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섭(健燮) 1712∼1792    파명:완원군(完原君)
 건섭(健燮) [1712(숙종 38)∼1792(정조 16)]
 자는 강숙(剛叔), 호는 송암(松菴). 완원군의 9대 종손이고 운흥정의 6대손이며 항(恒)의 계자이다. 벼슬을 마다하고 성균관 좨주(祭酒)인 심육(沈?)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문학에 박식하고 효행 또한 독실했다. 공은 종가에 은거하면서 유교 경전의 하나인 <역경(易經 : 周易)>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기록하였는데, 그 유고(遺稿)가 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파주 종가 앞의 여울목을 `처사탄(處士灘)\'이라 부르는 것도 이때부터라고 전해진다. 공은 대구서씨(1711∼1741)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해주최씨(1725∼1807)와의 사이에 재실(在實) · 재효(在孝) 등 2남과 1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대사헌공묘 아래 간좌 언덕에 모셨다.
관섭(觀燮) 1712∼ ?    파명:완원군(完原君)
 관섭(觀燮) [1712(숙종 38)∼ ?]
 자는 원빈(元賓), 순흥군의 6대손이고 계(棨)의 아들이다.
 1741년(영조 17) 생원 ·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745년(영조 21) 9월, 정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외관직으로 평안도 강동현감을 지냈다. 공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명예를 지켰으나 벼슬의 품계는 높지 않았다.
 공은 증 숙인 풍산홍씨(1712∼1759)와의 사이에 재경(在敬) · 재충(在忠) 등 2남과 3녀를 두었고 증 숙인 원주원씨(1739∼?)와의 사이에 1녀를 두고 별세하여 경기 고양 중면 와곡 자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규승(奎承) 1856∼1938    파명:완원군(完原君)
  규승(奎承) [1856(철종 7)∼1936]
 자는 성기(聖岐), 호는 만촌(晩村). 순흥군의 9대손이며 희석(羲錫)의 계자이다.
 한말 궁내부 친왕부(親王府) 판임(判任) 전위(典衛)를 지냈다. 완원군파 종반(宗班)의 문장(門長)이며 문학으로 파주향교의 직원(直員)이었다.
 공은 완원군의 15대 종손 종구(宗九)와 더불어 1917년 파주 · 양주 유림들과 협력, 선파(璿派) 사패지 종산(宗山)에 성사영묘(聖師影廟)를 축공하고 공부자의 영정을 모시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파주향교의 도약정(都約正)으로 추대되어 율곡 이이의 유교적 도덕을 선양하며, 덕화 · 수기(修己) · 경세(經世)의 뜻을 후세에 기렸다.
 공은 배위 안동김씨(1851∼1910)와의 사이에 근욱(根旭)·근목(根穆) 등 2남과 1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1994년 5월 12일, 파주 문화이해돕기모임과 보성사(普成社)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3리 사무소 마당 종산 언저리에 공의 공덕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근형(根馨) 1865∼1918    파명:완원군(完原君)
 근형(根馨) [1865(고종 2)∼1918]
 자는 미당(美棠), 호는 소계(小溪). 예흥수의 10대손이며 민완(民完)의 계자이다.
 한말 무(武) 육군 정령(正領), 훈3등 가의대부 궁내부 내장원(內藏院) 칙임경(勅任卿), 의정부 육군 법원장을 지냈다. 공은 내부(內部) 칙임 협판 민완(民完)의 계자로 생부는 중추원 주임(奏任) 의관(議官) 태승(台承)이다. 증 정부인(貞夫人) 남원양씨(1864∼?)와의 사이에 명훈(明薰) · 영훈(英薰) · 태훈(泰薰) 등 3남과 3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54세였다. 묘소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 청수동 선영 아래 자좌 언덕에 있다.
복섭(復燮) 1732∼1796    파명:완원군(完原君)
  복섭(復燮) [1732(영조 8)∼1796(정조 20)]
 자는 치양(稚陽), 순흥군의 6대손이며 공(鞏)의 차남이다.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외관직으로 충청도 전의현감, 전라도 김제군수, 경상도 대구도호부사, 밀양도호부사를 지냈다.
 공은 증 숙인(淑人) 해주오씨(1731∼1793)와의 사이에 재령(在寧) · 재용(在容) 등 2남과 1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65세였다. 경기도 용인 구작동 선영 아래 묘좌 언덕에 장례지냈다가 후에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망릉리로 이장했다.
상온(尙溫) 1586∼1646    파명:완원군(完原君)
  상온(尙溫) [1586(선조 19)∼1646(인조 24)]
 자는 상일(尙日), 시호는 죽은(竹隱).
 순흥군의 3남인 정(?)의 아들이며 음사(蔭仕)로 건원릉 참봉 · 병조정랑을 지냈다. 공의 후덕함을 들은 선조대왕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함께 시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공의 글월을 보고서 “하늘이 내린 재사로다(天生之才).”라고 칭찬하며 `죽은(竹隱)\'이라는 호를 내렸다. 공은 증 공인(恭人) 천안전씨(1586∼1645)와의 사이에 훤(萱)과 익(윗쪽에 \'초두\'부수+益) 등 2남을 두고 별세하니 향년 61세였다. 인조대왕이 국사(國師)를 보내어 후하게 부의(賻儀)하였고, 묘소는 전라도 담양도호부 금성 학동리마을 후록 병좌 언덕에 모셨다.
