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군파 약사

석보군(石保君)


정종대왕의 9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해평윤씨이다. 휘는 복생(福生), 호는
검묵당(儉默堂), 시호는 정혜(靖惠)다. 처음에는 정(正), 명선대부에 이르고 석보군 겸 영종정경부사로 추봉됐다.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은 도학군자였다.

당시는 개국초여서 조정이 어수선하였고 정종대왕은 왕위를 동생 태종대왕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풍덕 제릉 어머님의 묘소 밑에 은거할 때 공은 형 수도군과 함께 따라가 부왕을 모실 적에 늘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며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다. 공은 검묵(儉默)을 생활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검묵공자'라고 일컬었다. 이로 인하여 검묵을 당호로 삼았다.

배위는 원주김씨로 판중추부사 대경공(戴敬公) 연지(連枝)의 딸이고 학성군부인(鶴城郡夫人)이다.

고종태황제가 1871년(고종 8)에 정종대왕의 능침인 후릉에 행행할 때 5숙의 종중(정종대왕의 후궁 기씨, 지씨, 이씨, 윤씨, 문씨)의 자손 가운데 건용(健容) 유식(裕植) 규헌(圭憲) 기홍(基鴻) 등이 징을 치며 임금이 거둥하는 수레 앞에서 통분하며 울부짖어 오종의 실적을 낱낱이 알려와 마침내 고종태황제의 윤허를 얻어 5종 종원이 함께 봉군 · 증직 · 시호를 받았고 석보군도 시호를 받았다.

석보군의 산소는 경기도 양주군 미아리 불당동 유좌원에 모셔졌다가 1959년 2월 25일 충북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 묵방산록으로 면례(緬禮)하였다. <면례실행위원> 종손 기풍(基豊), 도유사(都有司) 명용(과천), 유사(有司) 기홍(청안), 기준(과천), 인용(충주), 동찬(음성), 호진(충주), 원국(충주), 동연(음성).

석보군 장례 후 묘지의 둘레 사방 7리의 땅 약 180여 정보를 사패(賜牌) 받아 수호해 오던 중 왕실의 내분과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실전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약 2백년 전에 석보군의 11대손인 좌랑공(佐郞公) 명하(明夏)의 아들 우형(宇炯)이 대과에 급제한 후 군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고양산맥을 여러번 탐색했다. 하루는 미아리에서 그곳 어린 초동들이 모여서 “우리 석보골로 나무하러 가자.”는 말을 듣고 그 초동들에게 사연을 물으니 “저 고개를 넘으면 울창한 숲이 있는데 그곳에 묘가 있어 그전 부터 석보골이라고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형은 초동들과 함께 석보골에 가보니 묘는 형체만 남아 있고 비석은 아래로 떨어져 땅에 묻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석보정(石保正)' 석자가 분명하기로 묘소를 발굴해 본 결과 광(壙) 길이 9척, 광 너비 5척, 지질 황토 바닥은 모래와 고운 흙을 고루 깔았으며 봉분의 흙은 체로 쳐서 잔돌이 하나도 없었다. 발굴 중에 경내에 향취가 풍겼으므로 향목관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묘역내 좌편에 은수저 한 벌이 보존되어 있으므로 매년 젯상 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었다. 즉시 분묘를 재봉축하고 제문을 지어 분향하고 매년 종원이 모여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180여 정보의 사패지는 일제시대 세부측량 당시 자손들의 미신고로 전부가 국유림으로 편입되었다. 광복 후 1956년에 다시 서울시 시유림으로 편입된 후 서울시에서 1 · 4후퇴 때 이북 난민 주거지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 종중은 전국 석보군 종중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동시에 묘역주위 2반보(反步 : 약60평)만이라도 주거 예정지에서 면제코자 명용 · 원국 · 기준(基俊) 등이 합세하여 정부 각처에 누차 진정하고 탄원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피난민은 점차 운집하여 묘역까지 점거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에 부득이 이장하게 되어 전국 길지를 물색하였으나 적지를 발견치 못하던 중 충주에 거주하는 19대손 원국이 임야를 자진 제공함으로써 충북 중원군 소태면 양촌리에 석보군의 산소를 이장하게 되었다.

석보군 정혜공은 1872년(고종 9) 부조지전(不?之典)으로 은혜를 입었으나 종손 광택(光澤)이 후사가 없고 가난하여 봉향치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경자보(庚子譜)> 편찬을 계기로 1902년(광무 6) 봄에 각 소종 제족들이 석보군 묘소에서 회합하고 종손계승을 청안에 사는 동옥(東鈺)의 아들인 선용(璿容)으로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장례원에 제안하여 봉사판(奉祀板)을 얻었으나 몇 칸 사당이라도 세울 도리가 없어 각 소종에 비용을 할당하여 청안사우 (淸安祠宇)를 건립하게 되었다.

1905년(광무 9)에 우선 가묘를 세웠다가, 1930년에 기와집으로 재건하였다. 1984년 음성 거주 기준(基俊)이 당국과 교섭하여 정부보조금 8백만원을 받아 삼문을 개축하고 사우를 보수했다. 1994년 충주 거주 낙진(洛鎭)과 청안 거주 해용(海容)의 노력으로 지방문화재로 승인 신청하여 1995년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제16호로 승인받았다.

