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성경(晟慶) 1570∼1606    파명:한남군(漢南君)
  성경(晟慶) [1570(선조 3)∼1606(선조 39)]
 호는 파은(波隱), 자는 일휴(日休), 한남군의 현손이며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민첩하여 7, 8세 때부터 독서하여 대의를 통하고 12세에 감시 초시에 합격하여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27세 때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성균관 학유(學諭)를 제수받아 거산찰방이 되었다가 곧 천거되어 예문관으로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설서를 배명받아 예조좌랑으로 승진하고 사헌부 지평 겸 사서와 홍문관에 참여하고 수찬을 지나 부교리로 겸사서하고 지제교로 함경북도 평사로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부교리가 되고 장연군수로 나아갔다가 부교리로 송환되었다. 간사한 사람들의 거리낌을 도모하는 바 되어 삼화현령으로 나아가게 되어 선조대왕에게 인사드릴 때 임금은 호초와 당선(唐扇)을 특별히 하사하고 부채면에다 송나라 선비 황간(黃幹)의 시를 써주었다.

멀리 보이는 나무는 위아래로 나뉘고
편편한 섬은 반이 있는듯 없는듯 하다.
야트막한 정자는 빽빽한 대나무로 더 낮고
작은 배는 찬 갈대 속으로 숨는도다.
물결이 구르니 고기는 깊이 들어가고
석양에 까마귀가 어지럽게 부르짖는구나.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귀공자는
늙기 전에 헤아려 돌아올 지어다.
(遠樹分高下 平湖半有無 短亭低密竹 小艇隱寒蘆 轉浪魚深入 斜陽鴉亂呼 自慙貴公子 未老賦歸歟)

 이 시 가운데 사어(辭語)의 작은 뜻은 가히 송환의 명령이 머잖아 내릴 것을 볼 수 있는데 재관 얼마 후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뛰어나게 의롭고 영특하고 준수한 인물이 마침내 임금의 큰 베풂을 능히 받지 못하였다. 슬프고 아까웠다. 하늘은 어찌 이를 이루어 일찍하고 이를 빼앗기를 빠르게 하며, 어찌 기운이 스며들게 재촉하고 청숙한 성품인 사람을 요사케 하였는가.”
 호조판서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권대재(權大載)가 지었다. 묘갈문과 가승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고로는 <산성당기(山性堂記)>가 있다.
성우(聖宇) 1903∼    파명:한남군(漢南君)
  성우(聖宇) [1903∼ ]
 한남군의 16대손으로 정병의 아들이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단정하고 청수하였고 천성이 인후하고 공리를 탐내지 않고 부지런하였다. 모친을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를 위로하며 외로움과 소외감이 없도록 정성껏 보살펴 드렸다. 남의 집 일을 하다가도 별식이 있으면 먹지 않고 부친에게 가져가 올렸고 항상 부친의 건강과 평안에 유의하여 장수하도록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아들에게는 인륜과 도리로 가정교육을 철저히 하여 동네 사람들이 `군자요 효자\'라고 칭송을 하였다. 부친이 80세가 넘어 노환이 들자 전국의 명의를 찾아다니며 치료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사경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어 수차 입에 넣어드렸으나 효험이 없이 87세로 타계하였다. 부여군 홍산면 천보산 기우제봉에 안장하였다.
 험한 산중 묘앞에 묘막을 가설하고 보릿가루로 연명하며 묘를 지키며 호곡을 계속하니 날이 갈수록 건강이 쇠약하여 아들이 귀가를 읍소하였으나 불응하였다. 홍산 유림들의 간곡한 만류로 백여 일만에야 하산하고 부친을 돌아가게 한 죄인으로서 궤연(?筵)을 차려 조석으로 상식 호곡하여 3년상을 마치니 부여군에서 화제가 되고 수십 명이 찾아와 위로와 찬사를 보냈다. 신문에도 효행이 보도된 바 있으며 청원군수 · 죽계서원장 · 청주향교 전교 · 성균관장의 효자상과 성균관장의 효자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아들 두성(1926∼  )은 6 · 25전쟁 당시 군인으로 참전하여 중동부전선에서 전투 중 적탄에 피격되어 양족의 절단상을 입은 상이용사이다. 목발과 지팡이에 의지하는 불편한 몸을 돌보지 않고 평소 부친의 효성에 감동하여 효도가 몸에 배어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어 새마음찾기운동본부, 청주향교 전교, 충북 도지사, 청원군수, 대전지방 원호청장, 3군사령관 등에서 수여하는 효자상과 선행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종약원 청원군분원장으로 숭조돈종에 공이 지대하여 이사장상을 받은(1994) 외에 감사장도 5회나 받았다.
 또한 손자 기춘(起春)은 현재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나 조부와 부친이 다 효자이니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껏 모시며 불편한 몸인 부친의 수족이 되어 공무에 충실하며, 가정사에도 효행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모범 공무원상을 2회나 받아 인근 주민과 대소가의 칭송을 받고 있다.
진경(震慶) 1577∼?    파명:한남군(漢南君)
  진경(震慶) [1577(선조 10)∼? ]
 한남군의 4대손이며 병사(兵使)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 우방어사 (京畿 右防禦使)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