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무(敬懋) 1728∼1799 파명:무림군(茂林君)
 경무(敬懋) [1728(영조 4)∼1799(정조 23)]
자는 사직(士直),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무림군의 10대손으로 송산도정의 7대손이며 성수(聖洙)의 장남이다. 1751년(영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1763년(영조 39) 당시 전라좌수사로서 혹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1766년 승지를 거쳐 황해병사에 임명되었다. 정조대왕이 즉위한 뒤 여사대장(轝士大將) · 경기수사 · 금군별장 · 삼도수군통제사 · 어영대장 · 포도대장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금위대장 재임시 금중(禁中) 소요로 동복현으로 유배됐으나 곧 풀려나 금위대장 · 포도대장 · 어영대장 ·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788년 정조대왕의 황단(皇壇) 행차 때에 북영(北營)에 주둔하라는 명을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고 하여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1791년 여주목사에 특보되고 수원부사를 거쳐, 1793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뒤 어영대장 · 훈련대장 · 금위대장 · 한성부판윤 ·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로 군수 인서(麟瑞)의 딸과 정부인 함안조씨로 영최(榮最)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선영하 해좌이다.
자는 사직(士直),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무림군의 10대손으로 송산도정의 7대손이며 성수(聖洙)의 장남이다. 1751년(영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1763년(영조 39) 당시 전라좌수사로서 혹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1766년 승지를 거쳐 황해병사에 임명되었다. 정조대왕이 즉위한 뒤 여사대장(轝士大將) · 경기수사 · 금군별장 · 삼도수군통제사 · 어영대장 · 포도대장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금위대장 재임시 금중(禁中) 소요로 동복현으로 유배됐으나 곧 풀려나 금위대장 · 포도대장 · 어영대장 ·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788년 정조대왕의 황단(皇壇) 행차 때에 북영(北營)에 주둔하라는 명을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고 하여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1791년 여주목사에 특보되고 수원부사를 거쳐, 1793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뒤 어영대장 · 훈련대장 · 금위대장 · 한성부판윤 ·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김씨로 군수 인서(麟瑞)의 딸과 정부인 함안조씨로 영최(榮最)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선영하 해좌이다.
광도(光道) 1769∼1807 파명:무림군(茂林君)
 광도(光道) [1769(영조 45)∼1807(순조 7)]
자는 정부(正夫),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세무(世懋)의 계자로 생부는 승언(承彦)이다. 음직(蔭職)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01년(순조 1)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연일정씨로 병사 관래(觀來)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무림군묘 오른쪽 기슭에 있다.
자는 정부(正夫),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세무(世懋)의 계자로 생부는 승언(承彦)이다. 음직(蔭職)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01년(순조 1)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연일정씨로 병사 관래(觀來)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무림군묘 오른쪽 기슭에 있다.
광섭(光?) 1717∼1784 파명:무림군(茂林君)
 광섭(光?) [1717(숙종 43)∼1784(정조 8)]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성무(聖懋)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김씨로 익조(翼祚)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대평면 변곡동 대어리 묘좌이다.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성무(聖懋)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김씨로 익조(翼祚)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대평면 변곡동 대어리 묘좌이다.
광익(光益) 1767∼1811 파명:무림군(茂林君)
 광익(光益) [1767(영조 43)∼1811(순조 11)]
자는 숙겸(叔謙),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함흥판관 태무(泰懋)의 차남이다. 1783년(정조 7) 특별천거로 음관(蔭官)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같은해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으며 1795년(정조 19) 통정대부로 특선되어 승지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특별히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사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임금은 총융사(摠戎使)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뒤 금위대장 · 동지의금부사 ·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평산신씨로 판서 계의(季毅)의 딸이다.
묘지는 처음에는 양주에 장례했다가 후에 포항으로 이장하고, 다시 1843년(헌종 9) 청풍 동면 도화동 간좌로 옮겼다.
자는 숙겸(叔謙), 송산도정의 8대손이며 함흥판관 태무(泰懋)의 차남이다. 1783년(정조 7) 특별천거로 음관(蔭官)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같은해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으며 1795년(정조 19) 통정대부로 특선되어 승지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특별히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사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임금은 총융사(摠戎使)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뒤 금위대장 · 동지의금부사 ·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평산신씨로 판서 계의(季毅)의 딸이다.
묘지는 처음에는 양주에 장례했다가 후에 포항으로 이장하고, 다시 1843년(헌종 9) 청풍 동면 도화동 간좌로 옮겼다.
