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파 약사

세종대왕의 제6남인 금성대군 유(瑜)


1426년(세종 8)에 태어나 1433년(세종 15)에 대군의 작호를 받았다.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1436년(세종 18)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아 당대 문장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천성이 강직하여 세조대왕이 어린 단종대왕을 물리치고 즉위함에 항거하고 단종대왕을 복위시키고자 노력하다가 1455년(세조 1) 광주(光州)에 가서 살게 되고 노비와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457년(세조 3) 2월에는 순흥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러 차례 영의정 정인지와 좌찬성 신숙주의 상소로 1457년 10월에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1528년(중종 23)에 금성대군으로 회복되고 1739년(영조 15)에 `정민(貞愍)'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1790년(정조 14)에 예장으로 개장되었다.

1791년(정조 15)에 금성대군을 청안(淸安)에 청당사(靑塘祠)를 지어 모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훼되었다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 중건해 보존 · 관리되고 있다. 청당사우는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금성대군은 단종대왕의 숙부이다. 1456년(세조 2) 정월에 단종대왕이 대군의 집으로 와서 살기로 하고 벽위에다 `질풍지경초 세난식침신(疾風知勁草 世?識?臣 : 빠른 바람이 지나간 뒤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세상이 어지러워야 충성스런 신하를 알 수 있다.)'이라 친서하였다. 단종대왕이 숙부들 가운데 금성대군을 제일로 믿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사육신의 단종대왕 복위가 발각되자 단종대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가고 대군은 순흥부로 유배되었다.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복위를 도모하다가 밀고되어 안동 옥(獄)에 갇혔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1일에 사사되었다.

그 후 대군의 차증손 홍양정(洪陽正)이 나이 18세에 활달하고 강직한 성품인지라 `금성대군의 억울한 일을 나라에 품달이나 하여 보리라.' 생각하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대궐문 앞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문지기에게 청하여 가로되 “금성대군이 억울하게 돌아가심은 옛 임금을 위함이요, 다른 뜻은 없음이라.”하며 대궐 문밖에 거적을 깔고 자리를 만들어 부르짖기를 석달 동안이나 하였다.

대신들이 중종대왕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이 비록 죄가 있다 하오나 옛 임금을 위하여 하게 된 것이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세조대왕께서도 사육신이 당세에는 역적이었으나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셨으며 금성대군도 일체 무관(無關)이라, 금성대군의 관작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자손들이 금고(禁錮)를 당하고 있음은 실로 친친지의(親親之誼)가 어그러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종대왕은 1519년(중종 14)에 이를 옳게 여기어 자손에게 3세 승습(承襲)의 명을 내리고 관작을 봉하였다.

금성대군은 흥록대부 정민공(貞愍公)이고 부인 전주최씨는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아들 맹한(孟漢)은 소덕대부 함종군(咸從君)이요 부인 충주지씨(忠州池氏)는 군부인(郡夫人)으로 추봉되고 손자 연장(連長)은 동평군(東平君) 승헌대부로 피봉되고 부인 전의이씨는 현부인(縣夫人)으로 추봉되었다.

장증손자 인(仁)은 정의대부 덕천군(德川君)으로 봉해지고 부인 청주양씨(淸州楊氏)는 정부인으로 추봉되고 차증손자 의(義)는 창선대부 홍양정(洪陽正)으로 봉하고 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는 신부인(愼夫人)으로 추봉되었다. 셋째 증손 예(禮)는 소의대부 청리부정(靑里副正)으로 봉해지고 부인 순창조씨(淳昌趙氏)는 신부인으로 추봉되어 이듬해에는 차자 동(銅)에게 호조참판 종정경을 주었고, 이 후에 또 홍양정은 금성대군 배위 완산부부인 전주최씨 산소를 대율리에서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절골 유좌에 이장하고 함종군 산소도 절골 백호 내룡 곤신룡 신좌에 이장해 충주지씨와 합폄하였다. 그 후 미원면 화원리에 동평군 · 덕천군 묘를 장례하였다. 홍양정이 별세하자 백호 내룡 상초혈에 장례하여 부인 영산신씨와 합폄하였다.

