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파 약사

영산군


諱는 恮 字는 公謹 諡號는 忠僖이시며 朝鮮國 第九代王이신 成宗大王의 第十三男이시다.
成宗大王 二十一年 庚戌(一四九ㅇ年)四月十三日에 出生하시니 곧 朝鮮初 名臣靑城伯 安定公 德符의 後裔이신 淑容沈氏의 所生이시다. 公께서는 태어나시면서 부터 남다른 資質을 지니셨으니 儀表는 淸秀하시고 度量은 넓으셨으며,忠孝는 하늘이 내신것이었다. 사람 대하심에는 매우 溫柔하셨으니 宗族은 和睦으로 사랑하시며 誠과信을 다하셨고,아래 사람에게는 慈愛 와 親切을 베푸셨다.文과武에 아울러 뛰어나셨을뿐 아니라 性稟 또한 매우 豁達 하셨으며 특히 相馬와 治馬에는 남다른 깊은才能을 지니셨으니,그때 사람들이 神人이라 일컬었다. 兄인 燕山主는 그 末年 荒亂함과 淫酷함이 날로 더해가니 宗室至親도 그身命을 保全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公은 才智와 學問을 안으로 숨기며 모든일에 삼가 處하시어 그禍를 能히 피하셨으니 참으로 賢明하시고 思慮가 깊으신 君子이셨다.

公은 兄이신 회산군(檜山君) 및 몇몇 重臣들과 宗社回復을 위한 隱密하고도 重大한 計劃을 세워. 中宗反正을 거사하시어 중종께서 寶位에 오르시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忠誠과 有能하심을 시기한 邪惡한 소인배들의 謀陷을 받게 되셨다 議政府의 한 官奴가 朴永文 辛充武 등이 반란을 꾀한다고 密告하는 말 가운데에 公을 推戴하려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결국 公께서는 紛紛한 朝議에 몰려 中宗大王 十八年 九月에 황해도 白川 땅으로 거처를 옮기시게 되셨다. 이후 四年餘에 걸처 많은 苦楚를 겪으셨다.

中宗大王 二十二年 李弘幹이 經筵에 들었을 때, 世宗大王께서 讓寧大君을 放免하신 옛일을 들며 公의 釋放을 進言하니 대왕께서는 「寧山의 해를 꿰뚫는 忠誠은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라」 하시고 그해 十一月 放還케 하셨다. 그후 公 께서는 서울을 벗어나 北漢山 麓 津寬寒村으로 나오시어 水石之間에서 琴書와 더불어 悠悠自適 하시다가 世上을 마치셨다. 곧 中宗大王 三十三年 戊戌(一五三八年) 六月十一 日 이였으니 享年이 四十九이셨다.

中宗大王을 輔弼하여 한손으로 하늘을 떠받쳐 宗社을 回復케 하셨으니 그 忠은 천하에 빛나는 것이였으며 母夫人의 喪을 當하셔서는 禮대로 服喪을 하시어 거의 몸이 毀損하게 되셨으니 그 孝는 참으로 남의 模範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恒常 子孫들을 訓戒하여 말씀 하시기를「孝悌에 힘쓸것이요 名利를 취하는데 急急해서 는 아니된다」 하시며 善을 行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셨다.

첫째부인은 贊成 沈順路의 따님이시니 두딸을 두셨고 다음은 贊成 鄭弘先의 따님이시니 자녀가 없으셨고 다음은 主簿 黃澄의 따님이시니 四男三女를 두셨다.
長興君 祥은 둘째이시나 奉祀토록 하였으며 銀川君 禎 陰城君 裕 梁山君 祿 이 그 四君 이시다 . 四君의 孫은 十五君 이시고 曾孫은 三十七君 이시다.

母夫人이신 靑松沈氏(淑容沈氏)는 조선왕조 第九代 成宗大王의 後宮으로서, 利城君, 寧山君 두 王子와 慶順, 淑惠 두 翁主를 두시었다. 서기 1465年(세조 11年, 乙酉)에 出生하시어 1515年(중종 10年, 乙亥) 11월 16일에 卒하시니 享年이 51歲이셨다. 이어 서울 근교에 禮葬을 하였으나, 어느덧 墓所와 墓碑를 失傳하기에 이르렀다.
그 오랜 歲月을 두고 찾았으나 모두 水泡로 돌아갔다. 推測컨대, 임진왜란時에 窃發之變을 당한 듯하다. 그러던 차 千萬 意外로 이국땅인 일본국 동경도 港區 赤坂에 있는 작은 공원서 부산일보 東京지사장 최성규 선생(한·일 역사공동연구학 회장)에 의해 墓碑와 이에 부수되는 듯한 石物 等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에 墓碑 발견이라는 소식을 접한 이성군파와 영산군파의 두 파종회는 [숙용심씨묘비환원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우선 墓碑 還元을 요청코자 이에根據가 될 옛 문헌과 고증자료 등을 整備하여 2000년 4월 18일 후손인 采元고문과 明九파종회장이 渡日하여 東京 港區 區役所를 방문하여 一切의 證憑資料를 제출하고 墓碑의 還元을 要請하였다.

400여년이 지난 只今에 와서 일본정부인 區役所를 상대로 환원을 요청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朝鮮王朝實錄등 확실한 입증자료와 墓碑가 있어야할 正當한 場所, 그리고 후손들의 懇切한 所望을 알리고 駐日 韓國大使館의 協助 等으로 港區로부터 반환의 確約을 받았다. 동년 6월 16일 다시 후손들 네분이 渡日 日本區役所 區長과 관련 공무원, 구의원, 駐日 韓國文化院長, 內·外信 기자가 참석한 자리에서 墓碑환원에 따른 목록을 수령하고, 오후에는 공원에 가서 告由의 儀式을 정중히 올리고 묘비를 해체·포장하였다. 이어 묘비는 7월3일 그렇게도 그리시던 古國에 돌아오시었다. 귀국한 묘비는
묘의 실전된 상황 및 파종회의 자금관계상 일시적으로 淑容沈氏의 작은아들인 寧山君묘역 근처에 예와 정성을 다하여 모시었으나 유리관으로 된 초라한모습으로 후손들은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세월를 보냈다.
그후 寧山君派宗會는 기존위치에 公의 母夫人이신 靑松沈氏(淑容沈氏) 묘표 비각건립을 계획하고 준비하여, 서울시의 문화재 차원의 지원을 받아 洪九종손과 파종회장 武珩을 비롯한 집행부 및 종원들의 적극적인 사업추진으로 2020년도에 靑松沈氏 묘표 비각공사의 준공을 보았다. 이로서 淑容壇이 조성된 것이다 그곳은 현재의 진관동 203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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