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부흥도정(傅興都正) 1542∼1607    파명:완원군(完原君)
  부흥도정(傅興都正) [1542(중종 37)∼1607(선조 40)]
 휘는 몽열(夢說), 자는 사우(士遇), 호는 돈옹(遯翁). 완원군의 증손이고 의원군의 3남이다. 종친품계는 초수 정4품 부흥수(傅興守), 승차 정3품 당상 명선대부 부흥도정이다.
 1580년(선조 13) 종계(宗系)의 개정(改正)이 대명회전(大明會典)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註) 태조고황제의 사실(事實) 부분이 기재 첨입되어 편찬이 끝났는데도 명(明)나라 신종(神宗)에게서 내림(頒賜)을 받지 못하여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 이때 공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종계의 무고를 받음은 열성조에 욕이 크오니, 주청하는 사신은 마땅히 지성으로 명나라 조정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일이 성공하면 환국하고 성공치 못하면 뼈를 연산(燕山)에 묻을 각오를 한 뒤에라야 가히 성사될 것입니다.”하고, 일의 진행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응대할 만한 인재를 구할 것을 주청했다. 1590년(선조 23) 8월, 종계가 고쳐진 공적으로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의 훈권(勳券)을 내릴 때, 공은 종친품계 정3품인 증 명선대부 부흥도정으로 승차(陞差)했다.
 1596년(선조 29) 7월,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라고 선동하여 동갑계회(同甲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서얼 출신의 이몽학(李夢鶴)과 그 적도들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켜 임천 · 홍산 · 정산 · 청양 · 대흥 등의 고을을 함락한 뒤 홍주목(洪州牧 : 현재의 충청도 홍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공은 이들을 토벌, 평정하는 대열에 참가하여 1604년(선조 37) 논공행상 때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원종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原從功臣) 2등 훈권을 받았다.
 공은 말년에 서울을 떠나 충청 보령현 향장(鄕庄)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지중추부사 지의금부사를 지낸 정곡(鼎谷) 조존성(趙存性), 영월도호부사를 지낸 이상우(李商雨) 등과 더불어 솔선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향약(鄕約)을 연구하여 정했다.
 공은 증 신부인(愼夫人) 광산김씨(1540∼1604)와의 사이에 형(珩) · 성(珹) · 곤(琨) · 완(琬) 등 4남과 1녀를 두었다. 1607년(선조 40) 10월 20일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이성군 묘 월변 좌강 갑좌이며 배위 증 신부인 광산김씨가 향년 65세에 별세하니 부묘했다.
순흥군(順興君) 1544∼1611    파명:완원군(完原君)
 순흥군(順興君) [1544(중종 39)∼1611(광해군 3)]
 휘는 몽우(夢禹), 자는 응성(應聖). 완원군의 증손이고 의천군의 사자(嗣子)이다.
 종친품계는 초수 정4품 순흥수(順興守), 승차 종2품 정의대부 순흥군 겸 오위도총부 종2품 부총관이다.
 증 현부인 전주최씨(1543∼?)와의 사이에 진(캹) · 선(瑄) · 정(?) 등 3남과 2녀를 두었고, 현부인 고령신씨(1547∼?)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말년에 공은 풍병으로 신음하다가 별세하니 향년 68세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임좌이며 현부인 전주최씨와 현부인 고령신씨의 묘를 좌부(左쯊)하여 이봉(異封)했다.
예흥수(禮興守) 1547∼?    파명:완원군(完原君)
 예흥수(禮興守) [1547(명종 2)∼?]
 휘는 몽문(夢文), 자는 현중(顯中). 완원군의 증손이며 의천군의 3남이다.
 공은 문장과 도덕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을 겪는 와중에 묘표석이 파손되고 비바람에 씻겨 그 숭미(崇美)함을 헤아릴 수 없다. 묘 또한 관리 소홀로 형적만 남아 1986년 9월 8일 묘역을 전면 보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의천군묘소 앞 임좌 언덕에 모셨으며 신부인 진주류씨는 합폄하고 문화류씨는 부좌 봉분하여 묘표석을 세웠다. 또한 공의 외아들 분(풿)은 임진왜란으로 종묘사직이 소화되는 것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수 명의 왜적을 격살하고 끝내 굴하지 않다가, 1593년(선조 26) 1월 24일 향년 34세로 위국순절(爲國殉節)하였다.
운흥정(雲興正) 1536∼1587    파명:완원군(完原君)
  운흥정(雲興正) [1536(중종 31)∼1587(선조 20)]
 휘는 몽룡(夢龍), 자는 사운(士雲). 완원군의 3대 종손이고 의원군의 사자(嗣子)이다.
 종친품계는 초수 정4품 운흥수(雲興守), 승차 정3품 당상 명선대부 운흥정이다.
 공은 증 신부인(愼夫人) 경주정씨(1537∼1573)와의 사이에 위(瑋) 1남과 1녀를 두고, 증 신부인 파평윤씨(1555∼1608)와의 사이에 봉(琫) 1남과 3녀를 두었다. 1587년(선조 20) 5월 9일 별세하니 향년 51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의원군 묘 아래 계좌이다.
의원군(義原君) 1520∼1544    파명:완원군(完原君)
 의원군(義原君) [1520(중종 15)∼1544(중종 39)]
 휘는 억(億), 자는 희수(希첤). 완원군의 손자이며, 이성군의 사자(嗣子)이다. 종친 품계는 초수 종3품 당하 창선대부 의원부정(義原副正)이고, 종2품 증 정의대부 의원군에 추봉되었다.
