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世) 궁진(宮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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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9-15 17:11 조회839회 댓글0건본문
13세 진유공의 아들로 이름은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 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 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 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 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 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 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츉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 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 신을 단인(端仁) ·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 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 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 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 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 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 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츉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 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 신을 단인(端仁) ·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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