권묵(權默) 1850∼1904 파명:무림군(茂林君)
 권묵(權默) [1850(철종 1)∼1904(광무 8)]
자는 성진(成振), 무림군의 16대손이며 황산수의 13대손이고 윤옥(允沃)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로 공범(公凡)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송계리 뒷산 유좌이다.
자는 성진(成振), 무림군의 16대손이며 황산수의 13대손이고 윤옥(允沃)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로 공범(公凡)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송계리 뒷산 유좌이다.
규경(圭景) 1788∼1856 파명:무림군(茂林君)
 규경(圭景) [1788(정조 12)∼1856(철종 7)]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土). 덕무(德懋)의 손자이며, 광규(光葵)의 아들이다. 그의 학문은 선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부는 박학다재하여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문장에 있어서도 신조(新調)를 일으켜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곡진히 그려내었다. 아버지 광규도 할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에 등용되어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일하였다. 공은 이러한 가풍에 젖었고, 그 위에 당시 팽배해 있던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으로 천문 · 역수(曆數) · 종족 · 역사 · 지리 · 문학 · 음운(音韻) · 종교 · 서화 · 풍속 · 야금(冶金) · 병사(兵事) · 초목 · 어조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하여 1,400여 항목을 담아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인체내외치상변증설 (人禮內外置象辨證說)〉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의 의학지식은 서양 고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서양의술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기록한 저술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관념론에 사로잡혀 인체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이목구비에 대한 구조를 그려낸다는 것조차도 인성(人性)에 대한 야만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두변증설 (種痘辨證說)〉은 1854년(철종 5) 평안도지방에서 종두를 처음 실시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적인 문제에 대하여 당시 사리사욕에 찬 탐관(貪官)과 부상(富商)들이 매점매석을 통하여 폭리를 자행하자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면서 매점매석을 적극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화폐가 유통되자 비농민층만 편리하게 되고 농민에게는 유해함을 들어 이익(李瀷)의 폐전책(廢錢策)을 지지하였다. 대외적인 상행위에 있어서도 개시(開市)와 교역의 필요성을 강조, 1832년(순조 32) 영국상선이 우리 나라에 교역을 요구해왔을 때 개시를 특허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약도 엄중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백운필(白雲筆)〉에서 농정에 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외에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攷辨)〉을 찬술, 동서고금의 사물에 통하지 않음이 없게 신지식을 제시하여 혁신적인 신기운을 조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오주연문장전산고〉 · 〈오주서종박물고변〉 · 〈백운필〉 등이 있다.
배위는 함안조씨 수진(垂鎭)의 딸이다.
묘소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 곡현리 당고개 병좌이다.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土). 덕무(德懋)의 손자이며, 광규(光葵)의 아들이다. 그의 학문은 선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부는 박학다재하여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문장에 있어서도 신조(新調)를 일으켜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곡진히 그려내었다. 아버지 광규도 할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에 등용되어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일하였다. 공은 이러한 가풍에 젖었고, 그 위에 당시 팽배해 있던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으로 천문 · 역수(曆數) · 종족 · 역사 · 지리 · 문학 · 음운(音韻) · 종교 · 서화 · 풍속 · 야금(冶金) · 병사(兵事) · 초목 · 어조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하여 1,400여 항목을 담아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인체내외치상변증설 (人禮內外置象辨證說)〉에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의 의학지식은 서양 고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서양의술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기록한 저술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관념론에 사로잡혀 인체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이목구비에 대한 구조를 그려낸다는 것조차도 인성(人性)에 대한 야만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두변증설 (種痘辨證說)〉은 1854년(철종 5) 평안도지방에서 종두를 처음 실시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적인 문제에 대하여 당시 사리사욕에 찬 탐관(貪官)과 부상(富商)들이 매점매석을 통하여 폭리를 자행하자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면서 매점매석을 적극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화폐가 유통되자 비농민층만 편리하게 되고 농민에게는 유해함을 들어 이익(李瀷)의 폐전책(廢錢策)을 지지하였다. 대외적인 상행위에 있어서도 개시(開市)와 교역의 필요성을 강조, 1832년(순조 32) 영국상선이 우리 나라에 교역을 요구해왔을 때 개시를 특허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약도 엄중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백운필(白雲筆)〉에서 농정에 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 외에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攷辨)〉을 찬술, 동서고금의 사물에 통하지 않음이 없게 신지식을 제시하여 혁신적인 신기운을 조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오주연문장전산고〉 · 〈오주서종박물고변〉 · 〈백운필〉 등이 있다.