금성대군의 제사로, 성인단(成仁壇) · 금성단(錦城壇)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서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 두차례 유림 주관 하에 치르고, 숙모전(肅慕殿) 동무(東?)는 충남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 경내에서 3월 25일과 10월 24일 두차례 유림 주관으로 올린다. 충신단(忠臣壇)은 강원도 영월군 장릉(莊陵) 홍천문 밖에서 매년 한식일 전후 3일간 영월 군관(郡官) 및 유림 주관 하에 향사한다.

죽계서원(竹溪書院)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에서 3월 말정일(末丁日)과 9월 말정일 두차례 유림 주관으로 올리고 덕천서원(德泉書院)은 경남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에서 매년 한식일에 유림이 주관하며 금성대군 청당사우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서 기신제(忌辰祭) 선조고(先祖考)를 10월 21일 11시에, 선조비(先祖쯼)를 4월 6일 11시에 지낸다. 금성대군 신단과 완산부부인 최씨 묘소는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절골에서 세향일(歲享日) 매년 10월 첫 일요일 10시에 파종회 주관으로, 절사(節祀)는 정월 초하룻날 · 한식일 · 추석날 자손 주관으로 모시고 있다.

금성대군 사적


금성단(錦城壇)
소수서원 뒤편으로 100m쯤 가면 `금성단(錦城壇)'이라 쓴 문이 보인다. 소재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이다.

100평 가량의 터에 담장을 치고 상석 셋을 놓았다. 1719년(숙종 45)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이곳에 단소(壇所)를 설치하였으며,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3개의 단을 세웠던 것이다.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금성대군과 모의해서 단종대왕 복위를 꾀했던 이보흠 부사, 우단은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사림들, 즉 순의사(殉義士)들의 위패를 모신 제례소로 매년 춘추로 향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1㎞쯤 서북쪽으로 가면 참혹한 한이 서린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소가 있다. 100평쯤 되는 터에 담장을 높이 쌓고 그 안에 우물처럼 동그랗게 담을 또 쌓았다. 그 속의 넓이는 3평쯤 되는데 음식을 넣어 주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그 좁은 돌담 안에서 대군은 무기징역을 살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의 상왕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이곳에 귀양 온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당시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대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체포되어 안동에서 사사되었다.

모반사건이 탄로나자 주모자들은 물론 사방 10리 거리에 있는 세 살 이상의 양반 남자는 모조리 즉결로 목을 베었다. 집은 모두 불태우고 헐어버렸으며 도호부(都護府)는 산산조각 내어 다른 지방에 복속시켰다. 사람 뿐 아니라 마을 자체를 없애버리는 잔인한 징벌을 가했다. 죽계(竹溪)는 그때 피로 물들어 지금도 `핏걸'이라 불리운다.

신단(神壇)
금성대군의 신단은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절동에 있는 대군의 배위 완산부부인 전주최씨의 산소 우측에 설단하고, 매년 10월 상정일(上丁日)에 봉사손 중심으로 봉향한다.

성인단(成仁壇)
성인단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설단하고, 영남 유림 주관으로, 매년 2월·8월 중정일(中丁日)에 봉향한다.

금성대군 성인단비는 1742년(영조 18) 5월에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세웠다.

경상도관찰사 심성희(沈聖希)가 글을 짓고, 세자우부수(世子右副率) 송문흠(宋文欽)이 글씨를 썼다.

순흥 옛 고을의 은행나무
순흥의 옛 고을은 죽계의 위에 있으며, 구봉(龜峰)의 서쪽인 중읍리이다. 여기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언제 심었는지 그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이 고을 사람들의 애호를 받은 지 오래 되었다. 옛날에 이보흠이 이 고을 원으로 부임하였는데 금성대군이 유배당하여 이 고을로 오게 되었다. 금성대군이 이부사와 더불어 단종대왕 복위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금성대군과 은행나무가 같이 죽으니, 마을 아이들이 이 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 나무는 비바람에 꺾이고 인화(燐火)에 그을려 껍질이 벗겨지고 속이 텅 비어서, 남은 것이라고는 두어자 묵은 뿌리 뿐이었다. 일찍이 한 노인이 여기를 지나며, “순흥 고을이 폐지되면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이 고을이 복원되리라. 또한 은행나무가 무성하면 금성대군 후손과 이부사 후예가 번성하리라.”고 말하였다.

