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대군파 약사

회안대군 [1364(공민왕 13)∼1420(세종 2)]


태조고황제의 제4남으로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안변한씨(安邊韓氏)의 소생이다. 1364년 7월 2일, 함흥 귀주동(歸州洞)에서 태어났다.

휘는 방간(芳幹)이요 호는 망우당(忘牛堂)이며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배위는 여흥민씨 · 밀양황씨 · 김포금씨이다. 여흥민씨는 의령군(義寧君) 맹중(孟衆)을 두었으며 밀양황씨는 창녕군(昌寧君) 태(泰)와 딸 둘을 두었다. 또 김포금씨는 금성군(金城君) 선(善)과 금산군(金山君) 중군(仲窘) 두 아들을 두었으니 슬하에 모두 4남 2녀가 있었다. 고려 때 벼슬이 소윤(少尹)에 이르렀고, 태조고황제가 개국할 때의 공으로 회안대군 익찬공신(翊贊功臣) 마한공(馬韓公)으로 봉해져 <제훈록(諸勳錄)>에 등재되었다. 공은 평소 태조 고황제를 효성으로 받들었고 우애와 공경으로 형제를 대하였다.

정종대왕에게는 적사가 없어 차례에 따라 태조고황제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이 왕위 계승권자로 올랐으나 개국 · 정사(定社)에 공이 컸던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이 더 유력하였다.

이때 박포[朴苞 : ?∼1400(정종 2)]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었는데 일찍이 1398년 ` 정도전의 난' 때에 “정도전 등이 정안대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이 높지 않았음을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 현 충북 영동)로 귀양갔었다.

이같이 직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이번에는 “정안대군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회안대군에게 거짓으로 충동질하여 회안대군은 병사를 이끌고 개경에서 교전, 정안대군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평소에 활을 잘 쏘던 회안대군의 장남 의령군 맹중마저도 병석에 눕게 되었고, 박포는 선동한 죄가 무겁다 하여 참수되었다.

태종대왕은 회안대군에게 여러 차례 은교(恩敎)를 베풀었으나 신하들의 쟁론으로 인하여 황해도 토산현(兎山縣)에 정배되니 이는 한양에서 가까운 곳으로, 태종대왕의 뜻이 먼 곳에 보내지 않으려 함이었다.

그 후 자원하여 성향(姓鄕)인 전주 북쪽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鳳東邑) 구만리(九萬里) 천내(川內) 부락에서 은거하다가 태조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복상(服喪)하지 못하였음을 애통하게 여겨 다시는 한강(漢江)을 건너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으며 자손들에게도 전주에 살도록 유언하였다.

이처럼 회안대군은 전주에 머물러 살기 원했으나 형님에 대한 정분이 남다른 태종대왕은 특사를 보내어 상경케 함으로써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1420년(세종 2) 3월 9일 향년 57세로 충남 은진(恩津)에서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들은 태종대왕은 슬퍼한 나머지 음식을 멀리하고 조정의 회의와 장터를 3일간 정휴케 했다. 아울러 대군의 봉작을 복원시키고 곡식과 면직물을 후히 내렸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의와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지 사(地師) 세 명을 파견, 전주 동쪽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법사산(法史山) 을좌원(乙坐原)에 예장하니 그곳이 대군의 만년 유택이 되었다.

1607년(선조 40) 봄에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부조지전(不 之典)을 받드니 묘호(廟號)를 숭덕사(崇德祠)라 하였다. 부부인(府夫人) 3위를 봉안하고 특명으로 사시제(四時祭)를 행하였다. 1863년(고종 6)에 예신(禮臣)을 보내어 부조지전으로 제향을 봉행하였다.

1972년부터 회안대군파종회장 종구(鍾龜)는 1987년에 광감재(曠感齋)와 선산 구릉지에 위토답 1만여 평을 개간 착공, 위토답은 당년에 개간 영농하였고 광감재 재실 중건공사는 1992년에 준공하였다.

종원 분포 상황

서울을 비롯하여 각 도에 분포하였으며 인구수는 약 4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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