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릉군(慶陵君) 1403∼1468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수의(守義). 밀은군의 4남이다.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학문이 해박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문과로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사육신묘에 배알할 때 술회하기를, “일배경뢰육령신(一杯敬?六靈神)하니 일월당당대의신(日月堂堂大義伸)이라. 지한차신유미조(只恨此身猶未早)하야 당년구절반거인(當年九折返車人)이라.” 하고 또 읊기를, “천지상심객(天地傷心客)이 남호채백빈(南湖採白?)이라. 정령초부득(精靈招不得)하니 독립고강빈(獨立苦江濱)이라.” 하였다. 벼슬길에 뜻이 없어 시골에 은거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경릉군 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사전동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해남김씨로 진사 길(吉)의 딸이다. 묘소는 부좌(쯊左)이다.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학문이 해박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문과로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사육신묘에 배알할 때 술회하기를, “일배경뢰육령신(一杯敬?六靈神)하니 일월당당대의신(日月堂堂大義伸)이라. 지한차신유미조(只恨此身猶未早)하야 당년구절반거인(當年九折返車人)이라.” 하고 또 읊기를, “천지상심객(天地傷心客)이 남호채백빈(南湖採白?)이라. 정령초부득(精靈招不得)하니 독립고강빈(獨立苦江濱)이라.” 하였다. 벼슬길에 뜻이 없어 시골에 은거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경릉군 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사전동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해남김씨로 진사 길(吉)의 딸이다. 묘소는 부좌(쯊左)이다.
경의군(慶義君) ? ∼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수인(守仁). 밀은군의 3남이다.
문과로 충청감사를 역임하고 세조 때에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872년(고종 9)에 경의군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청석동 자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진주강씨로 묘소는 합폄이다.
문과로 충청감사를 역임하고 세조 때에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872년(고종 9)에 경의군지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청석동 자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진주강씨로 묘소는 합폄이다.
밀양군(密陽君) 1357∼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난(蘭), 자는 백형(伯馨), 호는 청헌(淸軒),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영성대군 천계(天桂)의 장남이다.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고 1377년(고려 우왕 2) 별시에 급제하여 한주(翰注)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개국 후 원종공신에 수록,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1872년(고종 9) 임신년에 밀양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금릉(金陵) 계좌(癸坐)이고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배위 부부인 파평윤씨는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고 묘소는 동원이다.
영성대군 천계(天桂)의 장남이다.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고 1377년(고려 우왕 2) 별시에 급제하여 한주(翰注)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개국 후 원종공신에 수록,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1872년(고종 9) 임신년에 밀양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금릉(金陵) 계좌(癸坐)이고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배위 부부인 파평윤씨는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고 묘소는 동원이다.
밀은군(密恩君) 1359∼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섭(攝), 호는 신혜당(愼慧堂).
영성대군 천계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부부인 밀양박씨로 판부사 종건(宗健)의 딸이다.
문과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간쟁지절(諫諍之節)이 있었다. 1457년(세조 3)에 육종영(六宗英)의 충성을 누차 상소하여 직간하다가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872년(고종 9)에 밀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장흥위씨(長興魏氏)로 2남을 두었다. 묘소는 함흥 후주동 사봉하 간좌이다. 배위 현부인 경주김씨는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태어나 1434년(세종 16)에 별세했다. 3남을 두었다. 묘소는 밀은군과 합폄이다.
영성대군 천계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부부인 밀양박씨로 판부사 종건(宗健)의 딸이다.
문과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간쟁지절(諫諍之節)이 있었다. 1457년(세조 3)에 육종영(六宗英)의 충성을 누차 상소하여 직간하다가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872년(고종 9)에 밀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임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장흥위씨(長興魏氏)로 2남을 두었다. 묘소는 함흥 후주동 사봉하 간좌이다. 배위 현부인 경주김씨는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태어나 1434년(세종 16)에 별세했다. 3남을 두었다. 묘소는 밀은군과 합폄이다.
밀춘군(密春君) 1367∼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척(陟). 영성대군의 3남이다.
태종대왕 잠저시에 동갑계원 21인 중의 한분이다.