배위는 함안조씨 수진(垂鎭)의 딸이다.
묘소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 곡현리 당고개 병좌이다.
규원(圭原) 1799∼1872 파명:무림군(茂林君)
 규원(圭原) [1799(정조 23)∼1872(고종 9)]
자는 복여(復汝), 광도의 3남이며 규하의 아우이다.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27년(순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부사(穩城府使)를 지냈다.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배위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부사 재묵(載默)의 딸과 정부인 거창신씨로 영태(永泰)의 딸과 정부인 김해김씨로 동성(東城)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서초구 염곡동 묘좌이다.
자는 복여(復汝), 광도의 3남이며 규하의 아우이다.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27년(순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부사(穩城府使)를 지냈다.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배위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부사 재묵(載默)의 딸과 정부인 거창신씨로 영태(永泰)의 딸과 정부인 김해김씨로 동성(東城)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서초구 염곡동 묘좌이다.
규철(圭徹) 1801∼1872 파명:무림군(茂林君)
 규철(圭徹) [1801(순조 1)∼1872(고종 9)]
자는 사일(士一), 시호는 효의(孝毅)이다. 금위대장 광익(光益)의 3남이다. 1822년(순조 22) 별천(別薦)으로 무관직에 나아가고 1825년(순조 2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 경기수군절도사 ·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853년(철종 4)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1842년과 1854년에는 암행어사였던 김응균(金應均) · 박규수(朴珪壽) 등의 고소로 죄를 받았지만, 1856년 좌변포도대장, 1858년 총융사 등을 거쳐 1863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고 이후 병조판서 · 형조판서 · 공조판서 등을 거쳐 품계가 보국승록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해주오씨로 수사 치수(致壽)의 딸과 거창신씨 영태(永泰)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도리실 신좌이다.
자는 사일(士一), 시호는 효의(孝毅)이다. 금위대장 광익(光益)의 3남이다. 1822년(순조 22) 별천(別薦)으로 무관직에 나아가고 1825년(순조 2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 경기수군절도사 ·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853년(철종 4)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1842년과 1854년에는 암행어사였던 김응균(金應均) · 박규수(朴珪壽) 등의 고소로 죄를 받았지만, 1856년 좌변포도대장, 1858년 총융사 등을 거쳐 1863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고 이후 병조판서 · 형조판서 · 공조판서 등을 거쳐 품계가 보국승록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해주오씨로 수사 치수(致壽)의 딸과 거창신씨 영태(永泰)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도리실 신좌이다.
규하(圭夏) 1792∼1856 파명:무림군(茂林君)
 규하(圭夏) [1792(정조 16)∼1856(철종 7)]
자는 맹여(孟汝), 광도(光道)의 장남.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25년(순조 25)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水使)가 되었다. 품계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연일정씨로 부장(部將) 의주(義柱)의 딸과 정부인 강릉김씨로 병삼(秉三)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마장리에 있다.
자는 맹여(孟汝), 광도(光道)의 장남.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25년(순조 25)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水使)가 되었다. 품계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연일정씨로 부장(部將) 의주(義柱)의 딸과 정부인 강릉김씨로 병삼(秉三)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마장리에 있다.
