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릉수(江陵守) 1549∼1621    파명:희령군(熙寧君)
  강릉수(江陵守) [1549(명종 4)∼1621(광해군 13)]
 휘는 응하(應賀), 자는 경숙(慶淑), 호는 구암(龜岩).
 금계부정(錦溪副正)의 5남이고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올랐다.
 배위는 해주오씨 호조판서(戶曹判書) 수천(壽千)의 딸이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대탄(大灘) 간좌(艮坐) 쌍분(雙墳)이다. 지명(誌銘)은 판서(判書) 오숙(吳?)이 찬(撰)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놓아하고 호쾌(豪快)하여 문장(文章)이 당세(當世)에 소문이 나고 문집(文集)이 20여 권 있었으나 병화(兵火)에 소실되고 단 한권이 오늘에 전한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2남 의필(義弼)은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土)요, 4남 석필(碩弼)은 절충장군(哲衝將軍)이다.
곡강도정(曲江都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희령군의 3남이며 휘는 계(?), 곡강도정(曲江都正)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달성서씨로 생원(生員) 일민(逸民)의 딸이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일선부정(一善副正) 은손(銀孫)이고 배위는 파평윤씨 진사(進士) 인우(仁佑)의 딸이다.
 무육(無育)으로 묘소는 불명(不明)이고 딸은 단양우씨 남양(南陽)에게 출가하였다.
금계부정(錦溪副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종(淙), 명선대부(明善大夫)이며 화성군(花城君)의 3남이고 희령군의 손자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의 딸과 안동권씨 판서(判書) 응린(應麟)의 딸이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오곡에 간좌에 안동권씨와 합폄(合킋)이고 무육(無育)인 청주한씨는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간좌에 있다.
 6남을 낳으니 흥강수(興江守) 실하(實賀) · 영천수(寧川守) 국하(國賀) · 금릉수(錦陵守) 흥하(興賀) · 청릉수(靑陵守) 수하(壽賀) · 강릉수(江陵守) 응하(應賀) · 춘강수(春江守) 영하(永賀)이다. 금계부정의 자손이 현재 양평, 곡성, 순창 등지에 분포되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다.
금릉수(錦陵守)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흥하(興賀),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올랐다.
 금계부정(錦溪副正)의 3남이며 배위는 신부인(愼夫入) 고령신씨로 사의(司議) 번(繁)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배천군수 극관(克寬)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고위(考位) 우록(右麓) 합폄(合킋)이다.
덕원부령(德原副令)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덕손(德孫), 후령군의 증손이며 암성수 윤(綸)의 손자이고 지산부령 돈(墩)의 장남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광산김씨로 정신(鼎臣)의 딸이다.
 공은 바둑의 명수이기에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응원군을 이끌고 나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 ?∼1598)과 대국(팲局)했다 한다. 야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와서 말을 뜰에 매어 놓는다. 공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저는 시골의 군인으로 번(番)을 들러 왔는데 평생에 바둑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듣자니 어르신께서 국수(國手)라고 하니 한판 두어 볼까 합니다.”하였다. 이어 공이 곧 허락하되 말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 군인이 져 말을 바치고 갔다. 몇달이 지나 그 사람이 다시와서 다시한번 바둑을 두자하니 공이 허락했다. 몇판을 두었으나 공이 도저히 이길수가 없어 놀라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적수가 아니니 저 말을 도로 가져 가라.”하였다. 그러면서 “그런데 저번에 어째서 졌는가?”하니 그 사람이 웃으면서 답하기를 “저는 천성적으로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번을 드느라고 서울에 왔으니 말이 반드시 영양실조가 될 것이고, 또한 그 말을 의탁시킬 곳이 없어 제가 잠깐 잔 꾀를 어르신을 속였사오니 황송합니다. 용서하십시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은 속은 것을 한탄했다.
덕은감(德恩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종(種), 호는 이제제(夷齊齋), 인천부수(仁川副守)의 차남이며 명선대부(明善大夫)이다.
 배위는 능성구씨 겸(謙)의 딸이다. 단종대왕의 손위시(遜位時)와 승하(昇遐)시의 모든 충절 등의 행장은 이제제(夷齊齋)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덕은감실기(德恩監實記)>가 오늘에 전한다.
덕의정(德義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수진(壽眞),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올랐다.
 창원군(昌原君)의 장남이며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경주이씨 목사(牧師) 흡(洽)의 딸이고 묘소는 화성군(花城君) 계하(階下)이다.
성주부정(星州副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유(溜), 화성군(花城君)의 4남이며 배위는 생졸년 등이 미상이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전의이씨 부사 서(恕)에게 출가하였다.
영원정(寧原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희령군의 둘째 아들이며 휘는 배(培), 숭헌대부(崇憲大夫) 영원정(寧原正)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연안김씨로 추(秋)의 딸이다.
 묘소는 희령군 묘소 서록(西麓) 정좌(丁坐)에 합폄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흠(欽)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인천부수(仁川副守)이고 딸은 임지(任沚)에게 출가하였다. 인천부수가 2남 1녀를 낳으니 맏이 화(和)는 창선대부(彰善大夫) 임해령(臨海令)이고, 둘째 종(種)은 덕은감(德恩監)이며 호(號)는 이제재(李齊齋), 증도정이조참의(贈都正吏曹參議)이다.
인천부수(仁川副守)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흠(欽), 희령군의 둘째 아들 영원정(寧原正)의 외아들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수원백씨 판관(判官) 효건(孝乾)의 딸이고 묘는 고위계하(考位階下) 합폄(合킋)이다. 슬하에 창선대부(彰善大夫) 임해령(臨海令) · 덕은감(德恩監) 종(種)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