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파 약사
남한산성 동북쪽으로 10리의 거리에 덕봉이 있으며 덕봉의 남쪽 남향의 등성에는 선성군 양정공(良靖公)의 유택이 있다.
정종대왕의 4남으로 휘는 무생(茂生)이며 어머니는 충주지씨 고려 찬성사 윤(奫)의 딸이다.
정종대왕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풍덕(豊德)의 강가로 물러나자 공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담백하고 조용한 마음을 스스로 지켜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했다. 당시 왕자들의 집에는 사병을 두어 화의 근원이 되었는데 공만은 깊이 자취를 감추고 향기로운 나무와 꽃잎 속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니, 세종대왕은 학문을 힘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여 배천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후 그 본의를 살펴 알고 불러와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
1454년(단종 2)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졌다. 그 해 5월에 공은 종친, 의빈, 문무백관과 함께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열기도 하였으나 그 국가가 다사다난하였기 때문에 공은 스스로 물러나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한가롭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1872년(고종 9) 3월 고종이 종친부에 하교하기를 “정종대왕의 여러 왕자에 대한 봉작을 논의하여 올바르게 하라.” 하니 회계(回啓)하기를 “정종대왕의 왕자 가운데 다섯 정(正)은 아직 군(君)을 봉하지 못하였고 아홉 군(君)은 이미 봉작은 하였으나 벼슬의 계급이 들쭉날쭉하여 모두 미안합니다.
군을 봉하지 못한 이는 계급이 없는 그대로 군을 봉하여 이미 봉한 제군과 아울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는 것으로 해조(該曹)에 분부하시는 것이 종친의 정의를 독실히 하는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하였다. 비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시망(諡望)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그 후 5일이 지나 공에게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했고 시호를 `양정'이라 내렸다. 시법을 살펴보면 “온화하고 선량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이라하고 너그럽고 화락하며 좋은 이름을 간직하고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하였다. 공의 배위는 세분으로 오천군부인 정씨는 참의 종성(宗誠)의 딸로서 조부는 충의백(忠義伯) 포은(圃隱) 몽주(夢周)이며, 증조는 시중 운관(云瓘)이고, 외조부는 밀직제학 죽산박씨 중용(仲容)이다. 1녀를 두었다. 안강군부인 김씨 는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며 조부는 밀직사 원수(元帥) 종연(宗衍)이며 증조는 부사 정(精)이고 외조부는 개국공신 한양조씨 인옥(仁沃)이다. 1남을 두었다. 평산군부인 한씨는 평산백(平山伯) 후저(後抵)의 후손이다. 한씨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다. 공의 묘소 왼쪽에 정씨, 김씨가 부장되어 있고 한씨는 섬돌 아래에 부장되어 있다.
공은 9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춘산도정(春山都正) 귀손(貴孫), 추천부수( 川副守) 숭덕(崇德) · 명선대부 명산도정(明山都正) 금정(金丁) · 창선대부(彰善大夫) 풍안부수(豊安副守) 옥석(玉石) · 광휘대부(廣徽大夫) 설성부정(雪城副正) 철정(鐵丁) · 석보부수(石保副守) 은정(銀丁) · 승헌대부(承憲大夫) 병산군(屛山君) 말정(末丁) · 명선대부 도성수(陶城守) 천정(千丁) · 덕양부수(德陽副守) 귀정(貴丁)이다. 사위는 조충로(趙忠老) · 오계손(吳繼孫) · 우효손(禹孝孫)이다.
후사가 이어진 집안은 춘산도정 · 명산도정 · 풍안부수 · 설성부정 · 병산군 · 도성수 등 6개파 뿐이고 추천부수 · 석보부수 · 덕양부수는 후사가 없다.
이 6개파는 1965년 12월에 종친회를 발족하여 묘역 수호와 선산 및 위토 보존과 종현 돈목을 꾀하기로 결의하였다. 초대회장에 중화(重和), 2대 원생(源生), 3 · 4 · 5대 선중(善中), 6 · 7대 상윤(商胤), 8 · 9대 응백(應百), 10 · 11대 회장 명준(明埈)으로 맥이 이어지며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선성군 파보는 1807년(순조 7) <정묘보>를 시작으로 1864년(고종 1) <갑자보>, 1900년(광무 4) <경자보>, 1926년 <병인보>, 1959년 <기해보>, 1979년 <기미보>까지 6회 발간했고 1999년 <기묘보보>를 명준회장이 수보위원장이 되어 발간을 착수했다.
