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성효(性孝) 1697∼174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근보(謹甫), 경직(景稷)의 5대손이며 참판 광세(匡世)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 사서 · 지평 등을 지냈고 금주(禁酒)와 주전(鑄錢)에 관한 상소를 하였다. 1739년(영조 15) 부수찬으로 관서어사(關西御史)를 지냈다. 이듬해 교리에 이르렀으나 전 형조판서 리춘제(李春?) 아들의 관례(冠禮)에 참석했다가 식중독으로 급사했다. 공의 부친이 그 연유를 밝혀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끝내 그 연유를 알지 못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작품 글씨로는 효아돈씨비(孝娥頓氏碑)가 있다.
 배위는 안동김씨 진사 서갑(瑞甲)의 딸과 기계유씨 일기(一基)의 딸이다.
 묘소는 충주 석교 간좌에 있다.
숙(淑) 1595∼1654    파명:덕천군(德泉君)
 숙(淑) [1595(선조 28)∼1654(효종 4)]
 송림군의 현손이며 무양령(武陽令)의 손자다.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괄의 난에 이수일(李守一)장군을 따라 적진을 야습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고도 용전(勇戰)하였으나 그 공을 원수에게 양보하여 2등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당상내금장(堂上內禁將)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해주최씨 식(湜)의 딸이다.
 묘소는 사촌(沙村) 을좌에 있다.
시번(時蕃) 1682∼176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무경(茂卿), 함풍군의 6대손이며 규성(奎成)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배위는 파평윤씨 병사 우진(愚進)의 딸이다.
 묘소는 풍덕 진봉산 원명동에 있다.
시원(是遠) 1790∼186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시호는 충정(忠貞). 진위(眞偉)의 현손이고 진사 면백(勉伯)의 장남이며 건창(建昌)의 조부이다. 1815년(순조 15)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이 되었고, 정언 · 태천(泰川)현감을 거쳐 1826년 홍문관 교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제교 · 사성 · 장령을 지냈다. 이어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를 제수받았다. 1833년 경기어사가 되어서는 험한 지역에까지 방방곡곡 두루 다니며 각처의 풍속과 백성의 곤궁을 몸소 살폈다. 헌종성황제 초년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춘천부사 자리가 비어 조정에서 모두 그를 추천하였으나 극력 사양하다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부임하였다. 마침 큰 흉년이 들었는데 관전(官錢)을 내어 쌀을 팔아 백성들을 급히 구제하였다. 그 후 10여 년 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849년(헌종 15) 가선대부에 올랐고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었다.
 이듬해 1850년(철종 1) 개성부 유수(留守)를 제수받았는데, 이때 개성인삼을 가지고 홍삼을 만들어 팔던 당시 역인(驛人)들의 포소(包所 : 개성인삼을 쪄서 홍삼을 만들던 곳) 세(稅) 포탈을 엄히 다스렸다. 1852년(철종 3) 승정원 좌승지 · 동지경연 · 의금부 춘추관사를 제수받고 1854년에는 호군 · 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 ·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1856년(철종 7)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전 병사 이근영(李根永)의 탐학(貪虐)을 탄핵하였다. 1864년(고종 1) 지종정경부사(知宗正卿府事)가 되고 다시 대사헌 · 좌참찬 ·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865년(고종 2) 이조판서 · 홍문관 제학 · 예문관 제학 · 동지 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1866년 특지(特旨)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이 해 병인양요로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 강화에 들어오자 조정에 나가 경계를 엄히 하고 외인을 물리치라고 상소했다. 강화진이 점령되자 울분에 못이겨 유소(遺疏)를 남기고 아우 군수 지원(止遠)과 함께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저서로 시문 10권과 <고금서초(古今書쿘)> 100여 권, <야사초(野史쿘)> 몇 권이 후손에 의해 소장되어 있다. 편서(編書)로는 <정주도회과작(定州都會科作)>이 있다.
 배위는 안동권씨 구(球)의 딸과 양주조씨 학규(學逵)의 딸과 청송심씨 관(館)의 딸이다.
 묘소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시항(時沆) 1678∼ 1739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태초(太初), 함풍군의 6대손이며 춘성(春成)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 생원시 에 급제하고,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 병과에 합격하여 도사(都事) ·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배위는 안동권씨 병상(秉常)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竹山) 유좌에 있다.
억기(億祺) 1561∼159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경수(景受), 호는 송봉(松峯), 시호는 의민(毅愍). 신종군의 손자 심주군(沁州君) 연손(連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용맹하여 찬탄을 받았다. 17세 때 사복시 내승(內乘)이 되었고 그 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여 북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을 도와 옥포 · 당항포 · 한산도 · 안골포(安骨浦) · 절영도(絶影島) ·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적의 병선을 대파, 제해권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596년(선조 29)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준비를 지원하는 한편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무고로 투옥되자 이항복 ·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그의 무죄를 주장, 구명에 앞장섰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통제사 원균의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 좌익군을 지휘 용전하다가 칠천량(漆川梁)싸움에서 크게 패해 원균,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선무공신 2등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으로 추봉되었다. 1600년(선조 33) 순천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억상(億祥) ? ∼ ?    파명:덕천군(德泉君)
  신종군의 차남인 신곡수(薪谷守)의 손자이다. 자는 경안(景安). 1543년(중종 38) 진사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감사·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사신으로 중국 연경에 가다가 별세했다.
 배위는 윤봉종(尹奉宗)의 딸이다.
억손(億孫) 1497∼153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대춘(大春), 덕천군의 현손이며 완성군의 손자이고 상산군의 장남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 양과에 급제하고, 1522년(중종 17) 식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한림직학(翰林直學)을 거쳐 황해감사에 이르렀다. 증 이조판서가 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전주황씨로 준(濬)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 산54의 9에 있다.
연경(演經) 1791∼185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계문(季文), 형윤(衡尹)의 4남이며 경윤(卿尹)의 조카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시 병과에 급제, 현감을 지내고 통훈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창녕조씨 윤엽(允燁)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서석산 건좌이다.
우성(羽成) 1641∼169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의경(義卿), 호는 석암(石庵). 영상 경석(景奭)의 손자이다. 진사시에 장원하여 정랑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결독행(高潔篤行)\'이라는 말을 들었다. 원종(原從)에 녹훈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진안(鎭安)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모혜사(慕惠祠)를 세워 매년 제향했다.
 배위는 동래정씨 이화(以和)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동천리 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