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파 4세 약사에는 총 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양군(江陽君) 1453∼1499    파명:담양군(潭陽君)
 강양군(江陽君) [1453(단종 1)∼1499(연산군 5)]
 휘는 숙(潚)이며 세종대왕의 손자이다. 생부 계양군은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세조대왕의 아우이다. 어머니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로 인수왕대비의 언니다. 담양군이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세조대왕이 계양군의 차남인 공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다. 3세 때 명선대부를 제수받고 네 임금을 섬기는 동안 열성들의 총애가 깊어 흥록대부로 품계가 1품에 이르렀다. 처음에 세조대왕이 궁중에 있을 때에는 항상 좌우에 같이 있게 하였고 대소 행차에 반드시 따르게 하였다. 특히 종학(宗學)에 나가지 말고 내사부(內師父)를 따라 글을 읽으라 하면서 때로는 친히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가르쳤다. 30세 때에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서거하자 세조대왕릉에 부장하고 신광릉(新光陵)이라 하였다. 그 때 성종대왕이 종실 중에서 조행(操行) 있는 사람을 골라 구릉(舊陵)을 모시게 하였는데 공이 뽑혔고, 또 종실에서 명망 있는 사람 셋을 뽑아 모든 종친들의 비위를 규정하게 하였는데 공이 그 첫번째로 뽑혔다.
 공은 꽃과 나무, 거문고와 글을 사랑하여 벗을 삼았다. 집에 쌍송정(雙松亭)이 있어 자호를 쌍송주인이라 하였다. 또 오향정(五香亭)이 있었는데 봄의 난초, 여름의 연꽃, 가을의 국화, 겨울의 매화 등 사계절의 꽃향기를 의미하여 이름지은 것이었다. 특히 거문고를 잘하여 세조대왕은 `금헌(琴軒)\'이란 호를 내렸다. 평생에 글을 좋아하여 <경사자집>을 섭렵하였고 <자치통감>을 특히 좋아하여 평생 동안 읽었다. 공은 아들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거문고 한 장과 술 한 항아리, <통감> 한 질을 같이 묻어달라.” 하였다. 또한 유학을 사랑하여 임종할 때 아들과 사위에게 이르기를 “불가(佛家)의 일을 하지 말고 조석으로 상식(上食)할 때 집의 형편에 맞도록 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매화의 시 한 수를 지어,

年將知命病床催
屋角悠悠楚些哀
梅?不知人事變
一枝花綻送香來
나이는 장차 천명을 알려 하는데 병은 왜 이리
재촉하며,
처마끝 유유히 초사의 슬픔이라.
매화송이 인사가 변함을 모르고,
한 가지 꽃이 피어 향기 보내주느냐.

라고 읊고 1499년(연산군 5) 11월 계미일에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그 이듬해 3월 경기도 파주 파평산 담양군 산소 뒤 남쪽 기슭 축좌 미향에 장례지낼 때 평소의 유지에 따라 그 세가지 물건을 부장하였다.
 배위 양천허씨는 후사가 없었고 배위 대원김씨가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영평정 · 차남은 희안군 · 3남은 예안군이다. 또 한분의 배위께서는 장남 양평부수 · 차남 함창부수 형제를 두었다.
금천군(錦川君) 1515∼1559    파명:담양군(潭陽君)
  금천군(錦川君) [1515(중종 10)∼1559(명종 14)]
 휘는 함(王+咸), 담양군의 증손이며 희안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원윤씨 부위(副尉) 수의(修義)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덕과 재능이 뛰어났으며 늠름한 위엄으로 다른 사람의 사랑과 공경을 받았다.
