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곤명군(昆明君) 1471∼150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영(濚), 자는 담수(淡첤). 대군의 증손이며 남천군(南川君)의 아들이다. 공은 대군의 부인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부인이 안아 키웠다.
 1485년(성종 16) 곤명부정(昆明副正)의 봉작을 받고, 1495년(연산군 1) 명선대부로 승계하였다. 공은 천품이 맑고 밝으며 도량이 넓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며 대인접물(待人接物)에 있어 정성을 다하고 노복에게까지 위엄과 분노를 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귀하게 자랐으되 호화로운 생활을 아니 하고 진실한 행동으로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 솜씨가 뛰어났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 307∼365)의 필법을 익히고 화법(畵法)도 오묘하여 특히 난죽(蘭竹)은 진경(眞境)에 이르렀다. 당시의 종실의 문명(文名)이 높은 계성군(桂城君) · 화산군(花山君) · 길안정(吉安正) 등과 망형회(忘形會)를 만들어 시부(詩賦)와 주가(酒歌)로써 즐기니 당대의 문사들이 부러워하여 다투어 교유하였다. 공이 금강산을 탐승하고 <관동행록(關東行錄)> 1권을 지었고 또한 <시부록(詩賦錄)> 1권의 유고를 남기었는데 아깝게도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10월에 예궐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 위독하자 “내가 지금 부모가 구존하신데 이렇듯 병세가 심하니 자식으로서 아주 불효가 되는지라 죽어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노라.” 하고 마침내 11월 21일 별세하니 34세였다. 다음 해 2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갑좌에 예장하였다.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1432년(세종 14) 8세 때 광평대군의 봉작을 받았다. 1436년(세종 18) 12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뛰어난 재질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필독하고 <사서(四書) · 삼경(三經)에 통달하고 <문선> 60권과 당나라의 이백(李白 : 701∼762) · 두보(杜甫 : 712∼770)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 1007∼1072)와 소식(蘇軾 : 1036∼1101)의 문집을 두루 열람하고 더욱 <국어(國語)> 21권과 <좌전(左傳)>에 통달하고 음률과 산수에도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서법도 뛰어나고 강궁(强弓)과 격구(擊毬)에도 능숙하여 전공하는 자도 미치지 못함에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종부시의 일을 총간케 하였다. 세종대왕은 무안대군의 후손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으로 하여금 후사를 명하여 제사를 정성껏 받들고 대부인 왕씨를 극진히 섬겨 충효의 도를 다하였다.
 배위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평산신씨로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구전 설화에 의하면 일찍이 세종대왕은 유명한 관상가를 불러 8대군의 관상을 보았는데 광평대군은 “귀골로서 뛰어난 재질과 복록을 갖추었으나 안타깝게도 장수를 못하고 굶어 돌아갈 상이다.”고 하니 임금은 웃으며 “삼천리 강토가 비록 좁다고 하나 어찌 왕자가 아사하겠느냐.”하고 다른 왕자에 비하여 넓은 땅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한다. 그런데 1444년(세종 26) 12월 식사 때 준치의 가시가 목에 깊숙이 걸려 빼지 못하여 도지고 또한 창진(瘡疹)이 겹쳐 식사를 하지 못하고 동년 12월 8일에 2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대왕은 놀라 슬퍼하며 수라를 끊고 3일 동안 정사를 폐하였으며 저자는 점포의 문을 닫는 등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 영순군이 출생한 지 5개월이 되었다.
 이듬해 1445년(세종 27) 4월에 경기도 광주 학당리에 예장하였으나 1495년(연산군 1) 선릉을 이곳에 모시게 되어 동년 3월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자좌에 옮겨 예장하였다. 묘지명은 대제학 이계전(李季甸 : ?∼1458)이, 신도비명은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 1535∼1587)이 찬하였다.
남천군(南川君) 1458∼151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정(?), 자는 돌지(突之). 대군의 장손이며 영순군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왕손이면서도 겸손하였다. 또한 예의범절이 바르고 예법에 밝아 나라 제향에 여러번 헌관을 하였으며 의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1466년(세조 12) 9세에 중의대부 남천군(南川君)의 봉작을 받았다.