 공은 기품이 온화하고 덕이 두터우며 화목하여 종족의 칭찬을 받았으나 1544년(중종 39) 11월 11일 향년 25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증 청송현부인(靑松縣夫人) 청송심씨(1521∼1592)와의 사이에 운흥정(雲興正)·신흥수(莘興守)·부흥도정(傅興都正) 등 3남과 1녀를 두었다. 청송심씨는 1592년(선조 25) 9월 12일 별세하니 향년 72세였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아래 계좌 정향 언덕이고 증 청송현부인 청송심씨를 부묘했다.
의천군(義泉君) 1524∼1578    파명:완원군(完原君)
 의천군(義泉君) [1524(중종 19)∼1578(선조 11)]
 휘는 인(仁), 자는 춘경(春卿). 완원군의 손자이며 이성군의 2남이다.
 종친 품계는 초봉 종3품 자신대부 의천부정(義泉副正), 1545년(인종 1) 승차 정3품 당상 명선대부, 1560년(명종 15) 이조 사옹원 정3품 당상 부제조 진작관(進爵官), 종2품 정의대부 의천군, 1568년(선조 1) 승진 중의대부, 1577년(선조 10) 정의대부로 강직되었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보는 이 마다 칭찬하였다. 22세 되던 해인 1545년 7월 6일 경원대군(慶源大君 : 후의 명종대왕)이 즉위하니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 1등 훈권(勳券)을 받고 명선대부에 올라 당상관이 되었다. 그리고 37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 9월, 순회세자(順懷世子)의 관례(冠禮)를 행할 때 사옹원 부제조로서 진작관이 되어 정의대부 의천군을 제수받았다. 42세 때인 1565년(명종 20) 4월 7일,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종실에서 교번(交番)을 선택하여 혼전(魂殿)을 지키게 할 때, 주상 열람문서(御批)에 기재된 이름으로는 공이 그 첫번째라서 대상(大祥)을 마치고 중의대부로 승차되었으나, 1577년(선조 10) 훈록이 삭제됨에 따라 다시 정의대부로 강직(降職)되었다.
 공은 상당현부인(上黨縣夫人)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순흥군(順興君) · 복흥수(復興守) · 예흥수(禮興守) · 익흥수(益興守) 등 4남과 1녀를 두고 1578년(선조 11) 10월 18일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55세였다.
 그 해 12월 을유일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이성군 묘앞 임좌병향 언덕에 장례지냈고 상당현부인 청주한씨를 부묘했다. 1579년(선조 12) 8월에 비석을 세웠다.
이성군(伊城君) 1503∼1542    파명:완원군(完原君)
 이성군(伊城君) [1503(연산군 9)∼1542(중종 37)]
 휘는 수강(壽剛), 자는 중로(仲老). 완원군의 사자(嗣子)이다.
 1514년(중종 9) 습봉(襲封), 종친품계는 정2품 승헌대부 이성군에 봉해졌다. 공은 고매한 성품과 도량이 넓어 모든 영화를 버리고 포의한사(布衣寒士)처럼 지냈다. 7세 때인 1509년(중종 4) 10월 26일 부친상을 당하고 8세 때인 1510년(중종 5) 9월 12일 조모 숙의 남양홍씨를 여의었다. 또 19세 때인 1521년(중종 16) 4월 14일에는 어머니 정선군부인 양천허씨가 별세하자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 그 예법이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그 때 아우 이천군(伊川君)은 아직 어렸고 두 서매(庶妹)는 갈 곳이 없었는데, 공이 성심으로 키워 때를 잃지 않고 혼인시켰다.
 공은 증 청천현부인(淸川縣夫人) 청주한씨(1502∼1571)와의 사이에 의원군(義原君)과 의천군(義泉君) 등 2남을 두었다. 술병으로 수년간 고생하자 중종대왕은 약을 내리고 날마다 찬을 보내주었으나 1542년(중종 37) 10월 11일 서울 중부 수진방 수진동 사저에서 별세하니 향년 40세였다.
 이듬해 2월 을묘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옆 자좌오향 언덕에 장례지내고 1549년(명종 4) 2월에 묘갈명을 세웠으며 청천현부인 청주한씨가 1571년(선조 4) 12월 5일 향년 70세로 별세하니 부묘(쯊墓)했다.
익흥수(益興守) 1549∼1592    파명:완원군(完原君)
 익흥수(益興守) [1549(명종 4)∼1592(선조 25)]
 휘는 몽무(夢武), 자는 응렬(應烈). 완원군의 증손이고 의천군의 4남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우다가 9월 15일 순절하니 향년 44세였다. 공의 의혼(義魂)을 불러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의천군묘 앞 자좌 언덕에 모셨으며 선조대왕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종친품계 정3품 당하관 창선대부를 특별히 추증했다.
 공은 증 신부인 창원황씨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묘는 쌍분하였다. 증 신부인 창녕조씨(1561∼1587)는 탁(琢) 1남과 2녀를 두고 1587년(선조 20) 2월 13일 별세하니, 향년 27세였다. 묘는 충북 청주 주안 남창리 속동 오좌 언덕에 모셨다가 대전광역시 동구 오동 31-1번지 속곡 오좌언덕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