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간(간) 1612∼1691    파명:영산군(寧山君)
  영산군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두릉군(杜陵君) 희안(希顔)이다.
 1632년(인조 10) 남선전관(南宣傳官)에 제수되었고, 1635년(인조 13)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25세에 선전관으로 남한산성 몽진시 어가를 모셨으며 1637년(인조 15) 환궁할 적에는 도사감찰로 호위하였다. 1659년(효종 10) 기장현감에 제수되었다. 1665년(현종 6) 청주영장으로 있을 때 임금이 온양에 행차할 때 공이 세류군법(細柳軍法)으로 진을 쳐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듬해 온천 행차 때는 도감별장으로 임금을 모셨는데 이것이 병법과 일치하여 임금에게 칭찬을 들었다.
 외직으로는 은성부사 · 전라좌수사 · 장단부사 ·경상좌병사 · 선천부사 · 회령부사 · 북병사 · 춘천부사 · 남병사 · 평안병사 · 통제사 · 부총관 등을 지냈으며 무고에 연루되어 10년간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1689년(숙종 15) 78세에 부총관을 다시 제수받았다. 남한산성의 호종공신으로 가의도정에 올랐고 80세에 자헌포장이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향년 80세로 별세하니 임금은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방섭(邦燮) 1856∼1895    파명:영산군(寧山君)
  자는 재경(在卿). 상산군의 9대손이며 근재(根載)의 아들이다.
 1887년(고종 24) 경과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배위는 분성김씨 태호(太皓)의 딸이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화동면 설악산에 있다.
성웅(成雄) 1660∼?]    파명:영산군(寧山君)
  영산군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간(톎)이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수의부위 · 적순부위 · 진용교위 · 과의교위 · 어모장군 · 용양위 부사과를 역임하였고 1726년(영조 2) 67세에 품계가 통훈대부 정3품에 이르렀다.
 공은 태어난 양주를 떠나 한성부 창선방에 살다가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흥덕으로 옮겨, 이 지역의 입향조가 되었다.
원기(元麒) 1608∼1637    파명:영산군(寧山君)
  영산군의 현손이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행차했으며 대신들은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로 갔을 때, 공은 강화에 가족을 거느리고 건너갔다. 감찰 김경징(金慶徵)과 부사 이민구(李敏求)가 천연의 강물만 믿고 싸우려 하지 않자 공은 “장수가 제 구실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라는 위태롭게 된다.”라고 탄식하며 “신하가 되어서는 의에 죽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오랑캐들의 강화 침탈이 시작되어 적이 항복을 요구하자 이에 공은 크게 노하여 “나는 조선국의 종신이다. 차라리 도적의 칼에 죽을지언정 살아 포로가 될 수는 없다.”고 외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였다. 부인인 풍천임씨는 참의 응신(應臣)의 딸로 자녀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였다.
지성(知聖) 1686∼1749    파명:영산군(寧山君)
  자는 화국(華國). 중산군의 증손이며 이달(以達)의 아들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다.
 배위는 아주신씨 일성(日星)의 딸과 은진임씨 세정(世貞)의 딸이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공성면 웅이산에 있다.
현옥(鉉玉) 1819∼1875    파명:영산군(寧山君)
  자는 문용(文用), 호는 돈암(遯菴). 영산군의 10대손이다.
 공은 처음부터 과거를 위한 학업이나 문장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공부에는 아예 뜻을 두지 않았다. 허망한 영욕을 멀리한 가운데 오로지 성현의 도를 탐구한, 드높은 선비정신에 시종일관한 지조있는 학자였다. 공의 문집 여기저기에서 스스로를 참된 군자, 참된 인간으로 키우고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볼 수 있다. <돈암집>에 있는 <배부록(拜쯈錄)>, <두류록(頭流錄)>, <화산일기(華山日記)> 등은 간결하고 힘차면서도 유려한 문장으로 공의 인품이 반영되어 있다. <돈암집> 영인본이 간행되어 있다.
현형(鉉亨) 1831∼1884    파명:영산군(寧山君)
  자는 태옥(泰玉) 또는 내옥(乃沃). 영산군의 10대손이다.
 1868년(고종 5)에 종친 정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당시의 폐단을 바른 말로 간하여 책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간택되지 못한 것이 수차례, 당로에 미움을 사 수십 년간 벼슬길이 험난하였다. 결국 남으로 내려가 여기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