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석(晳) 1603∼1685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백이(白而), 호는 옥산(玉山) 또는 서은(鋤隱), 시호는 장정(莊靖). 익양군의 4대손이며 파흥군의 장남이다. 정묘호란 때 임금이 강화로 파천할 때 호종했으며,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오르고 1634년(인조 12)에 별시 을과에 급제했다. 병자호란 때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할 때 호종해서 그 공로로 6품에 올라 예조좌랑을 지냈고, 1638년(인조 16)에는 은산현감이 되었는데 송덕비가 있다. 1641년(인조 19)에는 정언이 되었고 서장관으로서 중국 심양에 다녀와서 1643년(인조 21)에 지평이 되었다. 필선을 거쳐 헌납에 이르고 어사로서 호남을 안렴(按廉)했다.
 다시 1650년(효종 1)에 장영 · 보덕 · 부교리 · 동부승지 · 공조참의를 거쳐 그 해에 동지부사가 되었으며, 여주목사를 지냈는데, 그 치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가 있다. 1667년(현종 8)에 홍주목사에 임하고 1668년(현종 9)에 양양부사가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호조참판이 되었고, 1682년(숙종 8)에 정헌대부 지돈녕에 올랐으며 응교관을 거쳐 정경에 이르렀다. 문집이 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세환(世煥) 1626∼1664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위수(渭첤), 호는 관해당(觀海堂). 익양군의 5대손이며 계림군의 손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여 광릉참봉 · 사마부 감찰을 역임했고, 효행으로 예조좌랑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만송공(晩松公)이 숙환시에 어린 나이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부친이 6일을 더 살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를 인조대왕이 듣고서 어필을 내렸다. 내용인 즉 ‘너희 집 충효는 만세토록 멸하지 않으리라(爾家忠孝 萬世不滅)’라고 했다.
숙(潚) 1566∼1637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원인(元仁), 익양군의 4대손이며 학림정의 장자이다. 일찍이 문학에 밝아 사마시에 합격하고 벼슬이 장성부사에 이르렀다. 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이내 장남 교위에게 명하여 의병들을 불러 모아 뒤를 따르게 하였다. 공이 공주산성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종묘와 사직에 끝없는 수치를 당했으니 신하들은 만번 죽어도 시원치 않는 원통함이다.” 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했을 때 아우 한(瀚)과 함께 소를 올려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배되었다.
 공은 시를 지어 말하기를 `눈물은 서궁의 소를 적시고, 그림자는 호해가에 아른거리네. 똑같이 나라 근심하는 시름으로, 형제가 서로 구름을 쳐다보네(淚濕西宮疏 影婆湖海?一般憂國恨 兄弟相看雲)\'라 했다.
 1623년(인조 1)에 정사훈에 기록되고, 특별히 한성서윤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대왕이 어제시를 내렸는데 `풍류가 어찌 신릉군만 못하리? 화석과 도서에 흥이 남보다 뛰어났네. 식구들 흩어져서 어데로 갔는가? 풀만이 문안에 우거졌는데 날이 막 밝아오네(風流豈減信陵君 花石圖書興不群 家眷飄零何處去 草深門巷日初昕)\'라고 했다.
 그 뒤 세상을 등지고 동막동(東幕洞)에 살았고 고부로 물러가서 지내니 세상에서 양정(陽井)선생이라 일컬었다.
정방(庭芳) 1589∼1620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자형(子馨). 익양군의 4대손이며 금산군의 장남이다. 통훈대부 정3품에 올랐다.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돈녕부 참봉 · 사축서(司畜暑) · 와서(瓦署) · 상의원(尙衣院) 별검(別檢) · 제용감 직장 · 의금부 도사 · 진안현감 · 사옹원 주부 · 장원서 별제 · 돈녕부 판관 · 장례원 사의 · 고창현감 · 수운판관 · 세자익위사 사어 · 한성부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종삼(鍾參) 1794∼1854    파명:익양군(益陽君)
  음직으로 판관을 지냈으며, 서학(西學)을 하다가 낙향하였다.
중장(重章) 1659∼1690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문중(文仲), 익양군의 8세손이며 금산군의 5세손이다. 1682년(숙종 8) 증광대과 사마시 병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에 올라 경상도사를 거쳐 성균관 직강 지제 겸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고 32세에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징(澄) 1581∼?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자함(子涵), 호는 허주(虛舟). 익양군의 4대손이며 학림정의 4남이다. 벼슬은 주부에 올랐고 화가의 자손으로 가업을 이어받았고 문호를 개척하여 각체(各體)를 다 잘했다. 명나라 맹영로(孟永老)에게서 중국풍을 배워서 조선화에서는 볼 수 없는 착색화(着色畵)를 그렸지만 그림의 영묘함이 없는 것이 흠이라 했다.
징구(徵龜) 1641∼1727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여휴(汝休), 익양군의 6대손이며 금산군의 증손이다. 1663년(현종 4)에 사마시에 급제, 1676년(숙종 2)에 정시 병과에 급제했다. 1678년(숙종 4)에 승정원 주서(注書), 1679년(숙종 5)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병조좌랑이 되고, 1680년(숙종 6) 전라도사가 되었다가 이윽고 병조정랑 · 경기도사, 1681년(숙종 7) 사헌부 지평 · 사간원 정언, 이듬해에 다시 병조정랑, 그 이듬해에 강원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정랑을 지냈다. 1685년(숙종 11) 광주첨지 장성현감, 1689년(숙종 15) 장령(掌令) · 지제교(知製)로 뽑히고, 1692년(숙종 18) 시강원 필선으로 있다가 장령 · 연안부사,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 이듬 해엔 옥당의 수찬, 그 이듬 해엔 헌납(獻納), 다음 해에 정주목사, 그 다음 해에 사성(司成) · 필선 · 헌납, 1699년(숙종 25) 사간원의 집의 · 교리 · 응교 · 보덕, 이듬해엔 중화부사(中和府使), 1702년(숙종 28)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1705년(숙종 31) 병조참지 · 장단부사, 이듬해엔 예조참의, 그 이듬해는 좌부승지 · 안악군수, 1708년(숙종 34) 좌승지, 이듬해는 병조참의, 1717년(숙종 43) 공조참의, 이듬해엔 예조참의, 그 이듬해는 가선대부 형조참판 · 예조참판 · 도승지, 1720년(숙종 46) 80세에 자헌대부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지돈녕 겸 지의금부사, 1725년(영조 1) 형조판서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추(樞) 1621∼1681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처중(處中), 호는 운포(雲浦). 익양군의 4대손이며 장림도정의 장남이다. 병자호란에 경서를 등에 지고 산속으로 들어간 뒤로 여러 번 소명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나라에서 대사헌을 증직하고 숙종 때 대명은거행의처사(大明隱居行義處士)라는 별호를 내렸다.
태구(泰龜) 1636∼1724    파명:익양군(益陽君)
  자는 여수(汝守), 익양군의 6대손이며 금산군의 증손이다. 1663년(현종 4)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1676년(숙종 2)에 정시(庭試) 병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에 들어갔다가 삼사 ·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