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령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0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창(啓昌) 1569∼ ?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성보(聖輔), 후령군의 5대손이며 안변부사 계남(季男)의 아들이다. 성균관 진사로 건원릉 참봉을 지내고 통훈대부로 행 전옥서(典獄署) 봉사(奉事)를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류희분(柳希奮 : ? ∼1623)과 필동(筆洞)에서 이웃에 살았지만 그 집에 한 발걸음도 들여 놓지 않았다. 류희분이 망하자 장유(張維 : 1587∼1638)가 말하기를 “권문세도가가 지척에 있는데도 한 발짝도 들여 놓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배위는 평해손씨 간(侃)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광석산 선영하 묘좌이다.
광하(廣厦) 1676∼ ?    파명:후령군(厚寧君)
  후식(厚植)의 3남. 종하(宗厦)의 아우. 후령군 7대손. 행 자헌대부 동지중추부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곤양문씨와 온양방씨이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송강리 자좌이다.
석무(碩茂) 1635∼1698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무여(茂汝), 후령군의 8대손이며 통훈대부 군자감정 전(電)의 아들이다.
 배위는 숙부인 동래정씨로 승(昇)의 딸과 숙부인 신평이씨로 참봉 인영(仁榮)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오동에 있다.
세춘(世春) 1715∼1798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여원(汝元), 성하(成厦)의 3남이며 후령군의 8대손. 자헌대부 행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로 처한(處漢)의 딸이다.
 묘소는 석봉(石峯) 큰 길 아래에 있다.
여경(餘慶) ? ∼ ?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운선(云善), 후령군의 현손이다. 1556년(명종 11) 2월에 시행된 별시(別試)에 중시 대책(重試對策)으로 병과에 급제, 목사(牧使)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배위는 남원양씨 윤심(允諶)의 딸이다. 묘소는 불명하다.
종하(宗厦) 1666∼?    파명:후령군(厚寧君)
  탁룡(퀺龍)의 손자이며 후령군 7대손. 후식(厚植)의 아들이다. 통덕랑 사간원 헌납으로부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부인 반남박씨로 과의교위(果懿校尉) 원충(元忠)의 딸이다.
 묘소는 선영하 신좌이다.
진룡(鎭龍) 1854~1906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용우(龍雨), 홍달(弘達)의 아들이며 후령군의 13대손이다. 1886년(고종 23) 절충장군이 되어 행 용양위 부사과 겸 오위장이 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이다.
 묘소는 선영 하 자좌에 있다.
탁룡(퀺龍) 1585∼ ?    파명:후령군(厚寧君)
  후령군의 5대손이며 수의부위(修依副尉) 경인(敬仁)의 장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 · 가의대부(嘉義大夫)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했다.
 배위는 숙부인 현풍곽씨로 부사과 동(洞)의 딸과 숙부인 남원양씨가 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송강리 서당골 미좌에 합장했다.
태양(泰陽) 1839∼1906    파명:후령군(厚寧君)
  초휘는 선양(善陽), 자는 덕경(德景), 호는 괴정(槐亭). 후령군의 12대손이며 현련(顯璉)의 아들이다. 통정대부로서 행 병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신평이씨로 인덕(隣德)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화양리 통동 해좌이다.
현기(顯基) 1763∼ ?    파명:후령군(厚寧君)
  자는 혜지(惠之), 후령군의 11대손이며 정상(鼎詳)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행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신천강씨이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금마면 송강리 유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