상질(尙質) 1597∼1635    파명:완원군(完原君)
 상질(尙質) [1597(선조 30)∼1635(인조 13)]
 자는 자문(子文), 호는 가주(家州). 순흥군의 장남인 진(캹)의 차남이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9년(인조 7) 11월, 정시 갑과에 장원급제했다. 1626년(인조 4) 병조 세자익위사 세마(洗馬) · 시직(侍直) · 부수(副率) · 위수(衛率)를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 · 헌납(獻納) · 병조좌랑 · 예조좌랑 · 홍문관 부수찬 겸 지제 · 수찬 · 성균관 전적(典籍) · 직강(直講) · 춘추관 기사관(記事官) · 기주관(記注官) ·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내고, 1633년(인조 11) 9월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출두하여 11월 귀경했다. 또 경연(經筵) 시독관(侍讀官) · 예조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자 대제학인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했다. 한편 1637년(인조 15)에는 병자호란 척화신(斥和臣)으로 책훈되었고, 후에 통훈대부 예조 홍문관 부제학에 증직되었다.
 공은 13세에 외간상(外艱喪) 3년을 마치고 외가에서 훈도를 받았다. 공의 스승이 당시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시재(詩才)가 뛰어나 선조대왕이 시문을 찬탄한 권필(權킠)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16세에 제자백가서를 읽으며 문장에 힘썼다. 또 공은 17세에 관례를 올렸는데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 원자사부(元子師傅)인 정엽(鄭曄)의 넷째 사위가 되어 수업받아 사서오경의 대의(大義)를 통달했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일삼자 강원도 춘천에 은거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비로소 성균관에 들었는데 의금부 도사(都事)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6년(인조 4)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었고, 1627년(인조 5) 1월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를 모시고 전라도 전주로 갔다. 그 곳에 머물 때에 상소를 올려 항해(航海)와 강화(講和)의 의론을 통탄하며 강하게 배척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 원종대왕(元宗大王) 추숭(追崇)의 의론이 크게 일어나 이귀(李貴)가 이를 주장하였다. 그러자 공은 사간원 정언으로서 반대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파직되었고 12월에 다시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1634년(인조 12) 8월, 원종대왕 추숭의 의론이 다시 일어나 이조판서인 최명길이 차자(箚子)하여 태묘(太廟)에 합부(合쯊)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홍문관 교리의 직책으로 부제학 김광현(金光炫) · 부수찬 이시해(李時楷) · 사헌부 지평 윤명은(尹鳴殷)과 함께 연차(聯箚)하여 영의정 윤방(尹昉) · 우의정 김유(金?) · 삼사(三司)와 함께 힘써 다투어 간했다. 그러나 인조대왕이 매우 노여워하며 그 계사(啓辭)를 준엄하게 다스리니 공은 삭탈관직 당하였고, 그 해 10월 북쪽 변방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이를 일컬어 `한 시대의 청의(一時淸議)\'라 했다. 1635년(인조 13) 10월,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는 길에 강원도 회양에 이르렀을 때 숙환인 창증(脹症)이 심하게 도져 동월 5일 객사에서 별세하니 향년 39세였다. 사후에 인조대왕은 특명을 내려 복관직되었다.
 당대의 사림들이 곡을 하며 “아첨하지 아니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은 신하가 저세상으로 떠나 가는구나(直臣亡).”라고 하여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학문이 깊어 세칭 삼유신(三儒臣) 중의 한 사람이라고 칭해지는데, 삼유신이란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 1597∼1673), 그리고 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에게는 문집으로 가주집(家州集)(6권 1책, 인본)이 있는데, 사자(嗣子) 훤이 편집하였고 정두경이 서(序)를 썼으며, 1718년(숙종 44)에 손자 조(肇)가 간행했다.
 공은 증 숙부인 초계정씨(1597∼1628)와의 사이에 1남 훤을 두었고, 숙부인 진주강씨 (1608∼1636)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천곡 묘좌이고 비석을 세웠다.
석구(錫九) 1880∼1956    파명:완원군(完原君)
  석구(錫九) [1880(고종 17)∼1956]
 자는 사윤(思潤), 초명은 혁구(赫九), 호는 학봉(學峯). 부흥도정의 12대손이며 두훈(斗薰)의 장남이다. 공은 1925년 3월부터 1926년 11월까지 시대일보 사장을 지내면서 육영사업에 뜻을 두었다. 1922년 동아신탁주식회사 감사, 1924년 경성식산주식회사 취체역, 1927년 호서은행 취체역 등으로 실업계에서 활동하며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교육 독지가가 되었다. 1926년 4월 27일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교장 조동식) 인가를 얻어 천도교로부터 인수한 후, 동년 9월 9일 30만원(출연희사 25만원, 재래시설 5만원)의 재단(학교)법인 동덕여학원(同德女學園)으로 변경인가를 받아 동년 9월 19일 교주로 취임하였다. 1927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의 자랑, 사계의 중진\'이라 하여 모성교육(母性敎育)의 공로자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10만원을 희사하여 1933년 10월 14일에는 지금의 서울 창신동에 4,600평 규모의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이 후 여러 차례에 걸쳐 60만원을 흔연히 희사, 동덕재단을 확립하고 경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1941년 7월 3일 교정에 `교주 리석구선생 공적기념비\'를 제막했다.