태종대왕 즉위 후에 20인의 찬(贊)을 어제(御製)하니 공을 칭송하기를, “오동숙기(吾東淑氣)가 육종현자(毓鍾賢姿)로다. 온순회기(溫醇恢器)요 양확풍의(良確風儀)로다.”라고 하고, 또 어제시에 가로되, “한봉이팔대공신(漢封二八大功臣)하니 창업당년뇌차인(쾍業當年賴此人)이라. 금오갑계유삼칠(今吾甲契惟三七)이니 삼각산붕의불민(三角山崩誼不泯)이라.” 하였다. 20인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고 호조판서를 제수하였다.
묘소는 고원 가동 동산(高原 ?東 東山) 자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한양조씨로 돈(敦)의 딸이고 묘소는 합폄이다.
태종대왕 잠저시에 동갑계원 21인 중의 한분이다.
태종대왕 즉위 후에 20인의 찬(贊)을 어제(御製)하니 공을 칭송하기를, “오동숙기(吾東淑氣)가 육종현자(毓鍾賢姿)로다. 온순회기(溫醇恢器)요 양확풍의(良確風儀)로다.”라고 하고, 또 어제시에 가로되, “한봉이팔대공신(漢封二八大功臣)하니 창업당년뇌차인(쾍業當年賴此人)이라. 금오갑계유삼칠(今吾甲契惟三七)이니 삼각산붕의불민(三角山崩誼不泯)이라.” 하였다. 20인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고 호조판서를 제수하였다.
묘소는 고원 가동 동산(高原 ?東 東山) 자좌이다.
배위는 현부인 한양조씨로 돈(敦)의 딸이고 묘소는 합폄이다.
영성대군(永城大君) 1333∼1392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천계(天桂), 자는 순흠(順欽), 호는 석천(石川),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고려조에 추밀(樞密)이요, 발란건공(撥亂建功)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성리학이 심오하여 포은(圃隱) · 야은(冶隱)과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되어 경리(經理)를 강론하고 왕복창수(往復唱酬)하니 학덕이 세상에서 우뚝했다.
1392년(태조 원년)에 별세하자 태조고황제는 매우 슬퍼하고 좌찬성을 추증하고 제수를 하사하였으며 부조묘를 명하였다.
1871년(고종 8) `효민(孝愍)\'으로 사시(賜諡)하고 임신년에 영성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함흥 주동사 축전동(州東社 木丑田桐) 자좌인데 비석이 있다. 고종 3년에 신도비를 개수(改竪)하니 좨주(祭酒) 금곡(錦谷) 송래희(宋來熙)가 신도비명을 지었다. 세덕사(世德祠)에배향되었다.
배위 부부인 밀양박씨는 판부사 종건(宗健)의 딸이다. 묘소는 함흥 주북사 후주리 가마동 자좌이며 비갈이 있다.
고려조에 추밀(樞密)이요, 발란건공(撥亂建功)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성리학이 심오하여 포은(圃隱) · 야은(冶隱)과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되어 경리(經理)를 강론하고 왕복창수(往復唱酬)하니 학덕이 세상에서 우뚝했다.
1392년(태조 원년)에 별세하자 태조고황제는 매우 슬퍼하고 좌찬성을 추증하고 제수를 하사하였으며 부조묘를 명하였다.
1871년(고종 8) `효민(孝愍)\'으로 사시(賜諡)하고 임신년에 영성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함흥 주동사 축전동(州東社 木丑田桐) 자좌인데 비석이 있다. 고종 3년에 신도비를 개수(改竪)하니 좨주(祭酒) 금곡(錦谷) 송래희(宋來熙)가 신도비명을 지었다. 세덕사(世德祠)에배향되었다.
배위 부부인 밀양박씨는 판부사 종건(宗健)의 딸이다. 묘소는 함흥 주북사 후주리 가마동 자좌이며 비갈이 있다.
완창대군(完昌大君) 1305∼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자흥(子興), 자는 성첨(聖瞻), 호는 취헌(翠軒),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도조대왕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경순왕후 박씨이다.
고려 충렬왕 을사생으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에게 수학하니 천부영예(天賦英睿)하여 개연히 제세안민지지(濟世安民之志)가 있었다.
