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군파 약사

희령군


태종대왕의 6남으로 숙의(淑儀) 최씨(崔氏)의 소생이다. 휘는 타(袉),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고종 때에 현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둘로 순창군부인(淳昌郡夫人) 신씨(申氏)는 찬성(贊成) 숙생(淑生)의 딸로서 자녀가 없다. 평산군부인(平山郡夫人) 신씨(申氏)는 군수 사렴(士廉)의 딸로 3남을 두었다. 장남은 화성군(花城君) 감(堪)이고, 차남은 영원정(寧原正) 배(培)이며, 3남은 곡강도정(曲江都正) 게(土自)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 덕풍리(현 하남시 덕풍동) 산67 유좌원(酉座原)에 있다. 배위인 순창신씨는 합폄부좌(合킋쯊左)하고, 평산신씨는 그 계하(階下)에 있다. 신도비는 임진 · 병자 양난으로 실전되고 현재의 신도비는 후손들의 발의로 1957년 봄에 진성이씨 상호(祥鎬)가 명(銘)을 지었다.

파종회는 1978년에 창립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유사(有司)제도로 역대 파종회의 각종 행사를 진행하여 왔으니, 희령군파 세보(世譜) 세차례와 이정사(夷靖祠) · 어사금(御賜琴) 중수(重修) 및 신도비(神道碑) 재건 등 중대한 일들이 많았다.

희령군파 세보는 1841년 <신축보(辛丑譜)>, 1900년에 <경자보(庚子譜)>, 1957년에 <정유보(丁酉譜)>, 1980년에 <경신보(庚申譜) >등 네차례 편찬 간행되었다.

1957년에 도유사 철옥(喆鈺)과 부유사 순화(淳和) 등 종현들이 <정유보>를 편찬하였고, 병자호란 때 잃어버린 희령군 신도비는 1958년 후손들의 종의(宗議)에 따라 도유사 주진(周鎭) · 부유사 순화(淳和) · 성진(星鎭) 등을 비롯해 종현들이 공의 묘(墓)앞에 재건(再建)하였다. 그후 <경신보>는 종친회(宗親會) 발족 이후인 1980년 초대회장 순화(淳和) · 부회장 성근(聖根) · 상진(相鎭)(16대손) 등 종현들이 발간하였다.

종재(宗財)는 군산소(君山所) 임야(林野) 위토(位士) 7정2반(2만 1천 600평) · 전(田) · 답(畓) · 대지(垈地) 등이 신탁등기로 되어 있었으나 1993년 철주(喆周) 회장은 종중명의로 등기이전 하였다.

별묘(別廟) 이정사(夷靖祠)는 경북 예천에 수호(守護)되고 있다. 본래는 서울 동대문 밖 왕강동(旺崗洞) (현 창신동)에 양녕대군의 갑제(甲第)를 물려받아 여생을 거처하였다 하니 그곳이라 할 수 있는데 병자호란 때 병화로 소실되고 종손지예(宗孫支裔)가 유리함몰(流離陷沒)되어 묘와 함께 향화(香火)가 단절되었다. 그로부터 약 150여 년 후 정조 때에 이르러 경향의 후손들이 회합하여 불천위(不遷位) 사우복원을 연명상소하여 1792년(정조 16)에 희령군 13대손 병성(秉誠)을 봉사손으로 하고, 어명에 따라 봉상시(奉常寺)에서 주재(主材)까지 하사하여 이정사를 건립하였다. 제향은 군의 기일인 음력 7월 7일과 평산신씨 군부인의 기일인 음력 12월 21일에 기신제로 봉행하고, 순창신씨 군부인의 기일은 불명이다. 묘제는 음력 10월에 세일사로 봉행하고 있다.

희령군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착하고 도량이 넓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부왕의 총애가 두터웠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였다고 한다. 특히 양녕대군 · 효령대군에게는 어진 아우로서, 충녕대군에게 양위(讓位)시에는 협찬(協贊)의 공이 컸다고 한다. 1445년(세종 27) <용비어천가>를 찬집(撰輯)할 때에도 부왕의 명으로 정인지 · 권제 · 안지 등과 더불어 같이 찬하였으나 찬집자(撰輯者)에 들지 않았다 한다. 본래 음율에도 능통하여 태종대왕이 아끼던 어금(御琴)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리고 만년까지 이 어사금(御賜琴)을 즐겼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병란 중에서도 6백년간이나 무사히 보존되어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예천 성근(聖根)이 관리하고 있다. 정조대왕이 대통을 이을 때 어느 깊은 밤에 거문고가 스스로 울었다 하여 자명금(自鳴琴)이라 전래하고 있다.

자손들은 번창하여 대소관원을 비롯하여 문무 대소과와 고품가작(高品嘉爵)에 이르기까지 충신열사 · 효자 · 효부 · 열녀 · 문장훈업(文章勳業) 등 인재가 배출되었다. 문집 저서 등도 많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희령군은 3남을 두었다. 장남은 숭헌대부 화성군(花城君)이며 화성군은 숭헌대부 창원군(昌原君)을 비롯하여 4남을 두었다. 창원군의 장남 덕의정은 명선대부이다. 희령군의 차남은 숭헌대부 영원정(寧原正)이며 영원정은 명선대부 인천부수를 두었으며 인천부수는 창선대부 임해령(臨海命)과 명선대부 덕은감을 두었다. 덕은감은 호가 이제재(夷齊齋)로서 단종대왕이 손위할 때 어가 전후에서 남몰래 영월까지 따라갔고 승하시 슬픔에 겨워 하면서 단종의 옥체를 엄흥도(嚴興道)와 함께 겨울에 땅에 묻고 밀양 고답리에 은거하였다. 1460년(세조 6) 9월 27일 굶은 지 5일만에 피를 토하고 별세하였다. 그후 1866년(고종 3)에 충절이 높다 하여 증 이조참의 덕은도정(德恩都正)을 제수받았다. 그 실기가 있는데 면우(忄免宇) 곽종석(郭鍾錫)이 서문을 썼다.