 공은 1940년 2월 12일 “환갑잔치보다는 사업이 중하다.”고 아들 능우(能雨 :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서리 역임)에게 훈계하고 환갑잔치까지 거두면서 30만 평의 논을 매각, 환갑기념사업으로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이자로써 장학회를 운영, 중등 또는 전문실업학교 재학생으로서 학자금이 없는 학생 3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1940년 3월 3일자 조선일보).
 공은 1946년 9월 25일, 경영이 곤란한 명륜전문학교에 학린사 재단을 희사하였다. 그리하여 재단법인 성균관 대학을 설립, 정규 단과대학 전문부(哲政科 · 經史科 · 豫科)로 승격케 하였다. 이로써 성균관 재단을 확립하고 경영의 기초를 세워 크게 발전토록 공헌했다. 그 공적을 기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정문 옆 정원에 `학봉 리석구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공의 천성이 숭조(崇祖)에 힘써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의 부흥도정 묘역을 정비함에 이르니, 보본(報本)의 효심 역시 가히 수범이라 하겠다.
 배위 파평윤씨(1882∼1963)와의 사이에 용우(龍雨) · 채우(埰雨) · 능우(能雨) 등 3남과 3녀를 두었으며 77세에 별세하였다. 동덕여자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합동 교장(校葬)으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록에 장례지냈고 이듬해 1957년 5월 18일 동덕여대와 성균관대 주최로 묘비를 세웠다.
 
순호(淳鎬) 1775∼ ?    파명:완원군(完原君)
  순호(淳鎬) [1775(영조 51)∼ ?]
 자는 달행(達行), 초휘는 순묵(順默), 호는 송암(松菴). 순흥군의 8대손이며 재춘(在春)의 차남이다. 공은 천성이 독실하고 몸가짐이 예의바르니 그 지방(綾州 : 和順)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선비라고 칭했다. 공은 백형인 경호(慶鎬)(1764∼1827)와 더불어 효심이 깊었으니, 1834년 11월 13일 순조숙황제가 승하하자 설단(設壇)하고 곡배(曲拜)하기를 3년간이나 했다. 그래서 능주군읍 유림들이 글로써 이 형제의 행실이 가상함을 아뢰어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았다. 공은 배위 나주정씨(1774∼?), 청도김씨(1791∼ ?)와의 사이에 운하(雲夏) · 운신(雲新) · 낙영(洛永) 등 3남과 4녀를 두고 별세하였다. 전라도 능주 한천 가옥리 상송정등 건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오(悟) 1673∼1738    파명:완원군(完原君)
  오(悟) [1673(현종 14)∼1738(영조 14)]
 자는 성오(省吾), 완원군의 8대손이고 신흥수의 5대손이며 세기(世箕)의 장남이다.
 공은 무관으로서 외관직인 경기도 장단도호부사 · 우도방어사를 지냈다. 가선대부 · 병조참판 · 의금부 동지의금부사 겸 병조 훈련원 도정(都正) ·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공은 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조부인 송규연(宋奎淵)에 의하여 장수의 추천으로 무관이 되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공은 증 정부인(貞夫人) 장성서씨(1670∼1739)와의 사이에 언섭(彦燮) · 도섭(道燮) 등 2남과 1녀를 두었고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갑좌 언덕에 모셨다. 증 정부인 장성서씨는 향년 70세에 별세하니 경기도 부천 다주 화전동 간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공의 사자(嗣子)인 언섭(1692∼1755)의 자는 국빈(國彬)이다. 별천(別薦)으로 무과(武科)하여 외관직인 경기도 교동수사(喬桐水使) · 평안도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 · 방어사 · 병마절도사, 포도청 좌우포청대장 · 용호영 별장대장 · 통제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증 정부인 파평윤씨와의 사이에 훈(壎) · 곤(坤) · 원(垣) · 은(垠) · 만(쬵) · 재온(在溫) 등 6남을 두고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경기도 부천 다주 화전동 임좌에 장례지냈다. 또한 공의 계자인 도섭(1705∼1775)의 자는 일보(一甫)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외관직인 함경도 갑산도호부와 평안도 강계도호부 선전방어사를 지냈다. 증 숙부인(淑夫人) 해주오씨와 증 숙부인 죽산안씨와의 사이에 연(?) · 집(쏥) · 오(墺) · 경(坰) · 육(堉) · 갱(坑) 등 6남을 두고 별세하니 향년 71세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갑좌 언덕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