선성군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사당 선정묘(宣靖廟)가 있어 매년 음력 7월 칠석날 하오 6시에 제향을 올리며 군의 묘역인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64(구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에서는 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 상오 10시 전국의 일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향제를 올리며 이 때 종친회 총회를 연다. 선성군 묘하에는 재실인 선덕재(宣德齋)가 있고 관리인이 사는 집은 학유재(鶴遊齋)라고 한다. 선성군 묘역내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족 보에 학유정(鶴遊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앞 득수(得水)의 근원이 바로 이 자연 수원이다.
춘산도정 부자 · 풍안부수 부자 · 설성부정 3부자 · 도성수 4부자의 분묘 11기는 임진왜란 후 실전되어 근 300여 년 향화를 받들지 못하던 중 1959년 <기해보> 중간(重刊) 때 산소 서쪽에 영모단(永慕壇)을 설치하여 11위를 봉사하고 있으며 명산도정 이하 홍주(弘胄)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구송산에 있으며 병산군 · 지산군 · 이원군의 묘소는 군 산소 섬돌 아래에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춘산도정 7대손 이하는 경기도 파주시 아동면 영태리에서 군의 16대손인 응만 등의 주선으로 1974년에 파주시 조리면 은곡리로 집단 이장되었으며 풍안부수 이하 산소는 이북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에 있다. 도성수 이하 산소는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 있으며 병산군 이하 지산군 · 이원군 산소는 군 산소 계하에 보존되어 있다. 노저상공(鷺渚相公) 이하 찬성군 구경(龜慶), 세마공 시경(蓍慶), 참판공 홍광(弘匡), 집의공 극광(克匡), 직강공 익로(翼老) 그 외 분의 산소는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산61번지에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노저상공 의 아들 충신 시경(蓍慶)의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있으며 1993년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받아 국비로 보수를 완료하였다. 특히 노저상공 순국 후 1998년 407년만에 공을 모실 문헌묘(文憲廟)가 웅장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조각 · 단청 모두 조선조 초기 고 미술의 재현이다. 판서공 우정(宇鼎) 이하는 충북 괴산에 있다.
조선조 519년 동안 선성군파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이 집안을 빛냈다.
조선조 519년 동안 대과급제자 가운데 전주리씨가 850명으로 제일 많은데 그 중 우리 문중이 28명을, 또한 22명의 전주리씨 정승 중 2명을, 그리고 대제학 7명 중 양원(陽元 : 1526∼1592) 1명이 나왔다. 광복 후 장관 · 대학교수 · 박사 · 정치인 · 실업인 등 뛰어난 인재가 속출했으며 저서를 남긴 사람도 수십명에 달한다.
공은
정종대왕의 4남으로 휘는 무생(茂生)이며 어머니는 충주지씨 고려 찬성사 윤(奫)의 딸이다.
정종대왕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풍덕(豊德)의 강가로 물러나자 공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담백하고 조용한 마음을 스스로 지켜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했다. 당시 왕자들의 집에는 사병을 두어 화의 근원이 되었는데 공만은 깊이 자취를 감추고 향기로운 나무와 꽃잎 속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니, 세종대왕은 학문을 힘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여 배천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후 그 본의를 살펴 알고 불러와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
1454년(단종 2)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졌다. 그 해 5월에 공은 종친, 의빈, 문무백관과 함께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열기도 하였으나 그 국가가 다사다난하였기 때문에 공은 스스로 물러나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한가롭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1872년(고종 9) 3월 고종이 종친부에 하교하기를 “정종대왕의 여러 왕자에 대한 봉작을 논의하여 올바르게 하라.” 하니 회계(回啓)하기를 “정종대왕의 왕자 가운데 다섯 정(正)은 아직 군(君)을 봉하지 못하였고 아홉 군(君)은 이미 봉작은 하였으나 벼슬의 계급이 들쭉날쭉하여 모두 미안합니다.