이정사(夷靖祠)
-이정사는 희령군을 제향키 위해 1792년(정조 16)에 건립한 불천위 사당이다. 당초에는 서울 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소실되고 종사(宗嗣)가 끊어져 향화가 단절되었다가 150여 년이 지난 1792년에 어명으로 희령군의 13대손 병성(秉誠)을 봉사손으로 세우고 이어 봉사시에 명하여 주재(主材)를 내려 보내 경북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에 사당을 세우도록 하고 시호를 따서 이정사라 하였다. 이정사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94호로 1995년 12월 1일에 지정되었다. 재료는 목조와가이고 형태는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식 종묘 양식과 같다. 지정사유는 불천위 사당은 각 문중마다 별설(別設)하지만 이정사는 종묘의 규례를 원용한 정3칸, 측3칸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조 양식면에 있어서 일반 사가와 격식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관리자는 희령군의 봉사손 희석(熙碩)이다.

어사금(御賜琴)
-이 거문고는 오동나무 · 밤나무 · 생사 · 무명 · 우피를 재료로 하였으며 전면은 동판(桐板)에 옻칠을 하였고, 용구(龍口)와 봉미(鳳尾)로 양단(兩端)을 구분하였으며, 우피(牛皮)로 장식하였다. 6현(絃)은 생사(生絲)를 밀랍처리하여 내구성 있게 하였고 좌단은 뼈로 고정하였다. 6개의 안족(雁足)과 12진리(軫裡) 또한 가벼운 오동나무로 배면(背面)에는 세 개의 홈을 파서 음율을 조화있게 하였으며, 중앙에 `내사 희령군(內賜 熙寧君)'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종대왕이 희령군에게 하사한 어사금임을 밝혀 준다. 이 거문고는 희령군이 광주군 율현리(현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정착하면서 대대로 가보로서 사당에 소장하다가 병자호란 때 사당이 소실되자 긴급히 옮겨서 4대손인 함(涵)이 상주 외서봉암(外西鳳岩)으로 남천(南遷)하면서 보존하다가 다시 5대손 우춘(遇春)이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로 옮겨서 보존하였다. 그뒤 12대손 필조(弼祖)에게 전해졌는데 이때는 10대손 덕화(德華)가 11대손 기완(基完)과 더불어 정재대(丁載大)에게 중수하도록 하였다. 그 후 덕화의 증손 병성(秉誠)이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에 정착해 있었는데 어명으로 희령군의 13대 봉사손으로 정해져서 이정사를 세우고 그 아래 별감에 어사금을 소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희령군 어사금은 유형문화재 제241호로 1989년 5월 29일 지정되었다. 재료는 오동나무 등 5가지이고 규격은 길이 120.3센치이고 폭은 15.9센치이며 두께는 12센치이다.

관리자는 경북 예천군 유천면 송지동 143의 18대손 성근(聖根)이다.

이제재(夷齊齋)
-희령군의 증손인 명선대부 덕은도정(德恩都正) 종(種)이 살던 집이었다. 단종대왕이 손위할 때 어가 전후에서 영월까지 따라가 승하시 엄흥도(嚴興道)와 함께 단종대왕의 시신를 암장하고 바로 남하하여 밀양 땅 고정리(高亭里)에 은거하면서 초가집을 이제재(夷齊齋)라 하였다. 재후에 설단(設壇)하고 주야로 절하며 통곡하다가 곡기를 끊은 지 5일만에 피를 토하고 별세하였다. 1866년(고종 3)에 향유(鄕儒)의 장청(狀請)으로 `이조참의 덕은도정'으로 동년 12월에 교지가 내렸다. 그의 손자인 신성(信成)이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공의 유적을 추모해 오다가 1983년 14대 주손(胄孫) 순식(淳植)이 여러 일가들과 합의하여 세거지인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에 이제재를 중건하고, 공의 사당 정충사(貞忠祠)는 경남 산청군 신등면 가술리에 있다.

충신 가선대부 병조참판공의 정려문
-공의 휘는 찬조(纘祖)이고 1584년(선조 17) 광주(廣州) 율현(栗峴)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힘이 장사이고 의표(儀表)가 드높아 일찍이 무과에 올라 여러 대의 왕을 섬겨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12월 14일에 청군(淸軍)이 도성 홍제원(弘濟院)으로 밀려들자,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서 파천(播遷)하였다. 이때에 공은 선전관으로 충청도 절도사(節度使) 이의배(李義培)에게 왕명을 전달하고 남한산성으로 급히 돌아오는데, 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저항에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하는 수 없이 맨주먹으로 오랑캐 수십 명을 죽이고 역부족으로 놈들에게 생포되어 성안의 허실을 물었으나 공은 성내어 크게 꾸짖고, 항복을 강요하였지만 이에 굽히지 아니하고 급기야는 장작더미 위에 결박된 채 불에 타 죽었으니 그 날이 동년 12월 18일이었다.

동월 22일 동부승지 이경증(李景曾)은 경연(經筵)에서 위의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인조대왕이 자세한 내용을 듣고 비탄해 하며 “참혹하고 애석한 일이로다.” 하였다. 당시는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나 그 후 1816년(순조 16)에 공이 순절한 지 세 번째 갑년에 와서야 많은 선비들의 상언(上言)을 따라 참판(參判)으로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우도록 어명이 내려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보정리 독정동에 공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보전 · 수호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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