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보절부령(保節副令)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보절부령(保節副令) [ ? ∼ ? ]
 휘는 영(玲), 송계군의 4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온양방씨이다. 부령에 올랐다.
 선대에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큰 화를 입어 그 여파로 인하여 승계와 표덕 및 생졸연대와 묘지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배위는 안동권씨이고 후사가 없다.
부원정(副原正) ? ∼ ?    파명:영해군(寧海君)
  부원정(副原正) [ ? ∼ ? ]
 휘는 이(?), 완천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창녕성씨이다. 초수는 영(令)이었으며 품계는 창선대부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해 생졸연대 및 표명덕행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배위는 신부인 청주경씨이고 1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81의 1 영춘군 묘소 아래쪽에 양위 쌍폄으로 묘비 및 석물이 있다.
선성수(宣城守) 1507∼1578    파명:영해군(寧海君)
  선성수(宣城守) [1507(중종 2)∼1578(선조 11)]
 휘는 기(期), 자는 신지(信之). 덕녕부정의 계자로 생부는 완천군이고 생모는 현부인 창녕성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하여 표명덕행의 기록과 묘가 실전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함평이씨이고 3남 3녀를 두었는데 차남 덕량(德良)은 강녕군의 외아들 주진수(朱陳守)의 계자로 내보냈다.
송계군(松溪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송계군(松溪君) [ ? ∼ ? ]
 휘는 중숙(仲叔), 길안도정의 3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여산송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연산군 내폐사건으로 1506년(연산군 12) 남해섬으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지만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 사건으로 시산군이 순절할 때 함께 화를 당해 관직, 표덕 ·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1614년(광해군 6)에 증군(贈君) 증자(贈資)되어 정의대부가 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온양방씨(溫陽方氏)와 증 현부인 조씨이며 5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 능촌 고령에 있다.
순성부정(蓴城副正)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순성부정(蓴城副正) [ ? ∼ ? ]
 휘는 정(禎), 영춘군의 3남이며 어머니는 광양현부인 진주류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하여 생졸연대 및 표명덕행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배위는 신부인 여흥민씨와 신부인 창녕이씨이다. 1남을 두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90번지에 3위 합폄으로 묘비와 석물이 갖춰져 있다.
시산군(詩山君) ? ∼ 1521    파명:영해군(寧海君)
  시산군(詩山君) [ ? ∼ 1521(중종 16)]
 휘는 정숙(正叔), 호는 삼사당(三事堂), 시호는 문민(文愍). 길안도정의 장남이다. 배위는 현부인 순훙안씨로 군수 숙(塾)의 딸이다.
 공은 송나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라에 상소한 봉사(封事)를 발췌하여 중종대왕에게 올려 국정을 쇄신케 하였다. 참신한 정치를 권하고자 면대를 청해 임금과 경회루에서 학문연마와 원자(元子) 교육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임금은 가상히 여기고 술과 서책을 하사하였다. 또한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의 석방과 여악(女樂)의 혁파와 신비(愼妃)의 중전 복위를 건의하고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배 퇴출을 주장하였다. 종친 숭선군(嵩善君 : 덕원군의 4남)과 종제 강녕군(江寧君)과 연명 상소하여 극언극간(極言極諫)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한(漢)나라 종친의 영걸 유향(劉向)에게 비유하여 삼종영(三宗英)이라 칭하였다.
 정암 조광조와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학문의 진도가 날로 더하였다. 국정에 대한 의론이 서로 부합하므로 간당들의 시기가 극심하여 기묘사화 때 관직이 삭탈되었고 간당의 비방은 더욱 성하였다. 1521년(종중 16)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결국 극형을 당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시를 지어 슬퍼하며 “곧은 충성 백일을 관통하니(貞忠貫白日), 의기와 절개는 창천을 갈았도다(氣節磨蒼旻).”라고 하였다.
 선조대왕 때 설원되고 1793년(정조 17)에 8대손 가춘(可春)이 어가 앞에서 상언(上言)하여 정의대부 시산군으로 증직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호남 사람들이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에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아들 위(威)가 있었으나 신사무옥 때 별세하고 청화수(淸化守)의 차남 용성정(龍城正)이 입후(入後)되었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관풍리 산59번지에 있다.
신성부령(信城副令)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신성부령(信城副令) [ ? ∼ ? ]
 휘는 거(?), 송계군의 3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온양방씨이다. 부령(副令)에 올랐다.
 선대에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사건의 큰 화를 입어 그 여파로 인하여 품계와 표덕, 생졸연대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배위는 남양홍씨이고 1녀만 두었고 후사가 없다.
영춘군(永春君) 1465∼1507    파명:영해군(寧海君)
  영춘군(永春君) [1465(세조 11)∼1507(중종 2)]
 휘는 인(仁), 자는 자정(子靜), 시호는 목성(穆成). 영해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이다.
 1474년(성종 5) 10세 때 영춘군에 봉해져 정의대부에 올랐다. 1479년(성종 10) 15세 때 승헌대부에 올랐고 사옹원 제조 벼슬을 한 뒤 또 숭헌대부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 내폐(內嬖)사건으로 아들 여러 형제가 남해섬으로 귀양갔다가 1507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돌아와 관작이 회복되어 원종공신이 되었다.
 11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그 뒤 3년도 안되어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자 외할머니에게 의지하여 자랐다. 집상과 봉제사에 지극해 일가친척이 모두 칭찬하였고 평생 꽃가꾸기를 좋아하였으며 대단히 검소하였다.
 배위는 광양현부인 진주류씨로 4남 2녀를 두었다. 묘소는 영해군 산소 오른쪽 딴 묏부리 기슭에 양위 쌍폄으로 있고, 묘비 · 신도비 · 석물이 갖춰져 있다.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영해군(寧海君) 1436∼1478    파명:영해군(寧海君)
 영해군(寧海君) [1436(세종 18)∼1478(성종 9)]
 휘는 당(쩪), 자는 옹지(춳之), 시호는 안도(安悼). 세종대왕의 9남이며 어머니는 신빈 김씨이다. 1442년(세종 24) 7세 때 영해군에 봉해지고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진기한 놀이와 춤 · 여색 등은 삼가했다. 평소에 중풍기가 있었는데 1478년(성종 9) 4월에 더욱 심해져서 그 해 5월 5일에 향년 43세에 별세했다. 성종대왕은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3일간 조정일을 거두고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1872년(고종 9)에는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임천군부인 평산신씨이고 2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 남쪽 무수동 기슭에 양위 각폄으로 따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갖춰져 있다.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에 소재한 소덕사에 위패를 모시고 매년 5월 5일 기신제를 봉행하며 음력 10월 12일 전국 각지 후손들이 산소에 모여 시절향사(時節享祀)를 올리고 있다.
옥계군(玉溪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옥계군(玉溪君) [ ? ∼ ? ]
 휘는 필숙(畢叔), 길안도정의 6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여산송씨이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사건 때 순절하여 표덕과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초수는 수(守)였으나 돌아간 뒤에 정의대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전주유씨이고 1남을 두었으며 묘소는 양위 함께 실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