 1472년(성종 3) 승헌대부에 승계하고, 1485년(성종 16) 정희왕후의 수릉관이 되고 이어서 숭헌대부에 제수되고 1486년(성종 17) 가덕대부에 승계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소덕대부에 승계하고, 1506년(중종 1) 중종대왕 등극시 원종훈이 되고, 1519년(중종 14) 3월에 별세하니 향년 62세이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갑좌에 예장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1381∼139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방번(芳蕃), 조선 태조고황제의 제7남으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소생이다. 고려 말에 고공랑(考功郞) 벼슬을 하고 태조고황제가 개국하며, 무안대군의 봉작을 받고 좌군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5년(태조 4) 공이 병환이 났을 때 태조고황제는 사저에 친히 나와 문병을 하였다.
 1396년(태조 5) 신덕고황후가 승하하자 예법에 밝은 공이 집상하기를 고례대로 하여 궁중의 모범을 보여 모두 칭찬하였다.
 1398년(태조 7) 정도전의 난 때 태종대왕은 공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너는 통진(通津)으로 나가 몸을 보전하고 있다가 내 부르면 돌아오라.”하여 양화도에 이르러 유숙하고 있는데, 과잉 충성하는 무리에게 해를 당하니 공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태조고황제는 공의 형제가 화를 입음을 서글피 여기고 자주 산사(山寺)에 거둥하여 불공까지 드리며 명복을 빌었다. 태종대왕도 뜻하지 않게 화를 당한 것을 가엽게 여기고 1406년(태종 6) `공순(恭順)\'의 시호를 내리고 영혼을 위로하였다. (시호는 후에 장혜(章惠)로 고치었음)
 세종대왕은 공의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광평대군으로 하여금 그 후사가 되도록 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에 “은혜로워라 이미 친친(親親)하는 정의가 도타웁고, 예 다워라 입후(入後)보다 중함 없느니, 오직 경은 종척(宗戚)의 높은 지위거늘 불행히도 후사가 없도다. 걱정하노니 외로운 혼령, 어떻게 의탁할꼬. 가엽게 여기는 내 심정 살펴 주시오. 비로소 이제 옛날 글 상고하고서 군호를 증직했느니, 또 광평대군으로서 후사를 삼고 사당을 세워 봉사케 했소. 신하를 보내어 제물을 드리고 특례로써 예우하노니 아아! 영령 길이 계시어 제사 오래도록 누릴지어다.”
 공의 묘소는 태조고황제 전장이 있던 통진에 모셨다가 광주 학당리에 이장하였는데, 이곳에 선릉을 모시게 되어 1495년(연산군 1)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에 이장하였다.
 신도비명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지었다.
영순군(永順君) 1444~147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부(溥), 자는 준지(俊之), 시호는 공소(恭昭). 대군의 외아들이며 출생한 지 5개월만에 부친을 여의자 세종대왕은 가엽게 여겨 왕자의 예와 같게 대하였다. 1451년(문종 1) 8세 때 가덕대부 영순군의 봉작을 받고 1455년(단종 3)에 소덕대부에 승계되면서 풍저창승(豊儲倉丞) 최도일(崔道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니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 최씨(崔氏)이다. 1458년(세조 4) 흥록대부에 승계되었다. 1466년(세조 12) 임금은 공경재보(公卿宰輔)로부터 하급 문신 모두를 궐내로 모이게 하고 손수 시제를 만들어 등준시(登俊試)라 하고 과거를 보려는 뜻 있는 사람은 종친이나 부마일지라도 모두 응시케 하였다. 이는 관직이 높고 봉록이 후함만을 믿고 학문을 소홀히 함을 경계하고 학업을 정려(精勵)하여 문풍을 일으키고자 함이었다. 공도 응시하여 상급 5인 중에 뽑히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 난(亂) 평정의 공으로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에 책정되어 현록대부에 제수되었다. 1468년(세조 14) 임금이 온양에 거둥하여 행재소에서 온양 중시(重試)를 보게 하였는데 공은 또 응시, 장원을 하였고, 임금은 환궁하여 공의 집으로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공의 학식이 높고 임금의 은총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종친 중에 문(文)에는 영순군, 무(武)에는 구성군(龜城君)을 `문무양현(文武兩賢)\'이라 일컬어 왔다. 지금도 창경궁 뜰 안에 `문 영순군, 무 구성군\'이라고 씌여 있는 표석이 서 있다.
