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림(康林) 1869∼1929    파명:덕양군(德陽君)
  귀천군 충숙공의 9남인 봉흥도정 경좌의 4남 방(埅)의 차남인 기상(箕商)의 8대손이다.
 무과에 급제, 오위장에 올랐다.
 배위 정부인 광주이씨(1870∼1943)는 관호(寬浩)의 딸이다.
기명(箕明) 1650∼173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문서(文瑞).
 장정공 무(堥)의 차남이다. 1682년(숙종 8)에 진사, 1684년(숙종 10)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참봉 · 직장 · 주부 · 감찰 · 좌랑 · 정랑에 봉직하였고, 외직으로 옥과 · 낭천 · 재령 등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1720년(숙종 46)에 수승(壽陞)으로 통정대부 역조사위장(歷曹司衛將) 돈녕부 도정에 오르고, 1729년(영조 5) 80세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랐다.
 배위 증 정부인 문화류씨(1652∼1718)는 정랑 축(軸)의 딸이다.
기상(箕相) 1628∼168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열경(說卿), 양성공(陽城公) 지(至)의 장남으로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25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672년(현종 13)에 창릉 참봉이 되고, 돈녕부 봉사(奉事)를 거쳐 궁중의 쌀 · 간장 · 겨자 등을 맡은 관아인 사도시 직장(直長)에 차례대로 올랐다. 이 때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가 6년 후에 다시 나아가 선공감 부봉사(副奉事)가 되었다가, 1681년(숙종 7)에 대과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바로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체직되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안 현감이 되어서는 토호(土豪)의 발호를 억누르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며 부지런히 직무를 받들었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동이 독실하고 효심이 깊어 아버님의 병환이 났을 때는 노천에서 하늘에 기도를 드렸고 부친을 여의고는 3년을 날마다 묘소에 올라가 호곡, 덥거나 춥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와도 그치지 않았고 길복(吉服)을 입고서도 오히려 새벽으로 성묘하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다.
 아들 시명(蓍命)의 추은(推恩)으로 가선대부 · 이조참판 · 경연 동지사 · 의금부사 · 춘추관 성균관사 · 세자시강원 좌빈객 ·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정부인 파평윤씨(1629∼1705)는 현령 증 승지 유진(惟晋)의 딸이다.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이다.
기상(箕商) 1734∼ ?    파명:덕양군(德陽君)
 귀천군 충숙공의 9남 봉흥도정 경좌(烱佐)의 4남인 방(埅)의 차남이다.
 음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김해김씨는 성락(聲樂)의 딸이다.
기서(箕敍) 1636∼168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진(君陳).
 사간공 후(텋)의 차남이다. 처음으로 삼조(三曹)의 전(典)을 역임하고, 네 읍의 벼슬을 지냈으며, 통정대부 청도 군수 겸 대구진영 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경주김씨(1638∼1677)는 감사 홍욱(弘郁)의 딸이다.
기석(箕錫) 1633∼1711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수(君受), 봉래군의 손자이며 사간공(司諫公)의 장남이다.
 처음에 봉화현감으로 나아갔으며 돈녕부 판관에 이르렀다.
 1781년(정조 5)에 손자 언제(彦濟)의 추은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의 증직을 받았다.
 배위 증 숙부인 파평윤씨(1635∼1701)는 감사(監司) 득열(得說)의 딸이다.
기언(箕彦) 1697∼174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미(君美), 돈녕부 도정 당(堂)의 아들이다.
 1727년(영조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순릉참봉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사직하였다. 1737년 태릉봉사를 거쳐 명릉봉사 · 정릉직장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영조 16)에 증광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이어 시강원 설서에 임명된 지 며칠 만에 사헌부 장령에 특제되었으며, 그 뒤 정언 · 지평 등을 역임하면서 과거(科擧) · 전정(田政) · 군정(軍政) · 적법(籍法)에 대한 구폐책(救弊策)을 올렸다. 1741년 겨울 통훈대부 시강원 사서로 연행사(燕行使)가 되어 <공성사적도(孔聖事蹟圖)>를 가지고 돌아왔고, 1742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영남지역에 양전사업(量田事業)이 있어 경상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 뒤 양역사정(良役査正) 문제로 공조정랑이 되어 비변사 낭청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이어 무안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배위 숙인 풍양조씨(1696∼1732)는 군수 명정(命禎)의 딸이고, 배위 숙인 경주김씨(1713∼1782)는 언호(彦豪)의 딸이다.
