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언경(彦經) 1653∼1710    파명:영해군(寧海君)
  언경(彦經) [1653(효종 4)∼1710(숙종 36)]
 자는 사상(士常), 호는 천유재(天遊齋). 죽와공 정린(廷麟)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광주김씨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1년(숙종 17)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20여 년 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균관 학유(學諭) · 시강원 설서 · 사헌부 지평 · 함평현감 · 지제교 · 암행어사 · 검전관(檢田官) · 서장관(書壯官) · 병조정랑 · 승지 · 사간원 대사간 · 충청도백 · 황해도백을 지냈다. 특히 황해도 도백 재임시에 납세의 공평을 위해 상정법(詳定法)을 만들어 반포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구암리 식암산이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언기(彦紀) 1640∼1702    파명:영해군(寧海君)
  언기(彦紀) [1640(인조 18)∼1702(숙종 28)]
 자는 선경(善卿), 지평공 백린(伯麟)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청송심씨이다.
 사마시에 급제하고, 1687년(숙종 13)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 동몽교관 · 현령 · 승정원 주서(注書) ·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외직인 개성유수를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 통례의 묘 아래에 배위와 함께 양위 합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여재(如梓) 1685∼1763    파명:영해군(寧海君)
  여재(如梓) [1685(숙종 11)∼1763(영조 39)]
 자는 계직(季直), 호는 낙재(樂齋). 첨추(僉樞) 후(煦)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에 진사에 오르고 영릉참봉을 제수받았다. 판서 유최기(兪?基) · 좌랑 류일상(柳一相) · 지평 한상기(韓尙箕)와 도의교를 맺고 교유하였으며 학자들은 남주(南州)의 부자(夫子) 낙재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15의 1번지에 있다.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용기(龍器) 1897∼1932    파명:영해군(寧海君)
  용기(龍器) [1897(광무 1)∼1932]
 자는 중빈(重彬), 호는 성당(省堂), 일명 두기(斗器). 시산군의 13대손이며 교성(敎性)의 차남이다.
 1919년 4월 3일 재종형 석기와 뜻을 같이 하여 남원 읍내에서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사숙을 열어 후손에게 민족혼을 심어 뒷날을 기하려 힘썼으나 모진 고문에 병들어 향년 36세로 별세하였다.
 국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추서하고 묘 앞에 애국지사 형제로 지칭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오신리에 있는 노은공 산소 왼편에 있다.
원묵(元默) 1767∼1831    파명:영해군(寧海君)
  원묵(元默) [1767(영조 43)∼1831(순조 31)]
 자는 이성(而成), 양정(養鼎)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대구서씨이다.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학문과 덕행에 힘써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급제하고, 1816년(순조 16) 50세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병조참판을 지냈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익헌공 산소 아래이다.
원팔(元八) 1765∼1838    파명:영해군(寧海君)
  원팔(元八) [1765(영조 41)∼1838(헌종 4)]
 자는 순거(舜擧), 지정(趾鼎)의 계자이며, 생부는 진사 이정(耳鼎)이고 생모는 한양조씨이다.
 1790년(정조 14) 26세 때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이조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김씨로 진사 득추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 사기막동 유좌에 있다.
응주(應疇) 1878(고종15) ~ 1957    파명:영해군(寧海君)
 영해군파 16대손이며, 자는 우경(禹卿) 이조판서 이창수(昌壽)·이병정(秉鼎)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 이조묵(祖黙)의 증손자이며 완기(完器)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며 한말의 무신이다. 1900년 육군무관학교 졸업생(제1회)으로 그 해 6월에 대한제국 육군 참위에 취임하여 侍衛聠隊江界鎭衛隊의에서 근무하고 1902년 부위가 되면서 정3품으로 오른 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 남전 산 31의 6에 있다.
일제(日躋) 1683∼1757    파명:영해군(寧海君)
  일제(日躋) [1683(숙종 9)∼1757(영조 33)]
 자는 군경(君敬), 호는 화강(華岡). 현감 언순(彦純)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1708년(숙종 34) 생원시에 급제하고, 1722년(경종 2) 알성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고 1728년(영조 4) 기복종사(起服從事)로 46세 때 유공자로 표창코자 하였으나 이를 굳이 사양하였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석곡동 산6의 1이고 비갈과 석물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문화류씨와 양주윤씨이며 2남을 두었다.
정기(정器) 1925∼1970    파명:영해군(寧海君)
  정기(컪器) [1925∼1970]
 매촌공 교항(敎恒)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이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6 · 25전쟁 중 민족청년을 규합하여 단장으로서 34세에 족청(族靑)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제헌의원에 당선되고 재무위원의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또 영해군 위패를 모신 소덕사(昭德祠)의 강당을 봉건 헌납하였다.
 묘소는 매촌공 선영 아래인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촌리 가족묘지에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정린(廷麟) 1625∼1682    파명:영해군(寧海君)
  정린(廷麟) [1625(인조 3)∼1682(숙종 8)]
 자는 서징(瑞徵), 호는 죽와(竹窩). 비연재공 시필(時苾)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경주정씨이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시와 부를 잘 지었으나 과수(科數) 부족으로 과장에 불리하던 중 모친상 · 부친상 · 조모상을 겪는 동안에도 과문 공부에 전념하여 1680년(숙종 6) 56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출사하였다.1681년(숙종 7)에는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춘추관 기사관을, 외직으로 옥구현감을 지냈다. 향년 58세로 별세하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삭녕최씨와 정부인 광주김씨이며 2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성남동 산10번지에 3위 각폄이고 묘지명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