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원(慶元) 1757∼?    파명:경명군(景明君)
  경명군의 10대손이며 만기(萬起)의 계자로 생부는 춘기(春起)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광주이씨이고 석인(錫仁)의 딸이다.
 1757년(영조 33) 3월 25일에 태어났으며 통정대부 절충장군을 지내고 용양위 부호군 겸 가선대부를 지냈다.
 묘소는 가평 수리현 선영에 있다.
 배위 정부인 풍양조씨는 명수(明秀)의 딸로 1762년(영조 38) 12월 17일에 태어나 1817년(순조 17)에 별세했으며 묘소로 선영에 있다.
관수(觀秀) 1715∼175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국빈(國賓), 경명군 8대손이며 의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함안조씨이며 중여(重呂)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1월 11일에 태어나 1754년(영조 30) 10월 29일에 별세하였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파주 옥석리에 있다.
 배위 숙부인 경주정씨는 증 호참(戶參) 석장(碩章)의 딸로 1714년(숙종 40) 12월 13일에 태어나서 1799년(정조 23) 1월 24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부좌(附左)이다.
근상(根湘) 1876∼1920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영옥(榮玉), 경명군의 13대손이며 의정부 찬성을 지낸 민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주한씨로서 부사를 지내고 병판에 추증된 승렬의 딸이다.
 1876년(고종 13) 9월 14일 태어났으며 1892년(고종 29) 진사, 1895년(고종 32) 군부주사를 시작으로 궁내부참리관 시종 · 포천 · 옥과 ·임실군수 · 비서승 · 교습국장을 역임했으며 1903년 가선대부 · 궁내부협판 · 예식원부장 · 특명전권공사 · 농상협판 · 법부협판을 지냈다. 또 1905년 가의대부 · 학부협판 · 중추원찬의 · 예식원경 · 제도국총재 · 경북관찰사 · 궁내부대신을 지냈다.
 1920년 11월 29일 별세했으며 묘는 충주 가흥리에 있다.
 배위 정부인 의령남씨는 참판을 지낸 치원(致源)의 딸이다. 1874년 9월 23일 태어나서 1945년 6월 26일 별세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금곡에 있다.
 
근택(根澤) 1865∼1919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형옥(衡玉), 호는 송농(松農), 사호(賜號)는 초정(蕉庭). 경명군의 13대손이며 의정부 찬성을 지낸 민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주한씨로 부사를 지내고 병판에 추증된 승렬의 딸이다.
 1865년(고종 12) 8월 11일 태어나 1884년(고종 2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무과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단천부사 · 희천군수 · 길주목사 · 별군직 · 동부승지 · 가선대부 · 한성우윤 · 병참 · 부평부사 · 친위대대장 · 한성판윤 · 경무사 · 함북관찰사 · 경부협판 · 육군참장 · 헌병사령관 · 의정부찬정 · 경위총관 원수부총장 · 육군부장 · 군부대신 · 특명전권공사 · 왕정원경 · 특진관시종무관장 · 농상대신 · 재임 법무대신 · 중추원의장 ·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그리고 1904년 사제(賜第)를 받았다.
 1919년 10월 26일 별세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언남리 구읍 뒤쪽에 있다.
 배위 정부인 진주류씨는 부사를 지낸 운로(雲魯)의 딸로 1866년 5월 19일 태어나서 1907년 12월 21일 별세했다. 묘소는 부좌(附左)이다.
근호(根澔) 1861∼1923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송음(松蔭) 또는 규제(奎齊). 경명군의 13대손이며 의정부 찬성을 지낸 민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주한씨로 부사를 지내고 병판(兵判)에 추증된 승렬(承烈)의 딸이다.
 1861년 7월 13일 태어났으며, 1878년(고종 15) 무과에 합격하였고 별군직(別軍織) 중화부사(中和府使) · 동부승지 · 자산부사 · 평양중군 · 부평 · 농상 · 공부협판(協辦) · 충남 · 전남 · 경기관찰사 · 육군부장 · 육군참모장 · 주전원경 · 배종무관 · 의정부찬정 · 법부대신 · 제실제도국총재 · 지진관 자헌대부를 지냈다.
 1923년 1월 14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청주 문의면 문산리 도당산(陶唐山)에 있다.
 배위 정부인 평택임씨는 부사를 지낸 면호(冕鎬)의 딸이다. 1862년(철종 13) 4월 29일에 태어났다.
단석(端錫) 1625∼1688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유초(有初), 호는 쌍호당(雙壺堂). 경명군의 6대손이며 제형(齊衡)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의령남씨이고 첨지(僉知)를 지낸 두명(斗明)의 딸이다.
