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간(幹) 1527∼159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간지(幹之), 대군의 5대손으로 풍덕군수 광윤(光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로 군수 자선(自善)의 딸이다.
 1560년(명종 15) 음직(蔭職)으로 전설사(典設司) 별제에 보직되고 이듬해 가을에 북평관(北平館)으로 옮겼다. 1563년(명종 18)에 금화시(禁火寺) 별제를 지냈다. 1565년(명종 20)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으로 승직되고 2년 뒤에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이 때 중국 사신이 포천에 여러 번 왔는데도 접대하는 절차를 편리하고 검소하게 하여 고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다시 금화현감을 거쳐 1570년(선조 3) 정읍현감으로 제수되어 만 5년 동안 선정을 쌓았다. 1575년(선조 8) 회덕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 간 청렴결백한 정사를 펼쳐 백성은 풍성하고 넉넉한 삶을 살았다. 1582년(선조 15) 경산현령으로 나아가 민본주의를 실천하여 안팎으로 표창하는 은전을 받았고, 1588년(선조 21) 온양군수로 승직되었다. 부임 후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비축하여 백성들이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에게 병기와 군량을 나누어 주자 모두가 감탄했다. 이 때 한 관리가 울면서 말하기를 “지킬 군병이 없고 왜적은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무엇을 믿고 이 고을에 계십니까?” 하니, “나는 봉강(封疆)에서 주는 것만 알 뿐 다른 일은 알지 못한다.” 하면서 의연하자 백성과 관리들 중에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이를 알고 가상히 여겨 표창을 내리고 곧 체직(遞職)하였다.
 1594년(선조 27)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이 되고 이듬해 전설사수(典設司守)에 승직되고 그 해 가을에는 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특별히 절충(折衝)으로 가자하여 오위장(五衛將)으로 제수되고 다음 해 황해도 봉산에서 별세하였다.
 포천 · 정읍 · 회덕 · 경산에 혜정(惠政)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에 있다. 묘갈명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썼다.
강년(康秊) 1858∼190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대군의 18대손으로 기태(起台)의 아들이다. 류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기개가 있고 담력이 컸으며 문사에도 능했다.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행 용양위부사과로 선전관을 지내고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일대의 동학군을 지휘하여 왜병과 탐관오리들을 무찌르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부일관리를 처벌하고 이어 마고산성에서 문경 주둔 일본군과 접전, 적군의 수괴를 사살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1896년 1월 29일 300여 의병을 이끌고 제천 류인석의 병진에 합류, 유격장이 되어 수안보에 있는 적의 병참기지를 공격하고 조령 관문을 차단, 병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4월 제천전투의 참패로 의병진이 해산되고 류인석의 뒤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무송 · 집안 · 통화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3년 뒤에 귀국, 단양 금채동에 머물면서 다시 창의를 준비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1907년(순종 1)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태황제가 강제 선위되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영춘에서 다시 창의하여 원주의 민긍호(閔肯鎬) 의병진과 합세, 원주 무기소에서 많은 무기를 얻고 충주를 공격하고 이어 제천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해 7월에 고종태황제로부터 도체찰사 밀지를 제수받고 또 같은 달 제천 의림지에서 40여 의병진이 모여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초곡 · 문경 · 갈평 등지에서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그 범위를 경상 · 충청 · 강원 · 경기지역으로 넓혀 가면서 싸우는 곳마다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겨울 서울 진공작전의 실패로 가평 광익산에서 후퇴하면서 용소동 · 백담사 · 양양 그리고 4월에는 안동 서벽에서, 5월에는 봉화 재산 등 전투에서 탁월한 전법으로 크게 이겼으나 6월 4일 청풍 작성 금수산 전투에서 적의 피습을 받아 복사뼈에 총을 맞고 체포됨으로써 13년간의 항일 의병운동을 마감하고 10월 13일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고 갈평에 전승비, 왕릉 역전에 기념비, 제천 의림지에 전적추모비, 가은 완장리에 기적비, 독립기념관에 시비 등이 세워졌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있다.
건(楗) 1505∼157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국한(國閑), 대군의 5대손으로 전성군 대(팾)의 아들이다.
 1542년(중종 37) 11월 정시 갑과에 급제하고 병조에 있다가 1561년(명종 16) 4월에 동부승지가 되고 같은 해 10월 공조참판에 올랐다가 한달만에 개성부 유수로 나아가 많은 치적을 쌓았다. 1565년(명종 20) 1월 예조참판이 되고 2년 뒤에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경달(敬達) 1783∼184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13대손으로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이며 무과로 군수를 지낸 현욱(顯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상산김씨 광조(光祚)의 딸이다. 배위는 청풍김씨 진주(鎭周)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내 · 외직을 두루 역임한 다음 1846년(헌종 12) 윤5월 2일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제수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주을곡 정좌이다.
