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관후(觀?) 1721∼1785    파명:덕원군(德源君)
  관후(觀텋) [1721(경종 1)∼1785(정조 9)]
 자는 경빈(景賓), 덕원군의 8대손으로 성실하고 어질며 관대하고 효성과 검소한 정신으로 살았으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선생의 경(敬) · 신(愼) · 언(言) · 행(行)을 실천하였다.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인 연안김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 산 건좌에 쌍분이다.
동노(東老) 1625∼1691    파명:덕원군(德源君)
  동노(東老) [1625(인조 3)∼1691(숙종 17)]
 자는 공망(公望), 덕원군 5대손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전주목사를 지냈다.
 12살 어린나이에도 효성이 지극하여 오직 양친을 극진히 봉양하였을뿐 아니라 선조를 모심에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여러 번 벼슬자리를 주었으나 사양하였다. 나중에는 가선대부 강양도 방어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 유좌에 합폄이다.
만(曼) ? ∼ ?    파명:덕원군(德源君)
  만(曼) [ ? ∼ ? ]
 덕원군의 8대손으로 1665년(현종 6) 별시을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충의위(忠義횞)로 배위는 전주최씨이고 묘소는 양주에 모셨다가 1975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호연마을 계좌정향에 합폄이다.
문주(文柱) 1653∼1704    파명:덕원군(德源君)
  문주(文柱) [1653(효종 4)∼1704(숙종 30)]
 자는 욱재(郁哉), 덕원군의 6대손이며 동노의 2남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어려서부터 대장부의 기상이 있었으며 학문을 즐겼다. 무과에 합격하여 행어모장군 선전관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파평윤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에 합폄이다.
배달(培達) 1550∼1609    파명:덕원군(德源君)
  배달(培達) [1550(명종 5)∼1609(광해군 1)]
 자는 달부(達夫), 호는 수소재(守素齋). 숭선군의 증손으로 천성이 순수하고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약관에 율곡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급제한 후 면천군수를 지냈다.
 1609년(광해군 1)에 별세하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贈) 숙부인(淑夫人) 화순최씨로 호군 응벽(應壁)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고암리 오좌였으나 1975년 고양으로 천묘할 때 파분(破墳)을 못해 석수공을 구해 파분한 바 376년간 변함 없이 그대로 모셔져 있어 원형 그대로 이장하였다. 현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유동 호연 계좌정향이다.
복화(福和) 1712∼1779    파명:덕원군(德源君)
  복화(福和) [1712(숙종 38)∼1779(정조 3)]
 자는 경여(景汝), 호는 영모당(永慕堂). 덕원군의 8대손이며 임진왜란 의병장 선무원종 1등공신 호성군 주(柱)의 5대손이고 지평 성기(聖麒)의 아들이다.
 효행이 탁이하므로 1806년(순조 6)에 국가에서 포상으로 효(孝)의 정려문 영모당(永慕堂)이라 새긴 편액을 내렸다. 당시 예조판서 이익회(李翊會 : 1767∼1843)가 전서하였다. 그 후 영모당 터전이 습기가 차는 등 좋지 않아 1967년 현 위치에 옮겨 보수하였다. 교지문집이 있다.
 묘소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산8번지 행지산(行止山)에 있다. 영모당은 전주시 호성동 한사월촌 앞에 있다.
순암(純?) 1597∼1656    파명:덕원군(德源君)
  순암(純촑) [1597(선조 30)∼1656(효종 7)]
 자는 유훈(幼薰), 호는 만한당(晩閒堂). 금계군의 4남이며 배위는 숙인 성산이씨로 양천현령 증 참판 민선(敏善)의 딸과 숙인 경주김씨로 통정 몽현(夢賢)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파천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북청판관으로 있는 중형 순형(純馨)이 공의 충정과 창의지심(倡儀之心)을 인정하여 급히 불러 형제가 공조하여 격문을 돌려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남하하다가 강화가 이루어져 중도에서 해산하였다. 1642년(인조 20)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43년(인조 21) 영남도사(嶺南都事)가 되고 1644년(인조 22) 예조정랑을 거쳐 1645년(인조 23)에는 사헌부 지평 겸 기주관(記注官)을 역임하였다. 이 때 임금이 정사를 부당하게 처리했음을 간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일시 정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호남관서 도사 · 안주판관 · 경성판관 · 장악원 첨정 · 옥천군수를 두루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이다. 숭모사(崇慕祠)는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 어곡동에 있다.
순형(純馨) 1580∼1648    파명:덕원군(德源君)
  순형(純馨) [1580(선조 13)∼1648(인조 26)]
 자는 계훈(季薰), 호는 만희당(晩喜堂). 금계군의 차남으로 숙부 금평군 의수(義壽)에게 입적하였다. 배위는 숙인(淑人) 인동조씨로 삼락(三樂)의 딸이다.
 어려서 간역(簡易) 최립(崔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06년(선조 39) 27세에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보내 사사하고 이어 폐모론이 논의됨에, 1615년(광해군 7) 성균관생 300명과 더불어 연서(連書)로 불가함을 상소 극간하였으나 1618년(광해군 10) 드디어 대비를 폐하고 간하던 자를 모두 벌하게 되자 공도 금고 10년형을 받고 투옥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5년만에 풀려났다.
 1631년(인조 9) 의금부 도사가 되고 1635년(인조 13)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判校)로 특진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북청도호부 판관으로 전직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함경도에 격문을 돌려 의병 3백 명을 모집하여 남하, 함흥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이루어져 병사를 해산시키고 돌아갔다. 그 후 당쟁으로 모함을 받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1648년(인조 26) 2월 1일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산45번지 사좌해향이다.
시민(時民) 1590∼1632    파명:덕원군(德源君)
  시민(時民) [1590(선조 23)∼1632(인조 10)]
 덕원군 4대손이며, 평성도정의 2남으로 자는 노언(魯彦)이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평강신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 유좌이며 합폄이다.
의용(儀用) 1827∼1894    파명:덕원군(德源君)
  의용(儀用) [1827(순조 27)∼1894(고종 31)]
 자는 영백(英伯), 호는 해사(海史). 덕원군의 12대손이며 복화의 현손이고 생원 계락(繼洛)의 손자이다. 가선대부 행 동지돈녕부사 승조(承祚)의 아들로 1876년(고종 13) 식년 전시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교지문집이 있다.
 묘소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