탈점, 사패(賜牌), 투탁, 기증 등의 형태로 확대된 사전은 농장의 운영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가 수조지의 감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농장주가 권력층에 있기 때문에 불법으로 조세를 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전호농민 혹은 자영소농민의 축소를 가져와 크게는 기층 사회질서를 뿌리부터 흔드는 결과 를 가져왔다. 고려말 조선초의 경제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사전혁파(私田革罷)임을 개혁정치세력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농장을 축으로 하고 있는 사전을 혁파하거나 개혁이 이루어졌다. 즉 사전(私田)에서의 사적수조권은 국가로 귀속되었다. 이렇게 귀속된 토지에 대한 수조전은 재분배가 다시 이루어졌고 이것은 문무관료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과전법의 실시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전은 여전히 국가경제질서를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계속적인 개혁과 통제, 소 농민을 위한 전제정책 등이 필요하였다. 민은 식(食)이 충족되고 여유가 있어야 예의를 안다고 했다. 유교경전을 누구보다도 숙지하면서도 국가운영을 위한 방법을 심사숙고하던 태종에게 있어 민의 식(食)을 안정시키는 것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정확한 조세원 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전지(田地)에 대한 양전(量田) 사업이었다.
양전사업은 농경지의 경영의 주체를 조사하고 측량하며 실제 작물의 소출현황을 조사·파악하여 전세의 징수를 하는데 필요한 작업이다. 경작하는 전지에 대한 정확한 소유지와 경작자 생산량과 넓이, 토질 등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것이다. 특히 국가의 기간산업이 농업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하여 태종 때 에도 경차관을 통한 양전사업이 여러차례 실시되었다.
전근대 사회의 토지제도의 기초는 정확한 전지의 파악이었다. 따라서 양전을 통해 결총(結總)의 확보를 해야 하고 양전을 통해 파악된 각 지방의 결총은 양전대장에 기록되었다. 양전사업은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하였는데 그 결과 태종 6년 5월 3일 의정부에서 여러 도의 양전한 결수를 올린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북면(東北面) · 서북면(西北面)에 양전(量田)을 행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고, 경기도 ·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 · 풍해도 · 강원도의 6도에 원전(原田)이 대개 96만여 결(結)이었다. 양전하여 얻은 잉전(剩田)이 30만여 결이었다. 고려 말기에 전제(田制)가 크게 허물어져서 1389년(고려 창왕 1)에 6도(道)를 양전하여 전적(田籍)에 올렸으나, 그때 왜구가 한창 성하여 바닷가는 모두 진 황지(陳荒地)였다. 이 때에 이르러 개간한 땅이 날로 불어서 남아 있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양전한 것이다.
태종은 양전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으로 농민들이 혹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태종 6년 7월 1일에 의정부에 하교하여 각 도에서 지난 해 개량(改量)한 전토로 만일 적당함을 잃은 곳이 있다면, 조세를 거둘 때에 전객(佃客)의 진고(陳告)를 허용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 도록 하였다. 양전이 갖는 목적과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공평함과 정확함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 결과 같은 해 10월 27일에 사헌부에서 3도(道) 양전 경차관(量田敬差官)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전을 함에 있어 용렬하고 게으르며 정 밀하지 못하여 전지에 대한 적당함을 잃게 한 경차관에 대한 처벌을 청한 것은 이를 통해 보다 정확하고 적당한 양전을 하고자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태종대왕 - 토지·조세제도의 정비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그리고 다시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 결의 전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말기의 50만여 결에 비해 거의 두배 이상으로 늘어난 액수이다. 그것은 크게 빈해(濱海)의 토지와 은결(隱結)이 모두 파악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태종 6년에 이루어진 사사전(寺社田)의 혁파 결과 얻어진 것이 5, 6만결이나 되었다. 태종은 이렇듯 군자보충 · 조운타개 · 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계속 강화하여 나갔다. 즉 사전에 대한 억제를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권세가들의 세력이 경제적으로도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국익을 증대하고 사익을 억제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양전사업과 과전법은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의 근본목적이 바로 민의 경제생활의 안정에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 된다. 이들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태종은 여러 형태로 분산되어 국가의 조세수취원이 되지 못했던 토지를 단계적으로 정리하여 나갔다. 별사전의 지급, 사원전의 혁파, 한량관의 군전 몰수,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 지급의 제한 등이 그 내용이다.
즉위 초인 1401년에 태종은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1405년에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을 감하여 군자전으로 충속하였으며, 외방거주를 원하는 전직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계속해서 1406년에는 고려말 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을 혁파하여 5∼6만결을 새로이 공전으로 확보하였다.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 전급법을 정하여 공·사천인 자손과 기첩과 천첩의 자손에게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휼양전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 하였으며, 평양·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전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경기사전의 하삼도이급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각종 공신전·과전 등 총 11만 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이급하고, 경기에 이미 지급되었던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가을에 심는 대맥·소맥을 이듬해 초여름에 이르러 수확하고 또 콩을 심을때에는 세를 두번 걷는 맥전 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대량으로 만드는 등 비축곡의 규모가 1413년에 356만 8,700석이던 것이 1417년에는 415만 5,401석에 이르렀다.