 1625년(인조 3) 1월 1일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자라서는 문장에 능하여 1650년(효종 1)에 소과에 합격하고 1660년(현종 1) 대과에 합격하였다.
 1662년(현종 3)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뇌물받은 관원은 용서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논하였다. 병조정랑을 거쳐 사간원에 들어가 병사 가족들의 고충을 논하였고 겨울에는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오고 이후 지평이 되었다.
 효종대왕이 둘째 아들로 대통을 이었는데 승하하자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俊吉)은 대비의 복입는 문제를 의논하면서 “예경(禮敬)에 이르기를, 차자(次子)는 1년이라는 것과 중국의 예절 · 우리 나라의 제도에 비추어 보아도 확실한데, 윤전 · 윤선도(尹善道) 등은 임금을 낮추고 종실(宗室)을 이간시킨다.”는 주장을 하자 공은 동료들을 인도하여 그렇지 않음을 변명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중상모략을 받았을 때 선비 권대시(權大時)가 상소하여 변명하는 데서 임금의 격한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고문까지 받게되니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공이 글을 올려 `상소한 선비를 고문하는 일은 역대 임금께서 없었던 일이오며 하물며 천재(天災)를 걱정하여 바른 말을 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라고 하였으며 뒤에 또 이유(李柚)의 황해도 관찰사를 구속조사함을 구제하는 상소문을 올릴 때 `이상일(李尙逸)은 일하다 저지른 실수에 지나지 않으며 하물며 제때에 바른 말을 올리는 것은 곧 사간원의 직책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여 부당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모두 다섯번 상소하여 바른 말하기를 계속한 결과 여론이 바로 잡혔다.
 또 영남사람 황연(黃堧)이 송시열과 송준길을 알지도 못하는 말로 허위 모략하는 상소를 낸 일이 있었다. 공은 상소하기를 “그가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 기밀에 속하며 고관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것인데 황연이 먼 데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주동자가 있어 남모르게 중상모략할 계책을 쓰면서 선비의 상소로 위장한 것인데 내버려두고 불문에 붙이면 어떻게 앞으로 올 폐단을 막겠습니까.”하였다.
 또 공주(公主)의 집이 정도에 지나친 점과 안홍도에 창고를 세우는데 대한 이견(異見)을 내놓은 논설, 그리고 이원정(李元楨)의 아들이 과거를 볼 때 정실이 작용된 죄가 다 사간원(司諫院) 직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정부에서 보아주고 억눌러 공정하지 못함으로 공은 하나하나 따져 논술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영남에서 소금장사를 하여 민간인과 경쟁하는 일과 황해도에서 쌀을 바치게 하는 일, 내수사의 직원들이 뇌물받고 자기 의견대로 밀어붙이는 일 등을 논술하여 상소를 올렸다.
 김만중(金萬重), 이선(李選), 이숙(李?) 등이 나랏일을 논하다가 임금의 의견을 거슬러 잇달아 귀양가게 되자 공은 글을 올려 말하였다.
 “경연의 신하는 일을 숨김없이 말하는데,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억측하여 처벌한다면 듣는 것은 유혹뿐이오, 말씀 올리는 길은 막혀질 것입니다. 장응일(張應一)이 산릉(山陵 : 寧俊의 호)을 핑계삼아 화를 전가 시킬 계책을 꾸민다는 이선(李選)의 말은 국민의 소리인데, 전하께선 따뜻이 받아들일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흠을 꼬집어 죄를 만드시니 안방에서 화난 것을 시장에서 푸는 것 같으셔서 마음을 편히 하시고 순리대로 적응하시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민정중(閔鼎重)에 있어서도 병으로 정부에 나오지 못하다가 이장하는 날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길에 나서고는 뒤에 자세히 상소할 겨를없이 중병상태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내용을 자세히 알아 보시지않고 견책을 더 하셨으니 이 네 사람은 죄 아닌 것을 처벌하셨으므로 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요.”
 이러한 상소 내용은 당시 사람들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공은 바른말을 함에 있어서 두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공은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부승지에 임명된 뒤에 여러 조(曺)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승하하자 장렬대비(莊烈大妃 : 仁祖의 妃)와 의논하여 9개월간 복입기로 해야한다고 하자 영남사람 도신징(都愼徵)이 예에 어긋난다고 상소, 배척하여 영의정 이하 고관들이 빈청에 모여 네 종류의 예에 대한 학설을 갖고 상소 설명하였다.
 임금은 급히 비망기를 내려 예관(禮官)이하를 모두 구속 문초하여 죄를 결정지으며 “영의정 김수흥은 주무자로서 부정한 주장을 내세웠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해당법조문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다.