1872년(고종 9)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됨으로써 사당을 짓고 분향과 제향을 올릴 수 있었다.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1886년(고종 23) 5월에 태인에 사는 종손 광택의 꿈에 의관이 남루한 한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하는 말이 “너 자느냐?” 하고 세번을 부르더니 “내가 꼭 진도에 귀의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여 주지 않으면 너의 집에 화가 있을 것이다.”고 했다. 놀라 깨어 보니 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역시 같은 날 밤 진도에 사는 인규(麟圭)의 꿈에는 귀한 손님들이 집에 가득히 모여 있는데 집의 문위 가로보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웅대한 건물이 순식간에 새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광택이 봉군(封君)된 교지와 태인향교의 통고문을 받들고 진도에 와서 사당건립이 정체되어 온 사실에 대하여 미안하다는 사실과 꿈을 꾼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꿈에 본 노인은 바로 우리 선령(先靈)인 고로 감히 시일을 지연하여서도 안된다. 또 경비나 신상의 노고를 아껴서도 안 될 것이니 속히 사우를 짓게 하자.”고 하였다. 인규 역시 꿈 이야기를 설 명하니 방안에 모여 있던 다수의 종원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고 사우 건립을 즉석에서 결의하고 한편으로는 사우 건립의 비용을 모금하고 또 한편으로는 터전을 닦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무를 자르고 기와를 운반하는 등, 서두른 결과 약 1개월 여가 지났다. 그런데 그때 그 지방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게다가 농사마저 대흉년이 들어서 부득이 사우 건립을 중단하고 말았다.

2년 후에 다시 사우 건립을 시작하여 완공하였고 1924년 약 56년만에 다시 중수하였다.

원래 터가 협소하고 사방 주위에 민가가 무수히 들어서서 자손들이 늘 근심 걱정하며 서로 방관만 하고 있던 차에 <신유보<辛酉譜)> 즉 1981년 <석보군파보(石保君派譜)> 편찬을 계기로 해서 종친들이 대동단합하고 특히 기호(基昊) · 기담(基譚) · 양진(洋鎭) · 병혁(丙爀) ·중진(重鎭) · 방진(芳鎭) · 기춘(基春) 등 진도 출신 일가들의 활동으로 군의 묘 부근 대지 5백여 평을 매입하여 민가 등을 철거시키는 대역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1994년부터는 기담을 중심으로 진도 종중이 일치단합하여 군의 묘 부근 전답과 임야 5천여 평을 매입하고 묘비단(墓碑壇)을 설치함과 동시에 정후문(正後門)의 설치를 구상 중이다. 영모사(永慕祠)와 청와사(靑瓦祠)의 건축물은 거금 1억5천여 만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선조산(先祖山)에는 해남에서 건너온 거령부령(居寧副令) 진도입도조(珍島入島祖)인 분순교위(奮順校尉) 의 아버지 묘까지 이장 처리하고 부근 경내도 깔끔히 단장하였다.

앞으로는 홍살문과 하마비까지 세울 계획이며 전라남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진도 유적보호지로써 역할을 다하길 바라며 현재 군의 묘역 수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석보군의 어머니 숙의(淑儀)는 정종대왕의 5빈 중의 한 사람이며 해평윤씨 대사헌 방언(邦彦)의 딸이다. 1368년(공민왕 17) 1월 14일에 태어나 1417년(태종 17) 10월 1일 별세하였다. 4왕자 2옹주를 낳았는데 수도군(守道君) · 임언군(林堰君) · 석보군(石保君) · 장천군(長川君)과 인천옹주(仁川翁主) · 함안옹주(咸安翁主)이다.

숙의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독정리(현 고양시 신도읍 오금리) 매현 임좌원에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오는 동안 후손들이 모두 흩어져 사는 바람에 5빈 묘소가 모두 실전되었으므로 15군 후손들이 개풍군 풍덕 광덕산상 오숙의단을 봉축하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어 왔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 숙의의 묘소만은 1백여 년 전 1886년(고종 23) 봄에 4군파 후손들이 보첩에 의거하여 독정리 일대에 모여서 부근 산중을 탐색하던 중 그곳에 사는 한 늙은이가 말하기를 “전설에 윤빈 묘소가 인천옹주 묘소 위에 있었는데 옹주의 외손 함양박씨가 누대에 걸쳐 많이 입장(入葬)하였다는 말이 있다.”고 하므로 그 인천옹주 묘소를 찾아가 보니 그 묘비 후면에 `공정대왕 후궁 해평윤씨묘 재후좌측 오십보허 즉 방언녀이 군주모야(恭靖大王 後宮 海平尹氏墓在後左側 五十步許 卽 邦彦女而 君主母也).'라고 새겨져 있었다.

50보 쯤에 가서 살펴보니 과연 봉분은 퇴락하였고 문관석만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어 봉분앞을 헤쳐보니 묘비는 없어지고 좌대석만 남아 있었다. 이에 봉분을 재봉축하고 사초를 한 후 위토를 마련하여 매년 음력 9월 29일 4군파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받들고 있으며 위토는 4왕자파 명의 즉 고양시 신도읍 오금리 121번지 (임야 220평), 118번지 (전 557평), 101번지 (답 904평), 34의 2번지 (전 627평)을 등기하여 보존하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시도별
세대수
전남 진도
600
충북 충주 / 중원 일대
500
서울시 일원(배천 종중 포함)
400
경기 군포 / 과천
300
전북 정읍 / 신태인
150
충북 음성 / 괴산
150
합계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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