경록(慶祿) 1533∼159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백수(伯綬), 대군의 6대손으로 오위장 간(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무과에 나가 연속 두 번 장원하고 선전관으로 선발되었다. 이어서 단성현감 · 호조좌랑 · 하동현감 · 고성현령을 역임하고 치적을 쌓아 경흥부사로 발탁되었다. 1587년(선조 20) 경흥부사 재임시 여진족의 녹둔도(鹿屯島) 기습 내침으로 우리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군민 160여 명이 나포당했으며 말 15필을 약탈당하자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1588년(선조 21) 7월 14일 제1차 정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피납된 160여 명의 구출과 소수의 적을 살해했을 뿐 우리측 피해는 엄청나게 커서 백의종군으로 입공자속(立功自贖)하라는 문책을 받았다. 4개월 뒤 대대적인 2차 정벌에서 여진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 명을 죽였으며 말 9필과 소 20여 두를 노획하였다. 이때 백의종군을 풀고 나주목사로 재기용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그러나 나주는 대읍이라 문관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대간의 주장이 있어 김해부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김해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도총부 경력(經歷)으로 잠시 있다가 나주목사가 되었으며 선정을 베푼 공을 인정받아 선조대왕으로부터 표리(表裏) 1습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때 용인전투에서 전라 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관군의 중위장으로, 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이 해 겨울에 통정대부에 올라 제주목사로 승진하였다. 1593년(선조 26) 제주목사 재임 중 초병 3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선조대왕을 호위하겠다는 장계(狀啓)를 올리고 이어 지방산물을 해로를 통하여 의주행재소로 보냈다. 1598년(선조 31) 봄에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분상(奔喪)하여 바다를 건너는 도중 다시 임지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임지로 돌아가 낮에는 관복으로 정사를 보고 밤에는 상복으로 집상(執喪)하였다. 1599년(선조 32) 여름 제주목사 7년이란 최장기 재임기록을 남기고 임지에서 순직했다. 조정으로부터 순충적덕명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완녕부원군에 증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선영하에 있다. 장유(張維)가 쓴 신도비가 있다.
경우(景宇) 1801∼188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성서(聖瑞), 호는 운고(雲皐), 초휘는 경순(景純). 대군의 16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2대손으로 증 병조판서 석구(石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송심씨로 삽(鈒)의 딸이다. 숙부 증 영의정 완흥군 철구(鐵求)의 계자이다.
 별천으로 선전관을 거쳐 장연 · 창성 · 진주 · 선천 · 양주 등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1849년(헌종 15) 어영대장에 이어 1852년(철종 3)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총융사 · 좌변포도대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62년(철종 13) 형조참판시 가자되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좌변포도대장으로 방화범을 잡지 못한 문책으로 전라도에 유배됐다가 고종태황제가 즉위한 뒤 판의금부사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총융사 등의 직을 번갈아 역임한 다음 1886년(고종 23)에 친군별영사가 되었으며 완릉군(完陵君)에 봉군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계좌이다.
경운(卿雲) 1556∼161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군서(君瑞), 호는 정양재(靜養齋), 대군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첨지 극성(克成)이다. 어머니는 평택임씨로 전한(典翰) 수형(秀亨)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이 되고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이어서 지평 · 헌납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흥해군수로 나아가 많은 치적을 쌓았다. 1616년(광해군 8)에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올랐다. 저서로 <정양재집>이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 대장산에 있다.
경유(慶裕) 1562∼1620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 [(광해군 12)]
 자는 자수(子綬), 대군의 7대손으로 오위장 간(幹)의 아들이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시서(詩書)가 능하였으며 겸하여 무예를 갖추었다. 무과에 등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93년(선조 26) 영암군수로 승직되어 지방의 산물과 군량을 모아 뱃길을 이용하여 의주 행재소 또는 관군 진영으로 보냈다. 1595년(선조 28) 겨울 풍랑으로 운송선이 침몰하여 인명과 물자의 손실이 많아 이에 대한 도의적 문책으로 파직에 이르렀다. 이 때 임금은 공을 아깝게 여겨 봉산군수로 전직케 하였다. 재직 3년만에 치적을 쌓아 조정으로부터 표창이 내려졌으나 부친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601년(선조 34)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제수되고 1603년(선조 36) 한성판윤에 가자되었다. 봉산에 혜정비(惠政碑)가 있고 청백리 칭호를 받았다.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 병조판서 완원군(完原君)에 증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 선영하에 있다.
계(?) 1603∼164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희원(熙遠), 호는 명고(鳴皐). 대군의 7대손이며 강성도정의 현손으로 정랑 진영(晉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고령신씨 지중추부사 식(湜)의 딸이다. 배위는 여주이씨 목사 지정(志定)의 딸이다.
 1621년(광해군 13) 유학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24년(인조 2) 사정에 출사했으며,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637년(인조 15) 지평 · 정언 · 장령, 1638년(인조 16) 수찬 · 집의, 1639년(인조 17) 필선 · 사간 등을 지냈다. 간관으로 있으면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주화파로서 척화파 김상헌(金尙憲)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641년(인조 19) 말 선천부사로 있을 때에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이 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으로 처형을 받게 되자 구명책으로 최명길 · 리경여 · 신익성(申翊聖) ·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는 사실과, 우리 나라의 음사(陰事) 12조를 고하였다. 청나라 장군은 그를 국가와 왕을 배신하는 자로 판단하고 우리 나라에서 처벌하도록 연락하여 조정에서 의금부도사 정석문(鄭錫文)을 보내어 1642년 참수하였다. 문장과 시에 능하였다.
 묘소는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구만리 가족동에 있다.
광윤(光胤) 1490~153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사원(嗣元), 대군의 4대손으로 파성군 철동(哲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초계변씨로 현감 담(?)의 딸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관대하여 장자의 풍도가 있었다. 1516년(중종 11)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로 첫 벼슬길에 오르고 얼마 뒤에 사헌부 감찰(監察)로 승직, 백관을 규찰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직분을 다하였으나, 간흉배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의 농간으로 기묘 · 신사의 두 사화를 겪는 와중에서 1520년(중종 15) 사직서령(社稷署令)으로 옮겼다. 1523년(중종 18) 통정대부으로 가자(加資)되어 돈녕부 도정으로 승직되었다. 1530년(중종 25) 풍덕군수로 제수되어 많은 치적을 남기고 임지에서 별세하였다. 증 가선대부 형조판서직을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에 있다. 묘갈명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