원나라 천호직(千戶職)을 승습하고 고려조에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태조고황제 등극 후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1871년(고종 8) 3월 9일에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1872년 12월 4일에 완창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고 부조묘(不?廟)를 명하였다. 부조묘는 함흥 귀주동에 있다.
남북이 분단되어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세덕사(世德祠)를 창설, 매년 양력 4월 12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위 부부인 한양조씨는 좌윤 숙(淑)의 딸이고 묘소는 동원(同原)이고, 부부인 청해이씨의 묘소도 동원이다.
도조대왕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경순왕후 박씨이다.
고려 충렬왕 을사생으로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에게 수학하니 천부영예(天賦英睿)하여 개연히 제세안민지지(濟世安民之志)가 있었다.
원나라 천호직(千戶職)을 승습하고 고려조에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태조고황제 등극 후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1871년(고종 8) 3월 9일에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1872년 12월 4일에 완창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고 부조묘(不?廟)를 명하였다. 부조묘는 함흥 귀주동에 있다.
남북이 분단되어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세덕사(世德祠)를 창설, 매년 양력 4월 12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위 부부인 한양조씨는 좌윤 숙(淑)의 딸이고 묘소는 동원(同原)이고, 부부인 청해이씨의 묘소도 동원이다.
파성군(坡城君) 1411∼1456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사철(思哲), 자는 성지(誠之), 호는 문안(文安).
밀양군의 3남이고 어머니는 부부인 파평윤씨로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고,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 부수찬에 승진되었다.
1442년(세종 24)에 장령 · 집의를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1443년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1447년(세종 29) 좌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선원록><종친록>을 개수하였다.
1450년(세종 32)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에 예조판서 · 이조판서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세조대왕)이 단종대왕의 보좌세력인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제거하는 이른 바, 계유정란에 가담하여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찬성으로서 함길도(함경도)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주현 연혁의 편리 여부를 살펴보았다.
단종대왕이 수양대군에게 손위시 수선(受禪)하는 일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세조대왕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승계되고 좌익공신 2등이 되었으며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872년(고종 9)에 파성군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공은 체격이 크고 음식을 많이 들기로 유명했다고도 한다.
묘소는 양주 발산 가마동 자좌원이고 세덕사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부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찬성 예(睿)의 딸이다. 묘는 합폄이다.
밀양군의 3남이고 어머니는 부부인 파평윤씨로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고,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 부수찬에 승진되었다.
1442년(세종 24)에 장령 · 집의를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역임하고 1443년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1447년(세종 29) 좌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선원록><종친록>을 개수하였다.
1450년(세종 32)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에 예조판서 · 이조판서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세조대왕)이 단종대왕의 보좌세력인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제거하는 이른 바, 계유정란에 가담하여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찬성으로서 함길도(함경도) 도체찰사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주현 연혁의 편리 여부를 살펴보았다.
단종대왕이 수양대군에게 손위시 수선(受禪)하는 일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세조대왕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승계되고 좌익공신 2등이 되었으며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872년(고종 9)에 파성군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공은 체격이 크고 음식을 많이 들기로 유명했다고도 한다.
묘소는 양주 발산 가마동 자좌원이고 세덕사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부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찬성 예(睿)의 딸이다. 묘는 합폄이다.
파천군(坡川君) 1404(태종 4)∼ ? 파명:완창대군(完昌大君)
 휘는 사명(思明), 자는 회지(晦之), 호는 무일(無逸) 또는 오은(梧隱).
밀양군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부부인 파평윤씨로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다.
문과로 호조판서 및 좌찬성을 역임하고 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1872년(고종 9)에 파천군지종정경(知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금릉(金陵) 선영하이다.
배위는 군부인 진주류씨(晋州柳氏)로 참판 담룡(潭龍)의 딸이고 묘는 합폄이다.
밀양군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부부인 파평윤씨로 제학 사우(師愚)의 딸이다.
문과로 호조판서 및 좌찬성을 역임하고 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1872년(고종 9)에 파천군지종정경(知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금릉(金陵) 선영하이다.
배위는 군부인 진주류씨(晋州柳氏)로 참판 담룡(潭龍)의 딸이고 묘는 합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