순흥고을 유민들 사이에 이 말이 구전된 지 227년 후 1681년(숙종 7) 봄이었다. 부드러운 가지에 비로소 움이 트고 잎새가 피어나더니, 1683년(숙종 9)에 과연 순흥고을의 복원 명령이 내려졌다. 그 후 70여 년이 지난 1757년(영조 33) 긴 가지와 묵은 줄기로 완연히 한 그루의 교목이 되었다.

이 나무가 충신과 함께 죽어 비색(否塞)한 운수에 이르렀다가 충신들이 거듭 배향을 받게 되자 썩은 뿌리가 먼저 살아나 무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천도(天道)에 성쇠(盛衰)가 있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 은행나무 아래에 3단을 설립하여 금성대군·이부사 및 당시에 같이 난을 당하여 화를 입은 분들을 세제(歲祭)로 봉향하였다.

장릉 충신단(忠臣壇)
영월 장릉 아래에 소재하고, 영월 장릉봉향회에서 주관하여 매년 한식일에 봉사한다.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충남 공주에 소재하며, 숙모전 동무(東?)에 금성대군을 배향하고, 매년 3월 15일 · 10월 24일에 충남 유림 주관으로 봉사한다.

죽계서원(竹溪書院)
안평대군 ·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 · 이보흠 6위를 봉안했는데, 충북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에 소재하고, 매년 3 · 9월 말정일(末丁日)에 충북 유림 주관으로 봉사한다.

덕천서원(德泉書院)
경남 거창읍 장팔리에 소재하고, 지방 유림 주관으로 매년 한식일에 봉사한다.

청당사(靑塘祠)
금성대군의 사당이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수의동에 소재하고, 봉사손 재영(在榮) 중심으로 대군의 기신일인 10월 21일에 매년 봉사한다.

두렛골 초군제(草軍祭)
영주시 소수서원 뒤 금성단에서 서북쪽으로 20리쯤 되는 태백산 기슭에 두렛골이 있다.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이 있고 그 맞은편에 대군 산신당이 있는데, 그 속에 붉은 반점이 있는 돌이 하나 놓여져 있다. 울퉁불퉁한 파석(破石)이다. 어떤 과부가 꿈을 꾸는데 금성대군이 생시같이 나타나 “내가 지금 `핏걸(竹溪:금성대군 때 사방 십리거리에 있는 3세 이상의 양반 남자는 모조리 목을 베어 피로 물들었다 해서 핏걸이라 함)' 조개섬이라는 곳에 있는데 매우 불편하다. 피묻은 돌이 하나 있을 것이니 다른 데로 좀 옮겨다오.”하고 부탁했다 한다. 가보니 과연 붉은 반점이 있는 100㎏ 쯤 되는 돌이 있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평민초군(平民草軍)들은 금성단이나 서원에서 제사 지낼 자격이 없으므로, 자기들끼리 `초군청(草軍廳)'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비용을 거두고, 좌상 혹은 좌수라는 사람이 주도해서 따로 제사를 모셨다. 그 행사는 지금까지 매년 거행되고 있다. 좌수는 정월 3일에 얼음장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목욕재계를 한다. 그 후 순흥장날이 되면 몇 사람이 소 장터로 간다. 소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을 삼가고, 골라진 소값은 달라는 대로 준다. 소값이 치러지면 따라간 사람은 모두 맨땅에 엎드려 소를 향해 큰절을 올린다. 대군의 제사상에 오를 고귀한 우공(牛公)이기 때문이다. 소를 정중히 모시고 오다 “아이고 이 어른 어째 이러시니꺼, 어서 가시더.” 하며 엉덩이를 공손히 민다. “그 길이 앙이시더, 이리 가시더.”하고 공손히 진언한다. 좌수의 집에 모셔 놓고 제삿날인 정월 보름날까지 칙사대접을 한다. 보름날이 되면 제관들은 의관을 정결하게 갖추고 안색을 경건히 하고 소를 모시고 두렛골로 간다. 신성한 제물을 바쳐 동제(洞祭)를 지낸다.

순흥 금성단 제향은 매년 음력 2월 · 8월 중정일(中丁日)에 올리고 있으나, 매년 정월 보름날에 올리는 이 초군제(草軍祭)야말로 평민들의 순수한 정성으로서 우리 민족정신의 정수라할 것이다.

종원 분포 상황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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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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