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군파 약사

밀성군


세종대왕의 5남으로 어머니 신빈(愼嬪) 청주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은 세조대왕이 등극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며 즉위한 후에는 정국을 자문하는 등 국정에 참여하다가 1467년(세조 13)에 의금부 도위관(都委官)을 지냈다. 또한 예종대왕 때에는 임관을 마다 하였고 성종대왕은 공의 많은 공을 인정하여 2등공신에 책훈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별세하였다.

밀성군은 운산군(雲山君) · 춘성군(春城君) · 수안군(遂安君) · 석양군(石陽君)의 4남을 두니, 여기에서 밀성군파의 계보를 형성하여 왕실의 종친으로서 종묘사직 수호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밀성군의 장남 운산군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대왕을 옹립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또한 1617년(광해군 9)에 폐모론에 반대한 수록(綏祿)과 함께 그의 장남 경여(敬輿)는 인조반정 후에 입경하여 사간원 헌납 · 이조좌랑 · 한학교수를 역임하다가 1623년(인조 2)에 사인으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 강화를 극력 반대하며 도성사수를 진언하고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등 척화파로서 두 차례의 억류와 유배 및 강등을 당하는 등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북벌계획에 힘을 다하였다.

숙종 때에 노론4대가인 이명(?命)은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옥사(甲戌獄事) 등의 정쟁으로 유배와 복직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시대의 정국을 이끌었다. 후에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에 성주로 압송 도중 한강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노론4대가인 건명(健命) 또한 이 당시 세제(世弟)책봉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등 소론과 맞서 정국을 이끌다 유배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이와 같이 당시 정국을 둘러싼 사화에 연루되어 사명(師命) · 관명(觀命) · 언지(彦之) · 희지(憙之) 등은 유배되거나 옥중에서 장살당하였고 삭탈관직되었으나 후에 신원되었다.

이와 같이 밀성군의 자손들은 광해군의 실정과 인조반정, 연산군의 음학과 중종반정을 겪으면서 숙종 때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계속되어 왔던 사화의 격랑 등 정치적인 상황에서 정국을 이끌면서 종묘사직을 수호했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나라를 다시 찾고자 한 후손들이 있었는데, 창호(昌鎬) · 건호(建鎬) · 중각(重珏) 등의 후손들이다.

밀성군의 후손 가운데 성록(成祿)을 비롯하여 약 40여 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각계 각소에서 맡은 임무를 다하였으며, 근현대로 들어와서는 고시에 합격한 종원도 많고 여러 종원들이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문과 그림 및 글씨 등 예능방면에서 유명한 후손으로는 경여(敬輿) · 인상(麟祥) · 건명(健命)이 있다. 특히 건명은 송설체(宋雪體)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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