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진급(眞伋) 1675∼174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여사(汝思), 호는 서천(西泉). 이조판서 정영의 손자이고 호조참판 대성의 4남이다. 25세에 진사 세마가 되었고 38세인 1712년(숙종 38)에 정시에 급제하였으나 노론과 소론의 붕당이 심하여 소론의 자제 4명이 시비의 대상이었다. 3인은 시권(試券)이 의심스럽다 하고, 공은 시간이 지났다 하여 모두 방에서 뽑아내었다. 이후 문과의 길을 사양하고 세마의 업무를 계속했다. 1722년(경종 2) 49세에 복과(復科)되어 교리가 되었으나 1725년(영조 1)에 다시 취소되어 붕당에 실망하고 사직했다. 아들 광찬(匡贊)이 대과 급제하였을 때, 영조대왕은 아들이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였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배위는 능성구씨 진사 정상( 相)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거염리에 있었으나 1974년 8월 9일 군부의 이장 명령으로 부득이 1975년 청명일에 화장하였다.
진망(眞望) 1672∼173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구숙(久叔), 호는 도운(陶雲) 혹은 퇴운(退雲). 영의정 경석의 증손이며 우성(羽成)의 차남이다. 1696년(숙종 22) 생원이 되었고 1711년(숙종 37)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지평과 정언을 거쳐 1725년(영조 1) 대사성으로서 소론 이광좌(李光佐)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1730년(영조 6) 형조판서가 되었고, 1732년(영조 8)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735년(영조 11) 좌참찬으로 빈객을 겸했으며 지중추부사로 생을 마감했다. 영조대왕 잠저 시절에 사부(師傅)로 왕의 예우를 받았다. `덕천군 사우 중수문(德泉君 祠宇 重修文)\'을 지었고 저서로는 <도운집(陶雲集)>이 있다.
 배위는 반남박씨 판관 태흥(泰興)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20-14에 있다.
진수(眞洙) 1684∼ 173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연(子淵), 호는 서간(西澗). 충청도 관찰사 덕성(德成)의 3남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별시에서 감시(監試) 생원(生員) 장원하고,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 부사과 · 지평을 지냈다. 1724년 수찬을 지낸 뒤 1725년(영조 1) 김일경(金一鏡)의 일당이라 하여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으나 후에 풀려나 삼사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고 작품 글씨로는 `기자궁 구기비(箕子宮 舊基碑)\' `의릉 표석(懿陵 表石)\'이 남아 있다.
 배위는 양주조씨 진사 복빈(福彬)의 딸이다.
 묘소는 양주 서산에 있다.
진순(眞淳) 1679∼173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후(子厚), 호는 하서(荷西). 경직의 증손이며 충청도 관찰사 덕성(德成)의 차남이다. 1722년(경종 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소론에 소속되어 그 해 신임사화가 일어났을 때 수찬으로서 노론 축출에 가담하였다. 1724년 영조대왕이 즉위하자 벼슬을 삭탈당하였고 이어서 귀양을 갔으나, 이후에 풀려나 양사(兩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형조참판 · 도승지 · 대사간 · 한성부 우윤(右尹) · 대사헌 ·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임소(任所)에서 별세했다. 글씨를 잘 썼다. 비문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지었다. 작품으로 `삼진 충의비(三陣 忠義碑)\' `사간 박동현 표(司諫 朴東賢 表)\' `금백 이덕성 갈(錦伯 李德成 碣)\' `공주목사 박병 갈(公州牧使 朴炳 碣)\' 등이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 부사 호(?)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갈현 자좌에 있다.
진유(眞儒) 1669∼173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사진(士軫), 호는 북곡(北谷). 정영(正英)의 손자이고 참판 대성(大成)의 아들이다. 백부 만성(晩成)에게 출계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진사가 되었고, 1707년(숙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에 등용되었으며 후에 교리·수찬을 지냈다. 1716년(숙종 42) 소론으로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과 발문에서 소론의 윤증(尹拯)을 비난한 필자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삭출되었다. 그러나 1721년(경종 1)에는 정언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사간이 되어 세제(世弟 : 영조대왕)의 대리청정을 건의한 노론 4대신을 탄핵, 이들을 제거했다. 이어서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했다. 부제학 · 이조판서 겸 좌부빈객을 역임하였으며, 1724년 경종대왕이 서거하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노론이 등용되자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작품 글씨로는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 `공주 명위관 임제비(公州 明委官 林濟碑)\' 등이 남아 있다.
 배위는 덕수장씨 승지 선충(善沖)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군 송남면 가좌곡 손좌이다.
집성(集成) 1630∼169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대숙(大叔), 호조판서 경직(景稷)의 손자이며 장영(長英)의 장남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정랑을 거쳐 군수를 지냈고 1681년(숙종 7) 보사공신(保社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능성구씨 감사 봉서(鳳瑞)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굴전 오좌에 있다.
창원(昌遠) 1890∼1958    파명:덕천군(德泉君)
 창원(昌遠) [1890(고종 27)∼1958]
 자는 화규(華奎), 호는 춘포(春圃). 강릉부수의 10대손이며 면백(勉白)의 7남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박람강기하고 시문을 잘 지어 훈장을 지냈다. 문집이 있다. 시 3백여 수가 보존되어 있다.
 배위는 광산김씨 재기(在琪)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벌교 외서 장대정 해좌이다.
창정(昌廷) 1572∼?    파명:덕천군(德泉君)
 창정(昌廷) [1572(선조 5)∼?]
 자는 이삼(而參), 송림군의 현손이며 총(叢)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사예 · 지평을 거쳐 평안도 순안어사, 사성(司成)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배위는 홍주조씨 서룡(瑞龍)의 딸과 견성이씨 수명(壽明)의 딸이다.
 묘소는 파주 서면 승통리에 있다.
척연(쾩然) 1591∼166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오(星吾), 호는 동이(同異) 또는 동포(東圃). 학성군의 현손이며 구(球)의 아들이고 원(瑗)의 조카이다. 진사로서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 교리·승지를 지냈다.
 저서에 <보곤록(輔袞錄)>2권, <상례요람(喪禮要覽)>1권 등이 있다.
 배위는 연일정씨 굉(쥷)의 딸과 여흥민씨 제안(齊顔)의 딸과 김해김씨 등 세분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광리 건좌이다.
천(薦) 1550∼1595    파명:덕천군(德泉君)
 천(薦) [1550(명종 5)∼1595(선조 28)]
 송림군의 차남인 안현군의 손자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다. 증 병조판서. 시호는 충렬(忠烈).
 배위는 첨지 황전(黃銓)의 딸과 문의윤씨 손평(孫平)의 딸이다.
 묘소는 교하 공릉(工陵) 기동(機洞) 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