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파 약사

성녕대군


1405년(태종 5)에 태어나서 1418년(태종 18)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별세하였다.

슬하에 혈육이 없어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을 계자로 삼아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나 1453년 (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그 해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무사(無嗣)되고 대군의 부인 창녕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되었다.

1457년(세조 2)에 귀양에서 풀려나 본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친가에 있다가 별세하므로 생사 기록이 없고 신원(伸寃)도 되지 못하다가 순조대왕 때 신원되어 대군 묘소에 단을 세워 그후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다. 1461년(세조 6)에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의 무후로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로 하여금 입계, 봉사케 하였으며 원천군은 1476년(성종 7)에 44세로 별세했다. 성종대왕은 조사(朝事)를 거두고 예에 어긋남이 없이 원천군의 장사를 지내도록 하고 `안도(安悼)'의 시호를 내렸다.

원천군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열산도정(烈山都正) 해(偕) · 차남은 기성수(岐城守) 정(偵) · 3남은 가은군(加恩君) 빈(퓛)이다. 열산도정은 7남을 두었다. 장남은 이산부정(尼山副正)으로 무후여서 차남 화천부수(花川副守)의 아들 원춘(元春)이 입계됐으나 원춘 또한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열산도정의 5남 율진부령(栗津副令)의 손자 몽인(夢寅) 충절사공(忠節士公)이 입계 봉사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대적하다가 불행하게도 두 아들과 더불어 1592년(선조 25) 5월 14일에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또 종손집안이 무후되므로 사복정공(司僕正公) 축(퀐)이 입승(入承) 봉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 자호란 중에 장남 천걸(天傑)이 호병에게 끌려가 18세의 어린 나이로 절사(節死)하므로 차남 지분(芝賁)이 대를 이었다. 이같이 다섯 번이나 계사가 끊기고 세 번이나 환란(계유정란·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가세가 기울어지므로 자손들이 몰락하였다. 그 후 대군의 10대손 인규(寅圭)가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에만 열중하였다. 그의 두 아들 후면(厚冕) · 후승(厚昇)은 대군의 11대손으로 종사를 일으켰는데 그 업적으로는 파보를 편찬하고 대군의 부인을 신원케 하였으며 단을 쌓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종손인 후면의 아들 준영(俊永)이 무후하므로 동생의 아들 정발(正發)로 하여금 입승 봉사케 하였다.

그러니 실제 종손은 일곱번이나 끊긴 셈이다. 고종태황제가 입직강관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나, 입직강관의 농간으로 고종태황제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하여 주경야독하다가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훈풍이 불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장남은 강석(?錫) · 차남은 준석(俊錫) · 3남은 정석(丁錫) · 4남은 상석(相錫)이다. 그 중 3남인 정석이 파종회장으로서 오늘날의 파종회 기초를 이루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인구수
서울시
3500
경기도
1860
강원도
250
충청북도
320
전라남도
6530
경상남도
1500
기타
3000
합계
16960

파종회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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