군을 봉하지 못한 이는 계급이 없는 그대로 군을 봉하여 이미 봉한 제군과 아울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는 것으로 해조(該曹)에 분부하시는 것이 종친의 정의를 독실히 하는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하였다. 비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시망(諡望)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그 후 5일이 지나 공에게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했고 시호를 `양정'이라 내렸다. 시법을 살펴보면 “온화하고 선량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이라하고 너그럽고 화락하며 좋은 이름을 간직하고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하였다. 공의 배위는 세분으로 오천군부인 정씨는 참의 종성(宗誠)의 딸로서 조부는 충의백(忠義伯) 포은(圃隱) 몽주(夢周)이며, 증조는 시중 운관(云瓘)이고, 외조부는 밀직제학 죽산박씨 중용(仲容)이다. 1녀를 두었다. 안강군부인 김씨 는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며 조부는 밀직사 원수(元帥) 종연(宗衍)이며 증조는 부사 정(精)이고 외조부는 개국공신 한양조씨 인옥(仁沃)이다. 1남을 두었다. 평산군부인 한씨는 평산백(平山伯) 후저(後抵)의 후손이다. 한씨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다. 공의 묘소 왼쪽에 정씨, 김씨가 부장되어 있고 한씨는 섬돌 아래에 부장되어 있다.
공은 9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춘산도정(春山都正) 귀손(貴孫), 추천부수( 川副守) 숭덕(崇德) · 명선대부 명산도정(明山都正) 금정(金丁) · 창선대부(彰善大夫) 풍안부수(豊安副守) 옥석(玉石) · 광휘대부(廣徽大夫) 설성부정(雪城副正) 철정(鐵丁) · 석보부수(石保副守) 은정(銀丁) · 승헌대부(承憲大夫) 병산군(屛山君) 말정(末丁) · 명선대부 도성수(陶城守) 천정(千丁) · 덕양부수(德陽副守) 귀정(貴丁)이다. 사위는 조충로(趙忠老) · 오계손(吳繼孫) · 우효손(禹孝孫)이다.
후사가 이어진 집안은 춘산도정 · 명산도정 · 풍안부수 · 설성부정 · 병산군 · 도성수 등 6개파 뿐이고 추천부수 · 석보부수 · 덕양부수는 후사가 없다.
이 6개파는 1965년 12월에 종친회를 발족하여 묘역 수호와 선산 및 위토 보존과 종현 돈목을 꾀하기로 결의하였다. 초대회장에 중화(重和), 2대 원생(源生), 3 · 4 · 5대 선중(善中), 6 · 7대 상윤(商胤), 8 · 9대 응백(應百), 10 · 11대 회장 명준(明埈)으로 맥이 이어지며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선성군 파보는 1807년(순조 7) <정묘보>를 시작으로 1864년(고종 1) <갑자보>, 1900년(광무 4) <경자보>, 1926년 <병인보>, 1959년 <기해보>, 1979년 <기미보>까지 6회 발간했고 1999년 <기묘보보>를 명준회장이 수보위원장이 되어 발간을 착수했다.
선성군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사당 선정묘(宣靖廟)가 있어 매년 음력 7월 칠석날 하오 6시에 제향을 올리며 군의 묘역인 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64(구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에서는 매년 양력 11월 둘째 일요일 상오 10시 전국의 일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향제를 올리며 이 때 종친회 총회를 연다. 선성군 묘하에는 재실인 선덕재(宣德齋)가 있고 관리인이 사는 집은 학유재(鶴遊齋)라고 한다. 선성군 묘역내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족 보에 학유정(鶴遊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앞 득수(得水)의 근원이 바로 이 자연 수원이다.