 나이 15세에 광성대부(光成大夫) 금천부수(錦川副守)를 제수받고 여러 차례 승계하여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정진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은 또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사물을 대할 때는 기쁘거나 노여운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상중엔 슬퍼하고 제사엔 엄숙하여 반드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준칙으로 삼았고 제사가 있을 때엔 재계하였다. 삼가 제수를 장만할 때에는 반드시 손수 점검을 하였고 국기(國忌)를 당하면 소복 을 하고 소찬을 들며 그날을 마쳤다. 조하(朝賀)와 문안을 올릴 때면 늦을까 걱정하였고 비록 병환이 있더라도 몸소 행하며 말하기를 “종친엔 별다른 부끄러움이 없는지라 이런 일을 게을리하면 어찌 직분을 다하리요.”라고 하였다.
 1544년(중종 39)과 1545년(인종 1) 두 해 사이에 중종대왕과 인종대왕이 연속하여 승하하니 고례(古禮)를 따라 심상(心喪) 3년하고, 내실을 대하기를 빈객과 같이 하며 의금(衣衿)과 침석(枕席)을 따로 하였으니, 비록 자제(子弟)나 시비(侍婢)들이라 하더라도 일침동상(一枕同床)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아우 순천군 관(琯)과 홍천수 섭(쉒)과는 우애가 각별하였으나 형제가 따로 살아 자주 보지 못함을 늘 한탄하였다. 그러나 삭망(朔望)의 참례가 끝나면 술을 빚어 나누어 마시며 담소하다가 밤이 깊어야 파했으며 상현과 하현의 휴가 때엔 동생들의 집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
 자제를 가르칠 때에는 먼저 <소학>부터 가르치고 다음에 사서를 읽게 하여 순서대로 지도하였다. 공은 늘 훈계하기를 “글을 읽고 공부함은 덕을 쌓고 업을 닦는 것이니, 만일 과거와 명예에 마음을 두면 몸을 위한 학업이 아니다. 설사 명성을 떨친다 해도 나의 심신에 무슨 도움이 되리오.”라고 하였다. 사람을 만나면 덕행으로 지도하고 예법으로 가르쳐서 반드시 바른길로 이끄니, 친구지간에도 그 덕에 훈습(薰習)되어 몸을 닦은 사람이 많았다. 또 혼례나 상례가 있으며 남을 도왔으니 충신(忠信)이 마음에 쌓이면 언행이 일치하고 표리가 다르지 않았다. 또한 속에 쌓은 덕이 두터우니 밖으로 나타남 역시 더욱 빛났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인인장자(仁人長者)라고 불렀는데 대개 그 천성이 도(道)와 합치되고 학업이 이치에 맞았던 것이다.
 1559년(명종 14) 8월 13일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45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파평산 선영 신좌을향에 있다. 1604년(선조 37) 아들 파곡(坡谷) 성중(誠中)의 공훈으로 증 현록대부(顯祿大夫) 금천군으로, 조부 희안수(喜安守)는 증 정의대부(正義大夫) 희안군으로 각각 증직 · 봉군되었다.
 배위는 군부인 서흥김씨로 1518년(중종 13) 4월 3일에 태어났다. 17세에 공과 혼인하여 26년 동안 섬기다가 1559년(명종 14) 부군이 별세하자 여러 아들을 교훈할 때에도 자애롭고 엄숙하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는 항상 조심하라고 경계하였고 그러한 벼슬을 영화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1581년(선조 14) 8월 2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이 해 10월 7일에 공과 더불어 한 자리에 무덤을 달리하여 장례지냈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중(誠中)은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고 차남 경중(敬中)은 예조정랑이며 삼남 양중(養中)은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담양군(潭陽君) 1439∼1450    파명:담양군(潭陽君)
  담양군(潭陽君) [1439(세종 21)∼1450(세종 32)]
 휘는 거(?)이고, 세종대왕의 왕자로 1439년 1월 8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신빈 김씨로 13세에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뽑혀 계양군 · 의창군 · 밀성군 · 익현군 · 영해군 · 담양군 등 6남을 두었다. 태봉은 경상도 성주 북쪽 30리 선석산(禪石山)에 모셨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효심이 뛰어났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거처에 법도가 있고 시서를 좋아하였으며 성장할수록 기품이 활달하고 매사에 경건하였다. 금지옥엽으로 자라났으나 주야로 게으른 빛이 없었으니 대왕과 모친의 총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장래의 여망과 공론은 심상에 비할 바 아니었다.