덕무(德懋) 1741∼1793 파명:무림군(茂林君)
 덕무(德懋) [1741(영조 17)∼1793(정조 17)]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 아정(雅亭) · 청장관(靑莊館) · 영처(쵥處) · 동방일사(東方一士). 무림군의 10대손이며 송산도정의 7대손이고 통덕랑 성호(聖浩)의 아들이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달통하였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하여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어릴 때 병약하고 빈한하여 전통적 정규교육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명한 그는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朴齊家) · 류득공(柳得恭) · 리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특히 박지원(朴趾源) · 홍대용(洪大容) · 박제가 · 류득공 · 서이수(徐理修)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면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개혁이론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고염무(顧炎武) · 주이존(朱彛尊)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한 나머지 1778년(정조 2)에는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직접 연경(燕京)에 들어가 기균(紀?) · 이조원(李調元) · 이정원(李鼎元) · 육비(陸飛) ·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均)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유하는 한편, 그곳의 산천 · 도리(道里) · 궁실(宮室) · 누대(樓臺) · 초목 · 충어(蟲魚) · 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이것은 그의 북학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정조대왕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정조 3)에는 박제가 · 류득공 · 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비롯한 많은 국내학자들과 사귀는 한편, 그곳에 비장되어 있는 진귀한 서적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의 도서편찬에도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圖書集成)〉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규장각지(奎章閣志)〉 · 〈홍문관지(弘文館志)〉 · 〈송사전(宋史筌)〉 · 〈검서청기(檢書廳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기전고(箕田攷)〉 · 〈규장전운(奎章全韻)〉 · 〈시관소전(詩觀小傳)〉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 항상 소매 속에 책과 필묵을 넣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저술할 때 참고로 하였다. 내성적 성격이지만, 근면하고 특히 시문에 능하여 규장각 경시대회(競詩大會)에서 여러 번 장원함으로써 정조대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정조 5)에는 내각검서관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사도시주부(司?寺主簿) ·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 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에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썼다 하여 박지원 · 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禮反正)에 걸려 정조대왕은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쳤으며 질병으로 1793년에 별세하였다. 정조대왕은 생시의 업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그의 아들 광규(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지주(蜘蛛)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한다.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 ·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 〈영처시고(쵥處詩稿)〉 · 〈영처문고(쵥處文稿)〉 · 〈예기고(禮記考)〉 · 〈편찬잡고(編纂雜稿)〉 · 〈기년아람(紀年兒覽)〉 · 〈사소절(士小節)〉 · 〈청비록(淸脾錄)〉 ·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 〈앙엽기(촖葉記)〉 · 〈입연기(入燕記)〉 · 〈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 ·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 〈열상방언(洌上方言)〉 · 〈협주기(峽舟記)〉 등 16종이 있다.
배위는 숙인(淑人) 수원백씨로 절도사 사굉(師宏)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강남구 복평동 선영 우강 유좌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 · 아정(雅亭) · 청장관(靑莊館) · 영처(쵥處) · 동방일사(東方一士). 무림군의 10대손이며 송산도정의 7대손이고 통덕랑 성호(聖浩)의 아들이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달통하였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하여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어릴 때 병약하고 빈한하여 전통적 정규교육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명한 그는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朴齊家) · 류득공(柳得恭) · 리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특히 박지원(朴趾源) · 홍대용(洪大容) · 박제가 · 류득공 · 서이수(徐理修)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면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개혁이론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고염무(顧炎武) · 주이존(朱彛尊)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한 나머지 1778년(정조 2)에는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직접 연경(燕京)에 들어가 기균(紀?) · 이조원(李調元) · 이정원(李鼎元) · 육비(陸飛) ·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均)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유하는 한편, 그곳의 산천 · 도리(道里) · 궁실(宮室) · 누대(樓臺) · 초목 · 충어(蟲魚) · 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이것은 그의 북학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정조대왕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정조 3)에는 박제가 · 류득공 · 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비롯한 많은 국내학자들과 사귀는 한편, 그곳에 비장되어 있는 진귀한 서적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의 도서편찬에도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圖書集成)〉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규장각지(奎章閣志)〉 · 〈홍문관지(弘文館志)〉 · 〈송사전(宋史筌)〉 · 〈검서청기(檢書廳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기전고(箕田攷)〉 · 〈규장전운(奎章全韻)〉 · 〈시관소전(詩觀小傳)〉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 항상 소매 속에 책과 필묵을 넣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저술할 때 참고로 하였다. 내성적 성격이지만, 근면하고 특히 시문에 능하여 규장각 경시대회(競詩大會)에서 여러 번 장원함으로써 정조대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정조 5)에는 내각검서관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사도시주부(司?寺主簿) ·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 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에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썼다 하여 박지원 · 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禮反正)에 걸려 정조대왕은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쳤으며 질병으로 1793년에 별세하였다. 정조대왕은 생시의 업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그의 아들 광규(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지주(蜘蛛)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한다. 저서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 ·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 〈영처시고(쵥處詩稿)〉 · 〈영처문고(쵥處文稿)〉 · 〈예기고(禮記考)〉 · 〈편찬잡고(編纂雜稿)〉 · 〈기년아람(紀年兒覽)〉 · 〈사소절(士小節)〉 · 〈청비록(淸脾錄)〉 ·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 〈앙엽기(촖葉記)〉 · 〈입연기(入燕記)〉 · 〈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 ·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 〈열상방언(洌上方言)〉 · 〈협주기(峽舟記)〉 등 16종이 있다.
배위는 숙인(淑人) 수원백씨로 절도사 사굉(師宏)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강남구 복평동 선영 우강 유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