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파 약사

경평군


선조대왕의 11남으로 평생 곧은 성품과 근신하는 태도로 임하여 정국의 대소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왕실의 안위를 위하여 전심을 다하였다. 경평군은 4남을 두었으니 영양군 · 영흥군 · 영주군 · 영림군인데, 여기에서 비롯하여 경평군의 자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경평군은 생졸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연산군과 인조대왕을 포함하여 5왕조에 걸쳐서 살아오는 동안 폐위된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여파로 영창대군(永昌大君), 진릉군(晋綾君), 능창군(綾昌君)이 피살되고 포형(胞兄) 흥안군(興安君)과 중형 인성군(仁城君)이 차례로 살해되는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이와 같이 안으로는 정치적인 격변과 함께 밖으로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공은 생과 사의 촌극과 부귀공명의 부질없음 등을 느끼고 스스로 산수를 유람하면서 왕자로서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자적하고 학문수양에 힘썼다. 경평군의 장남 영양군(嶺陽君) 또한 인조 · 효종 · 숙종의 혼란기에 나라의 어려운 일을 잘 수행하였다. 한편 택수(澤遂) · 양수(養遂) · 회수(會遂)는 정조대왕의 등극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의 역모에 연루되어 1777년(정조 1) 택수는 복주되고, 양수 · 회수는 추자도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경평군파 역시 다른 계파와 마찬가지로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소임을 다하는 가운데 피화(被禍)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손에 언형(彦衡) · 언희(彦熙) · 택수 · 양수 · 회수가 있으며 근현대 인물 가운데에는 공학박사 1명과 의학박사 3명이 있다.


종원 분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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