 1469년(예종 1) 보사정난익대공신(保社定難翊戴功臣)으로 책정되고 성종 때에는 전조의 예에 따라 출납의 모든 사무와 대전(大典) 수찬(修撰)의 대업을 관장하였다. 1470년(성종 1) 3월 28일 입궐하던 중 감기가 악화되어 귀가하여 갑자기 별세하니 겨우 27세였다. 부음이 궁중에 전해지자 임금은 슬퍼하며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예장범절에 특별히 신경을 쓰도록 명하였다.
 공은 천성이 순수 · 단아 · 총명하여 사리에 밝았으며 교만한 기색이 없이 항상 겸손하고 온공하였다. 두번 대과에 발탁된 후로는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후원에 서재를 세우고 수천권의 서적을 간직하고 공사에서 물러나면 서재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이력사(履歷事)를 초록해서 만든 책이 27권이 되었다. 3조(三朝)에 걸쳐 기밀사를 관장하면서 억울한 일을 처리하는 경우 사리에 밝은 계청(啓請)을 거듭하여 신구(伸救 : 죄없는 사람을 구원함)한 일이 많았다.
 동년 6월 26일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자좌에 예장하였다.

청안군(淸安君) 1462∼149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영(嶸), 자는 미고(彌高). 대군의 손자이며 영순군의 차남이다. 공의 나이 9세 때 아버지 영순군이 별세하자 어머니 김제군부인의 가르침에 도리를 다하고 공도 어머니를 잘 받들어 사람들이 칭송하기를 모자(母慈 : 어머니의 사랑)와 자효(子孝)가 똑같이 지극한 결과라고 하였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할 때 세조대왕이 총애하던 종실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베푼 일이 있어 공도 아우 회원군과 함께 잔치 자리에 나갔다. 일찍이 영순군이 위중할 때 성종대왕이 쟁(?)을 측은히 여겨 회원군(會原君)으로 봉군하였기 때문에 잔치자리에서는 회원군이 윗자리에 앉고 공은 모로 꺾어 아랫자리에 앉자 정희왕후는 “아우가 윗자리에 앉고 형이 아랫자리에 앉는 까닭은 웬일이고?” 묻자 공이 “조정에선 벼슬로써 차례를 정함이 예인 줄로 아뢰오.”하였다. 그 경위를 들은 정희왕후는 즉시로 금대(金帶)를 공에게 내리고 그 자리에서 청안군(淸安君)으로 봉하고 중의대부로 제수한 후 회원군의 윗자리에 옮겨 앉게 하였다. 이러한 영화를 누리던 공은 1495년(연산군 1) 12월에 별세하니 춘추 34세였다.
 다음 해 2월에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건좌에 예장하였다.

회원군(會原君) 1464∼149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휘는 쟁(?), 자는 쟁지(?之). 대군의 손자이며 영순군의 3남이다.
 1470년(성종 1) 3월에 영순군의 병환이 위중하자 성종대왕은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고 “최후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영순군은 “성은이 망극하여 아무것도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하매 성종대왕은 “무릇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반드시 막내둥이에게 있을 것이라.”하고 막내 아들인 공에게 종2품으로 특별 제수하였다. 그 때 공의 나이 겨우 7세로 회원군의 봉작과 중의대부의 품계는 전례에 없는 특전이었다. 공은 슬기롭고 총명하였으며 문학이 숙성하였다. 모부인을 받들 때는 언제나 온화한 표정으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두 형에게는 경애로써 친근하고 소원함이 없이 효우 돈목하였다. 1493년(성종 24) 5월에 3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궁중에 전하니 임금은 슬퍼하며 1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특별 부의를 내렸다. 동년 6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축좌에 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