 공은 승지로서 임금에게 말씀올리기를 “이것은 장(長)과 중(衆)의 구별을 조목으로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어떻게 임금님의 어버이를 박하게 하여 그렇게 했겠습니까? 서둘러 꾸짖는 벌을 내리시는 것은 신하를 예절로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임금은 공의 관직을 파면하라 명하였는데 1675년(숙종 1)에 양주목사로 나아가 복직되었고 장단부사, 광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에 경상감사에 임명되어 부정공무원을 일소하니 온 도내에 기강이 바로 잡히고, 도내에 모든 물자가 풍부하였다.
 1680년(숙종 6)에 가선대부에 오르고 특사로 북경에 갔다 돌아오자 전라감사, 성천부사에 임명되고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다하여 관북병마절도사로 임명을 받았고 국경경비를 엄중히 하고 관청사무를 깨끗이 정돈하여 엄연히 북문의 기강을 쇄신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충청감사, 1685년(숙종 11)에 함경감사로 임명되었고, 중앙으로 돌아와 중앙직을 역임하였는데, 이조에서 공을 나주목사로 품의하자 임금은 “이 아무개는 재능과 덕망이 다른 사람에게 못하지 않은데 이조에서는 중앙직에 보직하지 않으니 이게 또 어찌된 일이요.”시행하지 못하게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임금의 신임이 나날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덕망이 높아지는데 공은 갑자기 1688년(숙종 14) 6월 1일에 서울자택에서 별세하니 온 조정관원들이 비통해 하였다.
 남구만, 민진장, 이유, 이사, 김창집, 조태채, 이이명 등 정승들이 잇달아 상소하여 임금에게 특별지원과 표창을 요청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특별히 청백의 절개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장천사원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의정부 신곡동의 효자봉 선영에 있으며 좨주 홍직필(洪直弼)이 찬한 신도비가 묘 근처에 있다.
 배위는 전의이씨와 청송심씨가 있다. 정부인 전의이씨는 현령 유원(有源)의 딸이다. 1623년(인조 1) 6월에 태어났으며 기일은 1월 12일이다. 묘소는 의정부 신곡동 효자봉 선영에 있으며, 정부인 청송심씨는 참봉 지영(之瀛)의 딸이다. 기일은 12월 10일이고,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문곡 묘적산(妙寂山) 기슭에 있다.
덕연(德淵) 1676∼1748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득천(得天), 경명군의 7대손이며 유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경주이씨로서 군수를 지내고 이참을 추증받은 수익(壽益)의 딸이다.
 1676년(숙종 2) 4월 8일에 태어났으며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병마부장을 지냈고 가선대부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1748년(영조 24) 4월 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광주 성곶면 주촌에 있다.
 배위는 양주최씨와 전주최씨이다. 정부인 양주최씨는 병사 극참(克參)의 딸이고 정부인 전주최씨는 선(鐥)의 딸이다. 1695년(숙종 21) 4월 11일에 돌아갔다. 묘소는 합폄하였다. 1987년 2월 27일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갈산리 99번지 선영에 세분의 묘를 천묘(遷墓), 합폄하였다.
만기(萬起) 1732∼?    파명:경명군(景明君)
  경명군의 9대손이며 의상(義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전주진씨(全州陳氏)이며 임상(任尙)의 딸이다.
 1732년(영조 8)에 태어났으며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기일은 8월 5일이고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상천3리 수리현 선영에 있다.
 배위 정부인 광주이씨는 석인(錫仁)의 딸로 1733년에 태어났고 기일은 8월 10일이며 묘소는 합폄이다.
명석(明錫) 1642∼1667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여회(汝晦), 경명군의 6대손이고 제형의 차남으로 단석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창녕성씨로서 참봉을 지내고 참의로 추증된 대수(大受)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3월 29일에 태어나 1662년(현종 3)에 대과에 합격하였고 한림관(翰林官)을 시작으로 승문원(承文院)의 부정(副正)까지 지냈다.
 1667년(현종 8) 10월 15일 25세의 젊은 나이로 애석하게 요절하였다.
 묘소는 용인(龍仁)의 직동 부아현에 있다.
 배위 경주김씨는 지평을 지낸 진곤(振坤)의 딸로 1642년(인조 20) 6월 19일에 태어나 1718년(숙종 44) 11월 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합폄이다.
명수(蓂秀) 1715∼1766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시보(時甫), 호는 탄옹(灘翁). 경명군의 8대손이며 복연(復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최씨이며 도사(都事)를 지낸 운익(雲翼)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 2월 6일에 태어나 1766년(영조 42) 4월 3일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금산(錦山) 전도리(前島里)에 있으며 동지돈녕부사에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창원황씨는 관하(觀河)의 딸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 1779년(정조 3)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부좌(附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