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대군파 약사

안창대군


휘는 매불(梅拂)이고,목조대왕의 제5남으로서 효공왕후 평창이씨에게서 탄생 하였다. 고려 때에 출사하여 벼슬이 행 예빈시 직장(行禮賓寺直長)이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정의대부(正義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증직되었다.

또한 1872년(고종 9) 7월 16일에 영희전(永禧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릴 때에 대군(大君)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에 추봉되고 4세손은 습봉(襲封)되어 군(君)에 추증되었다.

대군의 묘단(墓壇)은 함경남도 흥남시 운성리(雲城里) 연곶동(燕串洞)에 있고 신원(辛原) 이다. 묘단 국원(局原)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자헌대부 행 공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 의금부 사오위도총부 도총관 인고(寅皐)가 찬(撰)하였다. 이 신도비문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후사가 있다(有德者必有後)는 말을 들었더니 이를 두고 여기에서 공의 덕이 훌륭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에 병란을 겪으므로 말미암아 배위의 산소까지 도 잃어버렸으므로 제단을 봉하여 제를 지내고 신도비를 세웠다. 그 후에도 후손들이 서로 의논하여 그 뜻을 모아 대군의 신도비를 다시 세우고 단과 비각을 설치한 후 매년 제향을 올렸다.

방손 진사 면하(冕夏)가 대군의 덕을 기려 비문에 쓰기를, “선원(璿源) 리씨 옛 집안에 대군께서는 높은 벼슬이었도다(璿李古家大君崇爵). 유풍(遺風)은 돈목함이 있었고 덕의 베풂을 넓게 베풀으셨네(風有敦睦德施宏博). 성왕(聖王)의 은총과 덕택을 후손들이 흠모하여 받드는 구나(聖王 恩澤後生欽恪). 추모의 마음은 정성을 다하여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짓네(追感徵誠竪碑營閣).” 라고 하였으니 1900년(광무 4) 10월 11일이었다.

조상 대대로 우리 선조들은 공덕이 있는 이를 추모하여 반드시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그 공과 덕에 보답하고자 함이었으니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완풍리에 모신 대군의 사우(祠宇)는 후손들이 모여 대군의 덕을 기려 경모의 마음을 갑절 일으키게 한 곳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동오리에 모신 육현사(六賢祠)는 임진왜란 공신인 증참판 일남(一男) 외 5인을 배향하는 곳이다.

대군의 후손들은 함경남도 함흥을 중심으로 한 50리 이내의 지역에 주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며 대대로 학문하는 자세를 지키면서, 이를 처신하는 요체로 삼아왔으며, 또한 국난을 당하여서는 우국진충으로 보국하였다.

이곳은 곧 풍패(豊沛)의 옛터이고, 대대로 살던 곳이라 선원(璿源)의 본손과 지손들이 번창하여 오래도록 내려온 곳이다. 이것은 500여 년 동안 성상(聖上)의 종족돈목의 아름다운 덕에 기인한 것이다.

대군의 후손들은 “덕이 성한 사람은 복을 누림이 반드시 풍성하여 생사에 간격이 없고(德盛者 享福必豊 無間存沒), 효도가 지극한 사람은 어버이를 높임이 큰 것이므로 마땅히 글(文)을 다할 것. (孝至者 尊親爲大 宜極情文)"이라고 한 선조들의 교훈을 지금껏 실천하고 있다. 향리에서 1860년 이래 이어져 오던 종 사가 1950년 6·25전쟁 이후 남과 북으로 갈리는 상황에서 지금은 어떤 실정인지 알 길이 없어 월남한 후손들은 이 일을 안타깝게 여겨 안창대군 후손들의 각 지파에서는 1970년도부 터 전국에 산재한 종원들과 종회(宗會)를 재정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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