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녕군파 약사

함녕군


1402년(태종 2)에 태종대왕의 2남으로 태어나 1467년(세조 13)에 별세하였다. 휘는 인(인), 자는 정경(正卿),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어머니는 신빈(信嬪) 영월신씨(寧越辛氏)이다. 신빈 소생 3남 7녀 중 장남이다.

1414년(태종 14)에 정윤(正尹)이 되었고, 1415년(태종 15) 12월 3일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정혼하고 14세 되던 해인 1416년(태종 16) 2월 2일 혼인하였다.

1417년(태종 17) 9월 12일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해졌고 배위 최씨도 공신택주(恭愼宅主)로 봉작되었다.

공녕군은 1430년(세종 12) 27세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작되고, 배위 최씨는 전주군부인으로 진봉되었다. 3년 후인 1433년(세종 15) 태종대왕의 존호를 공정대왕(恭定大王)으로 올리게 되니 공(恭)자를 피하여 함녕군(탂寧君)으로 개봉(改封)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으로 진봉되었다.

함녕군은 천성이 순수·장중하고 과묵하며, 문 · 무를 겸비했다. 1422년(세종 4) 상왕인 태종대왕이 병상에 있을 때 세종대왕과 함께 상왕 가까이 임시 침소를 마련하여 주야로 간병하였다. 세종대왕은 침전에 들 때 반드시 함녕군에게 명하여 상왕 몰래 문후(問候)하도록 하였다. 후에 태종대왕이 승하하자, 함녕군은 빈전(殯殿)에 입직(入直)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 이후 조정에서는 중국에 보내던 금은(金銀) 등 세공(歲貢)의 부담을 줄이고자 중국에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해결을 하지 못하여 1429년(세종 11) 8월 16일 마침 조정에서 문 · 무가 겸전한 종친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어 세종대왕의 친아우인 함녕군이 이에 뽑혀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부사 · 종사관 등 42명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갔다. 함녕군은 총 945자로 마련된 표전문(表箋文)을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고 `조선에서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세공을 면해 줄 것'을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외교수완을 다한 결과, 황제는 감동하여 세공을 면해 줄 뿐 아니라 옷 4벌과 표리(表裏) 10필, 갓·금대·물소뿔대 각 1개, 은 1백냥 등 선물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명나라 사신이나 조선의 사신이 양국을 왕래할 때 비록 왕자라 하더라도 물소뿔대를 맬 수가 없었는데, 왕자가 그것을 맬 수 있게 된 것이 함녕군부터라고 한다.

함녕군이 중국에 머물 때 여러 나라 사신들과 함께 묵었는데 그 사신들이 함녕군의 무예를 보고자 활쏘기를 청하므로 쾌히 승낙하고, 강궁(强弓)을 당기니 백발백중이라 모든 사신들이 감탄하며 경복하였다 한다.

계품사 함녕군 일행은 4개월 이상 명나라에 머물면서 임무를 완수하고 명나라의 칙서를 받아 1429년(세종 11) 12월 30일 귀국했다.

세종대왕은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가 사신 일행을 맞고, 이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노고를 포상했다. 이때 함녕군은 논 80결과 노비 8명을 하사받았다.

함녕군은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덕성군(德城君) 민(敏)으로, 현록대부이며 장녀는 파평윤씨 오(塢)와 혼인했고 차녀는 조졸하였다.

함녕군이 64세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撤朝)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자 일체를 내려 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도심촌 어머니 신빈(信嬪) 묘소 오른쪽 아래 언덕에 예장하였으며, 사패지는 대군(大君)들에게 주는 250결보다 많은 280결을 받았다.

또 조정에서 시호를 처음에는 양정(襄靖)이라고 내렸다가 다시 정민(貞敏)으로 고쳐 내렸다.

배위는 전주군부인(全州郡夫人)으로 전주최씨 사강(士康)의 딸이며, 묘소는 함녕군과 합폄되어 있다.

그러나 함녕군의 독자인 덕성군은 불행하게도 후사 없이 별세하였다. 그래서 근녕군의 손자인 영인군(寧仁君) 순(楯)을 입계했다. 영인군은 양부인 덕성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사패지 280결의 전지와 6백명이나 되는 노비를 모두 탕진하여 급기야는 선조의 제향도 받들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양어머니 구씨(具氏)가 아사하였다.

이에 성종대왕은 “영인군의 작태는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종친인 관계로 불가하니 종친의 적을 박탈하고, 파양하여 폐서인하여 동래(東萊)로 부처하게 하고, 대신 임영대군의 4남인 팔계군(八溪君) 정(淨)으로 후사를 삼으라.”고 하명하였다. 그래서 팔계군으로 후사를 삼았으나 팔계군도 후손이 없어 다시 팔계군의 형인 정양군(定陽君)의 3남 황원정(黃原正) 부(敷)가 입계(入繼)하였다.

황원정은 외아들 평해부정(平海副正) 석(碩)을 두었다. 그리고 평해부정은 아들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평해부정의 조부인 팔계군과 부친인 황원정 부자가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다가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1507년(중종 2) 2월 석방되었으나, 생계가 막연하여 평해부정의 아들 3형제 중 사손(嗣孫)인 기(琦)가 영남 순흥(順興) 땅으로 옮겨가 몇 대를 살다 보니 선조들의 묘역도 돌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조지위(不?之位)의 신주마저 묘하에 모시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북 구미시 옥성면 농소리 소재 영민사(英敏祠)에 봉안되어 종손이 받들면서 묘역도 수호 보존하고 있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세대수
인구수
경북 구미 / 선산 / 의성 / 상주 일원
100
500
충남 공주 일원
50
200
경기 여주 일원
20
100
전남 일원
30
150
서울 일원
150
700
기타
50
200
합계
40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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