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우진(禹鎭) 1819∼1893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성의(聖儀), 무산군의 9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이다.
응인(應寅) 1808∼1864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하경(夏卿), 호는 사림(四林). 무산군의 12대손이며 태면(泰冕)의 독자이다. 1852년(철종 3) 식년시에 급제하여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부승지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광군수와 정주목사를 지냈다. 또한 당대의 명필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전해진다.
 배위는 평산신씨와 연일정씨이다. 묘소는 서산 선영하 자좌이고 배위 숙부인 평산신씨와 합폄했다. 숙부인 연일정씨의 묘소는 금생면 선영하에 안장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응진(應辰) 1813∼1887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공오(公五), 호는 소산(素山), 시호는 문헌(文獻). 무산군의 12대손이며 화면(華冕)의 장남이다. 학문에 열중하던 중 진사시에 급제하고 1859년(철종 10)에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 · 제학 ·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외직은 장단부사 · 봉산군수 · 영남경시관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2대조 무산군의 시호가 없음을 알고 당대의 문정공(文正公) 김세균(金世均)의 찬으로 무산군의 시호인 효정(孝貞)을 고종황제로부터 받게 하는 데 공헌했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했으므로 기사(耆社)에 들어 문헌이란 시호도 받았다.
 배위는 정부인 창원황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이며 부인과 합폄하였다. 후사가 없어 현춘(顯春)을 계자로 했으나 무후하였으며, 자부 경주김씨는 효부열녀로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익진(翼晋) 1747∼1819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치명(穉明), 호는 만향(晩香). 무산군의 9대손으로 명복(命復)의 차남이다.
 1782년(정조 6)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렀고 외직으로 춘천 · 남양 · 이천 · 안변 등 5읍 부사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나 조야에서 그 명망이 대단하였다. 백씨 우진(羽晋)과 더불어 문집도 지었으나 간행하지 못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원포리이다.
 배위는 숙부인 연일정씨이고 묘소는 합폄했다. 5남 2녀를 두었다.
인면(麟冕) 1805∼1887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성오(星五), 무산군의 11대손으로 승지 정(晶)의 7대손이며 증 호조판서 세기(世紀)의 아들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와 정부인 단양장씨이다.
일진(一鎭) 1718∼1803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경백(敬伯), 무산군의 9대손이며 수대의 장손이고 민헌(民獻)의 장남이다. 학문이 높은 조상의 뜻을 따라 학문에는 열중했으나 조부가 “학문을 하여 적덕(積德)은 하되 벼슬에 오르기를 삼가라.”고 한 유언에 따라 학문을 하면서도 벼슬을 멀리했다. 관계에 나오기를 임금이 권유하므로 기로과에 응시하여 등용되었으며, 1800년(정조 24) 절충장군에 올라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에 올랐으나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하다가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분당 신도시사업에 따라 1989년 경기도 광주군 곤지암으로 배위 숙부인 창원황씨와 천묘 합폄하였다.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정(晶) 1623∼1692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일삼(日三) 또는 명원(明遠), 무산군의 4대손이며 충성군(忠城君)의 장남이다. 학문에 열중하여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등과하고 1648년(인조 26)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관직을 거치면서 충정과 효성으로 위민하였으며 삼사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병조참판에 이르러 국방정책에도 공헌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이천안씨이고 슬하에 1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행양방 파악동 선영하 간좌에 합폄으로 장례하였다.
정진(廷鎭) 1695∼1789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이겸(爾謙), 무산군의 9대손이며 판관 억대(億大)의 손자이다.
 무관으로 선전관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배위는 숙부인 반성주씨이다.
정필(正弼) 1830∼1892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경보(景甫), 호는 만송(晩松). 무산군의 10대손이며 생부는 현진(賢晋)이나 문진(文晋)의 양자가 되어 학문과 무술을 닦았다. 고종 때 통정대부 품계를 받고 충청도수군절도사 겸 보령군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또한 문학에도 뛰어나 당대의 문장가로 널리 알려졌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대치면 수석리 동록 묘좌이고 배위는 숙부인 진주강씨로 묘는 건좌에 동폄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정흥(鼎興) 1645∼1729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사중(士重), 무산군의 6대손이다.
 조부 경인이 수학하던 심산정자에서 여러 젊은 종친 학사들과 모여 부친 석명과 숙부 석형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1684년(숙종 10)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1689년(숙종 15)에 장례원 사평에 제수된 후 1694년(숙종 20) 중훈대부에 올라 형조좌랑이 되고 이어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절충장군에 올라 충무위 부사용이 되고 1728년(영조 4)에 충좌위 사용에 제수되었다. 그 후 조정에서의 동서론 쟁의가 있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심산정자에서 후학훈도에 노력하고 특히 1699년(숙종 25)에 있었던 전국을 휩쓴 대전염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다가 1729년 별세하였다.
 배위는 안동권씨와 원주이씨로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새고개 선영 동강 자좌이다. 배위 안동권씨의 묘소는 정자동 작은절골 신좌이었으나 1989년 분당 신도시사업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곤지암으로 천묘 안장하였다. 배위 원주이씨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 발하산 신좌에 안장되어 있으며 슬하에 1남을 두었다. 후에 영선군계 무산군의 5대손 석구(錫耉)가 후사가 없어 계자로 입양하여 무산군의 원자 계통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