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광수(光秀) 1873∼1953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광수(光秀) [1873(고종 10)∼1953]
 자는 미중(美中), 호는 옥산(玉山), 대군의 17대손이며 추성수의 14대손이다. 1900년(광무 4)에 관직에 제수되고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의 인산에 차비관(差備官)을 지냈고 가자(加資)를 받아 통훈대부 당하관 정3품에 올랐다. 공은 을사조약 체결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활 잘 쏘는 사람 수십 명을 모집하여 5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대궐 문밖에서 쏘아 죽이려 하였으나 5적 중 권중현(權重顯)을 쏘다가 놓쳐버려 실패하고 왜군에 붙잡혀 진도로 정배되어 1년 후에 풀려났다. 1919년 독립만세 때에도 널리 책동하여 함성소리 드높게 불렀는데 동지인 양한묵(梁漢默)은 옥에서 죽고 공은 전라도 관찰사를 제수토록 하였으나 친일파와는 같이 일 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구선(龜善) 1812∼1898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구선(龜善) [1812(순조 12)∼1898(광무 2)]
 대군의 15대손이며 추성수의 12대손이다. 공은 사마시에 삼종제(三從弟) 최선(最善)과 함께 급제했다. 병인양요 때에 창의(倡義)에 참가하였다.
규영(奎永) 1824∼1902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규영(奎永) [1824(순조 24)∼1902(광무 6)]
 자는 사영(士英), 호는 괴음(槐陰), 대군의 14대손이고 추성수의 11대손이다. 동문(同門)의 도움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합격했을때는 `임금을 속인것\'이라고 하며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도사의 천거에 의하여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다.
 후에 기사(耆社)에 들어가 통정대부에 올랐다. 1895년 국모시해사건 때에 공은 노령이라 나아가지 못하고 아들 사선(思善)을 보내 나라의 어려울 때에 칼을 잡고 의거에 참여하여 죽는 것은 신하의 도리요 종친으로서의 의리라 하시며 참여토록 하였다.
근수(根秀) 1842∼1907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근수(根秀) [1842(헌종 8)∼1907(순종 1)]
 자는 군성(君姓), 호는 하당(霞堂), 숭록대부 승보(承輔)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문과 병과 급제하여 숭정대부,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이르렀다.
기정(箕楨) 1658∼1726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기정(箕楨) [1658(효종 9)∼1726(영조 2)]
 자는 덕수(德첤), 초휘는 초봉(楚鳳). 통덕랑 우(瑀)의 아들이며 통정대부 첨중추(僉中樞)를 지냈다.
노(輅) 1536∼1614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노(輅) [1536(중종 31)∼1614(광해군 6)]
 자는 홍재(弘載), 호는 동진(東津). 원우(元友)의 아들이며 1558년(명종 13)에 진사에 합격하고, 1567년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들었다가 사국(史局)에 뽑혔으며,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경기감사 ·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판돈녕부사 숭록대부에 오르고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도(燾) 1551∼1619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도(燾) [1551(명종 6)∼1619(광해군 11)]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 사정(司正) 양우(良佑).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龍쵃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동근(東根) 1713∼1780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동근(東根) [1713(숙종 39)∼1780(정조 4)]
 자는 경실(景實), 대군의 11대손이고 추성수의 8대손이다. 공은 아버지 형정(衡井)의 명을 받들어 집안의 화목에 전력하였으며, 특히 조상을 위하여 종중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당시 경기도 과천 청계산하에 모신 양녕대군 장자 순성군의 4남 이산부정의 위토가 없어서 매년 제사 때에 어려움이 있을 때, 공은 전답 10여 두락을 장만, 봉제사와 묘역 수호에 힘썼다.
만(曼) 1605∼1664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만(曼) [1605(선조 38)∼1664(현종 5)]
 자는 지만(志曼) 또는 유연(攸然), 헌납 심(쉱)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에 박사제자(博士弟子)에 뽑혔고, 이듬해 문과 갑과에 장원하였다. 추관랑(秋官郞) 기사관(記事官)에 발탁되었으며 1630년(인조 8) 예조좌랑으로 옮긴 후 지평으로 뽑혔다. 1631년(인조 9) 직강(直講)에서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가 지평으로 바뀌었다. 1636년(인조 14)에 수찬(修撰)에 재임되어 조정에서 심양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약속하자 오랑캐와 화친을 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는데 그 해 겨울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끝내 남한산성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마친 후 교리(校理)에서 헌납(獻納)으로 바뀌었다. 류석(柳碩) 일을 정론하다가 헌납에서 교체된 후 3년후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은 후 교리에 재임되었다.
 다시 장령(掌令)에 봉직되어 정치의 폐단을 극언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았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우부승지에 오른 후 1년만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우봉(牛峯) · 강음(江陰) 두 고을을 없애 금천군(金川郡)으로 통합하였다. 또 모든 성(城)을 수리하고 모든 역에 늠전(쬎田)을 지급하는 동시에 많은 역참(驛站)을 설치할 것과 관청에서 본전을 지급하고 이자를 받아 용도를 편리하게 할 것을 주청하였다. 다음해 가선대부에 올랐다.
 1647년(인조 25) 도승지로 있다가 관서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에는 대사간과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영남관찰사로 나가 위조된 결세(結稅)와 이름없는 세목(稅目) 등의 폐단을 상소하여 없애고, 가산(架山)이 성은 커도 군사가 적어 이웃 고을 속오군(束伍軍)을 이동하여 전속케 하였다. 1650년(효종 1)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특진관으로 나아가 영남의 변방과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아첨하는 무리들의 무고로 홍양(洪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영변(寧邊)으로 옮겼다. 다음 해 중국의 사신이 와 무고함을 밝히고 본래의 관직을 다시 주라 하여 해서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가을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된 후 5년 뒤 호남관찰사로 나갔다가 정철(丁哲)의 생폐(牲弊)로 인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57년(효종 8)에 관서절도사가 되었고 다음 해 관찰사가 되어 오가통(五家統)을 시행하고 자모법(字母法)을 제정하였으며, 1662년(현종 3) 호조참판이 되고 다음 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와서 우윤(右尹)이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사후에 대사헌 완원군(完原君)에 봉직되었다.
명익(溟翼) 1679∼1748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명익(溟翼) [1679(숙종 5)∼1748(영조 24)]
 자는 사진(士振), 아버지는 통정대부 우(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을 지냈고 증 통정대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