과전법에서 정한 사전경기(私田京畿)의 원칙에 따른 사전운영은 사전의 확대를 억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공전이 외방에 있게 되자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수취곡물을 운반하는데 따른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과전이 경기에 있음으로 해서 경기 거주민인 전주와 전객 사이에 수탈과 압박이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경기 지역민들이 조세 의 부담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의 역에 종사하여야만 하였을 때 이중으로 그 부담이 과중된 것은 국가와 경기민 사이에 불편함을 야기시켰다. 따라서 태종 3년부터 이미 사전의 삼남지방 이급논의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오랜 시간이 흘러 결국 전주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태종 17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태종 17년 7월 22일에 의정부(議政府) · 육조(六曹) · 공신 (功臣) · 대간(臺諫)의 의논을 따라 과전의 3분의 1을 호조(戶曹)에 명하여 충청도(忠淸道) · 전라도(全羅道) · 경상도(慶尙道) 3도(道)에 옮기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태종은 그의 재위기간 중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제의 안정과 조세수취원의 확보를 통해 국가경제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사전을 축소시켜나가고 소농민경영을 확보함으로써 그 개혁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그의 양전작업과 전제개혁, 사전의 혁파 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초기의 왕실과 중앙정부의 행정장악의 범위는 더욱 확대될 수 있었으며, 농민들도 이에 따라 과도한 수탈과 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태종대왕 - 산업장려 정책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산업장려 정책
정치와 경제의 안정은 사회질서의 안정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이는 또한 산업의 발달로 이어질 수 있다. 당시에 있어서 산업이라 함은 농업을 주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태종은 정치질서의 안정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뒤, 낙후되어 있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동안 수령을 지방에 보냄에 있어 수령칠사(守令七事)를 통해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기도 하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아니었다. 국가적인 농업지원책이 필요하였다. 이것이 제언 등 수리시설과 농서의 보급, 잠업의 장려 등이었다.
먼저 태종은 14년 6월 9일에 호조의 건의로 수리(水利) 사업을 벌일 수 있는 토지를 조사케 하였다.
“각 도 안에 수리(水利)를 일으켜서, 양전(良田)을 만들 수 있는 땅과 옛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해서 경작(耕作)할 수 있는 곳을 자세히 찾아 물어서 결복수(結卜數)를 일일이 갖추어 아뢰고, 각 도에 이문(移文)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태종은 이에 따라서 곧 수리사업을 도모할 수 있는 전지를 파악하고 이를 실시하였는데 먼저 당시 가장 큰 제언이었던 벽골제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1415년(태종 15) 당시에는 가뭄이 심하여 실농하는 이가 많게 되었다. 이에 따라 허지(許遲)가 구황을 위해 여러 가지 사안들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수리의 부족을 이야기하고 이를 축조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1413년 이후로 수리사업이 벌어지긴 하였으나 아직 부족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태종 15년 8월 1일에 다음과 같이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를 보수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이 보고한 내용을 보면 이와 같은 수리사업이 상당히 활발히 벌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그 가운데 전라도내의 제언으 로서 눌제와 벽골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지형상 눌제의 경우는 저수할 땅이 얕거나 깊고, 제방 아래의 밭은 지세가 높아 물을 끌어 관개하기가 어려워 그 효율이 떨어지고 벽골제의 경우는 이와 달리 그 수리의 편리함이 지형적으로도 좋았다. 이렇게 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박습(朴習)은 김제 벽골제에 대한 제언(堤堰)을 쌓는 사목(事目)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김제군 벽골제의 수문(水門)을 수축(修築)하겠으니, 석공(石工) 3명을 보내주시면 신이 본도 각 고을의 군인을 모아 이달 20일까지 기초를 닦고 쌓기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벽골제를 수축함으로써 1만여 결에 필요한 수리를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리정책은 지방관의 몰이해와 제언 축조시 수몰전지 주민들의 반발, 제언을 부수고 고기를 잡는 행위 등으로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비록 태종 16년 5월에 수몰경지에 대한 대책으로 `신축 제언내에 수몰하여 경작할 수 없는 것은 제언 하의 묵은 땅으로 그 수만큼 절급하고 묵은 땅이 없는 곳은 이전부터 경작하던 전지로 양을 줄여 분급한다\'고 하 였지만 워낙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여서 실제로 이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맞게끔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한 경기도 부평인 100여 명은 제언이 그들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사헌부에 호소하기도 하였는데, 지방관들 중에는 무리하게 제언을 축조하여 그 고과를 높이려는 자들도 있어 이 또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당시 박습이라든가 우희열 같은 수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중용하면서 계속해서 제언의 축조 등을 통한 수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잇따른 한재가 겹쳐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