춘산도정 부자 · 풍안부수 부자 · 설성부정 3부자 · 도성수 4부자의 분묘 11기는 임진왜란 후 실전되어 근 300여 년 향화를 받들지 못하던 중 1959년 <기해보> 중간(重刊) 때 산소 서쪽에 영모단(永慕壇)을 설치하여 11위를 봉사하고 있으며 명산도정 이하 홍주(弘胄)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 구송산에 있으며 병산군 · 지산군 · 이원군의 묘소는 군 산소 섬돌 아래에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춘산도정 7대손 이하는 경기도 파주시 아동면 영태리에서 군의 16대손인 응만 등의 주선으로 1974년에 파주시 조리면 은곡리로 집단 이장되었으며 풍안부수 이하 산소는 이북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에 있다. 도성수 이하 산소는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 있으며 병산군 이하 지산군 · 이원군 산소는 군 산소 계하에 보존되어 있다. 노저상공(鷺渚相公) 이하 찬성군 구경(龜慶), 세마공 시경(蓍慶), 참판공 홍광(弘匡), 집의공 극광(克匡), 직강공 익로(翼老) 그 외 분의 산소는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송전리 산61번지에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노저상공 의 아들 충신 시경(蓍慶)의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있으며 1993년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받아 국비로 보수를 완료하였다. 특히 노저상공 순국 후 1998년 407년만에 공을 모실 문헌묘(文憲廟)가 웅장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조각 · 단청 모두 조선조 초기 고 미술의 재현이다. 판서공 우정(宇鼎) 이하는 충북 괴산에 있다.
조선조 519년 동안 선성군파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이 집안을 빛냈다.
조선조 519년 동안 대과급제자 가운데 전주리씨가 850명으로 제일 많은데 그 중 우리 문중이 28명을, 또한 22명의 전주리씨 정승 중 2명을, 그리고 대제학 7명 중 양원(陽元 : 1526∼1592) 1명이 나왔다. 광복 후 장관 · 대학교수 · 박사 · 정치인 · 실업인 등 뛰어난 인재가 속출했으며 저서를 남긴 사람도 수십명에 달한다.
종원 분포 상황
1979년 <기미보>를 토대로 하면 약 2천세대에 관수(冠數) 3,752명이고 동수(童數)는 8,490명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은 20∼30%의 증가가 예측되며 통일 후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그 수는 더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1) 춘산도정 자손은 사당 선정묘가 있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종손부댁을 비롯 파주 · 고양 · 김포 · 가양에 거주하며
2) 명산도정 자손들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와 여미리를 비롯하여 금릉 · 광양 ·황간 · 문의 · 마산 등지에 거주하며
3) 풍안부수 자손은 원래 이북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에 거주했으나 6·25전쟁 이후로 산지사방으로 분산되어 전 종친회장 상윤 댁 대소가만이 시흥·군자 현 안산시에 정착했으나 지금은 서울 시내로 다수 이주하여 생활근거를 잡고 있다.
4) 설성부정 자손들은 이북 개풍군과 황해도 일대에 거주했으나 생사를 모르고 다만 월남한 사람은 충북 괴산, 경북 문경 등지에 흩어져 있으며
5) 병산군 자손은 당진·서산·아산·천안·괴산·충주·제천·원주 등지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6) 도성수 자손은 양주·장단을 비롯하여 경기 일대와 경북 문경에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충남 아산, 전남 화순 등지에 살고 있다.
1) 춘산도정 자손은 사당 선정묘가 있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종손부댁을 비롯 파주 · 고양 · 김포 · 가양에 거주하며
2) 명산도정 자손들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와 여미리를 비롯하여 금릉 · 광양 ·황간 · 문의 · 마산 등지에 거주하며
3) 풍안부수 자손은 원래 이북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에 거주했으나 6·25전쟁 이후로 산지사방으로 분산되어 전 종친회장 상윤 댁 대소가만이 시흥·군자 현 안산시에 정착했으나 지금은 서울 시내로 다수 이주하여 생활근거를 잡고 있다.
4) 설성부정 자손들은 이북 개풍군과 황해도 일대에 거주했으나 생사를 모르고 다만 월남한 사람은 충북 괴산, 경북 문경 등지에 흩어져 있으며
5) 병산군 자손은 당진·서산·아산·천안·괴산·충주·제천·원주 등지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6) 도성수 자손은 양주·장단을 비롯하여 경기 일대와 경북 문경에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충남 아산, 전남 화순 등지에 살고 있다.
종원별
|
인원수
|
생원진사
|
100
|
상신
|
2
|
문과
|
28
|
시호
|
4
|
음관
|
343
|
공신
|
10
|
무과
|
80
|
봉군
|
3
|
남대은일
|
3
|
충신정려
|
7
|
호당
|
3
|
효행
|
15
|
제학
|
2
|
열녀
|
5
|
대제학
|
1
|
합계
|
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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