기익(箕翊) 1654~1739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국필(國弼), 호는 시은(市隱), 시호는 양정(良靖). 장정공 무(堥)의 3남이다. 총명함이 뛰어나 6세에 관학(官學)에 취학하였는데 예조판서 김좌명(金佐明 : 1616∼1671)이 매양 기재(奇才)라고 일컬었다.
 1675년(숙종 1)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북관(北퉕)으로 유배되자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그만두고 오직 경사(經史)에만 유의하다가 경신 대출척(庚申大黜陟)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687년(숙종 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우암의 신원(伸寃)을 위한 상소를 올리자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2년 뒤 문음(門蔭)으로 참봉에 기용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가 친정으로 가고 우암이 귀양가서 있는 중에 사약을 받게 되자 제생(諸生)과 함께 대궐을 지키며 호읍(號泣)하였다.
 1696년(숙종 22) 침랑(寢郞)을 배수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
 1701년(숙종 27)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고, 공조(工曹)의 낭(郞)으로 전임되었다.
 1703년(숙종 29) 부평현감이 된 지 몇 달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자 다시 공조를 거쳐서 영동현감으로 나갔다.
 1713년(숙종 39) 60세의 나이로 증광별시 병과에 등과하자 예조좌랑을 배수하고 얼마 후 병조에 전임 후 사헌부 지평을 배수, 양사와 춘방(春坊)을 거쳐 집의 · 사간에 이르렀다가 장악원 정(正) 3품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승정원 동부승지를 탁배(擢拜), 좌승지에 이르렀다. 그 후 호조 · 병조 · 형조의 참의와 대사간, 판결사(判決事)를 두루 거쳤다.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강원감사를 제수받은 후 내직으로 옮겼다.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할 때에 예방승지(禮房承旨 : 우승지)였던 까닭에 가선대부로 올랐다.
 1725년(영조 1)에 호조참판을 지냈고 그 후 병조 · 형조참판과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냈고, 도승지 의금부의 당상을 겸임하였다.
 1733년(영조 9) 80세에 가선대부에 오르고, 1736년(영조 12) 대신들이 선조(先朝 : 효종 · 현종 · 숙종) 때에 지돈녕공(知敦寧公 : 莊靖公)의 고사(故事)를 인증하여 품계를 바꾸어 품계를 올리게 하고, 또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공은 충숙공(忠肅公)의 증손으로 그 곧음을 포상하고 친족을 돈목케 하는 의리로서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자 임금은 특별히 자헌대부 공조판서를 제수하니, 부자가 잇달아 80세를 넘겨 수직(壽職)을 받아 모두들 성세(聖世)의 기로소에 들어가니, 이때 임금은 영수각(靈壽閣)에서 배알을 받고 기로소에 든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였는데 공도 참여하였다.
 공은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젊었을 때 암송한 것을 연세가 80세가 되었어도 때때로 생각해 외웠는데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었다. 평생토록 문사(文士)를 자처하지 않았으나, 그 시가 맑고 주옥같았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음영(吟詠)을 폐지하지 않아 지은 시 3천여 수가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는 기록과 사은연보와 사은유고집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1761(영조) 양정(良靖) 시호를 받았다.
 배위 증 정부인 경주최씨(1652∼1696)는 충청관찰사 상익(商翼)의 딸이다.
 신도비명이 있다.
기일(箕一) 1703∼1772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관지(貫之), 귀산군의 4남인 여성군의 손자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평해황씨는 세추(世樞)의 딸이다.
기정(箕禎) 1653∼171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징(君徵).
 사간공 후(垕)의 3남으로 1689년(숙종 15)에 사마시에 합격, 1691년(숙종 17)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1697년(숙종 23)에 승륙(陞六), 음죽 현감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공조좌랑에 이르렀다.
 배위 숙인 은진송씨(1653∼1713)는 지락(之洛)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