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대군파 약사

능원대군(1598∼1656)


의안군(義安君) 성(珹 : 1577∼1588)의 계자(繼子)이다. 의안군은 선조대왕의 3남으로 인빈(仁嬪) 김씨 소생이다. 의안군이 12세로 혼인도 하기 전에 요절했으므로 왕의 특명으로 원종대왕의 차남인 능원대군이 후사를 잇게 됐다. 그래서 능원대군파를 의안군파라고도 한다. 그러나 <선원강요> 등에 능원대군파로 4세 일람이 기록되어 있어 편의상 능원대군파라 표제(標題)한다.

능원대군의 휘는 보(?)요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담은당(湛恩堂)이다.

인조대왕의 아우로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성천(成川)에 피난가 있을 때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 능성구씨이다. 11세 때 백부 의안군에게 입양되어 능원군이 되고, 1632년(인조 10)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했고, 명나라 황제가 패망하자 문을 닫고 곡하며 오래도록 침식을 폐하기도 했다. 후에 심기원(沈器遠 : ?∼1644)의 역모를 처리하는 데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시호는 정효(貞孝), 인조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위는 문화류씨와 영암김씨인데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이 다섯 아들에서 손자가 20명, 증손이 45명으로 번성하여 오늘날의 능원대군파를 형성하고 있다.

능원대군의 아들 중 차남 영은군(靈恩君) 함(涵 : 1633∼1700)은 거문고의 명수이고 그림을 잘 그리며 특히 화조(花鳥)에 뛰어났다. 증손 안풍군(安豊君) 영(火永 : 1719∼1770)은 외우기를 잘하여 나라의 고사(故事), 충신 간신의 진퇴, 유학(儒學)의 시비(是非), 사화(士禍)의 내용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씨족의 역사에 밝아 13개 성의 족보를 만들기도 했다. <상례고증초기(喪禮考證抄記)>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공의 손자 복현(復鉉 : 1767∼1823)은 음직으로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는데 시의 대가로 추앙을 받았으며 <시초(詩抄)> 2권을 남기기도 했다.

능원대군 후손 중에서 문과급제는 세익을 비롯하여 돈응(敦應 : 1812∼1892) · 후달(厚達 : 1714∼1821) · 제익(濟翼 : 1767∼1833) · 현지(顯址 : 1733∼1756) · 후규(厚圭 : 1705∼1784) 등 6명을 배출했고, 관직으로는 판서 이하 목사(牧使) · 부사(府使) · 병사(兵使) · 승지 · 군수 ·교리 · 정언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 현감을 지낸 이가 제일 많다.

현대인물로는 진용(珍鎔 : 1920∼ )이 국회의원을 지냈고, 그의 아우 석용(奭鎔 : 1930∼ )이 국회 한일의원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우리 현대 연극계의 태두였던 해랑(海浪 : 1916∼1989)이 예술원 회장을 지냈으며, 그의 장남 방주(邦柱 : 1943∼ )가 현대자동차 부사장으로 있다. 그리고 길용(吉鎔 : 1942∼ )은 국가정보원 연구관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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