 12세 되던 해인 1450년(세종 32) 음력 2월 17일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어린나이에 몸부림치며 슬퍼하여 병을 얻었다. 그 후 20여 일을 고생하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1450년(세종 32) 3월 10일 별세하였다. 문종대왕이 특히 애통하게 여기고 장지를 하사하였으며 시호를 회간(懷簡)이라 내렸다가 뒤에 이애(夷哀)로 고쳐 하사하였다. 장지는 원평현(原平縣) 임내(任內)이지만 지명과 위치는 미상이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파평산 서록 진좌 신향지원(辛向之原)에 장례를 모셨다. 후사가 없으니 세조대왕이 특명을 내려 계양군의 차남 강양군 숙(潚)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였다.
순천군(順川君) 1518∼1577    파명:담양군(潭陽君)
  순천군(順川君) [1518(중종 13)∼1577(선조 10)]
 휘는 관(琯), 자는 헌순(獻舜), 호는 혼계(渾溪). 강양군 숙(潚)의 손자이며 희안군 집(輯)의 차남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인자하였으며 효심과 우애가 깊었다.
 이소(履素) 리중호(李仲虎 : 1512 ∼1554)가 서숙(書塾)을 차리고 어진 이를 모아 도학을 가르칠 때 공이 나아가 예를 차리고 조석으로 공경함이 서민과 같았으며 성심껏 배워 크게 얻었다.
 백형 금천군과 더불어 날로 연마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금천군이 일찍 돌아가니 애통해하며 그 세 아들을 가르쳐 성중 · 경중 · 양중이 모두 올바르게 성장하였다. 평소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릴 때 한결같이 <소학(小學)><가례(家禮)>에 쓰인 대로 행하였다.
 부모가 같은 해에 돌아가니 3년상이 지난 뒤에도 미진하여 또 소복을 입고 3년을 지냈다. 한편 중종대왕과 인종대왕의 국상에도 소복을 3년 동안 입으니 조정에서 그 행실을 가상히 여겨 부정(副正)으로 제수하고 표창하였다.
 명종대왕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초상 때에 명종대왕은 특히 공에게 명하여 체백궁(體魄宮)을 지키라 하였다. 공이 제사를 정성껏 올려서 명선대부로 승계되고 도정(都正)을 제수받았다. 주자동(鑄字洞)에 서숙(書塾)을 차려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는데 선비들이 많이 와서 공부하고 공은 지성으로 가르쳤다. 선비들 또한 지성으로 학문을 닦아 문하에 있던 사람은 모두 효제 충신으로 이름이 났고 용모와 일처리가 단정하고 사리에 맞았다.
 공은 말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안하는 것이나 하지 못할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 조상을 받드는 정성의 길이 아니다. 다만 때와 형편에 맞게,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 성의껏 하면 비록 두 접시의 검소한 제수라도 신은 반드시 흠향할 것이요, 그러한 정성이 없으면 비록 세가지 짐승을 잡은 풍성한 제수라도 신은 반드시 흠향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또한 “효도는 백행실의 원천이요 효도에서 봉선(奉先)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봉선에 있어서는 오직 정성과 공경이 근본이라.” 하였다.
 후생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가례><논어>를 먼저 가르쳤는데 말씀하기를 “이런 글을 읽고도 무소득이면 반드시 일생을 허송하는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1575년(선조 8)에 풍환(風患)이 일어나서 1577년(선조 10) 가을에 별세하니 향년 60세였다. 공의 아들 시중(時中)은 임진왜란 때 호성원종1등공신의 공훈으로 인해 순천도정에서 순천군으로 추증되었다. 종반공자(宗班公子)로 추앙되고 충효 정려를 받았으며 1612년(광해군 4) <해동명신록>과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오르고 <훈도방주자동지(薰陶坊鑄字洞志)>에 입전(入傳)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