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군파 약사

한남군


1429년(세종 11)에 세종대왕의 4남으로 태어나 1459년(세조 5)에 별세하였다. 어머니는 혜빈(惠嬪) 양씨(楊氏)이다.

1455년(세조 1)에 단종대왕 선위시 혜빈 양씨(惠嬪 楊氏)와 그의 소생인 한남군 · 수춘군 · 영풍군 등 4모자의 피화(被禍)로 생명을 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종친록(宗親錄)> · <유부록(類附錄)>에서 삭제되어 79년 후인 1534년(중종 29)에서야 복원되었다. 그 역경 속에서 자손들의 고충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겠거니와 자손들이 어찌 번성하겠는가. 그러나 `당세난신(當世亂臣)이 후세충신(後世忠臣)'이란 말과 같이 후일 사육신 · 생육신과 같이 육종영(六宗英)의 한 분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한남군은 유배지인 함양 배소에서 순절하여 은전을 받지 못하던 중 1713년(숙종 39) 4월에 8대손 서규(瑞奎)가 임금께 두 번 상소를 하여 사시(賜諡) 봉묘(奉墓)의 은전을 입었다.

석물(石物) 대금으로 지부아문(地部衙門)에서 정목(正木) 25필과 쌀 5석을 받았으나 물력이 극히 가난하여 자손이 능력에 따라 추렴을 하여서 1714년 12월 6일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돌은 군북(郡北) 북천면 백암동에서 다듬어 이듬해 1월 15일에 산소수축역사를 거행하여 3월 15일에 낙성을 고하는 제사를 봉행하였다. 석재를 뜨는 광부가 780여 명이며 돌을 끌어 운석하는 승군(僧軍)이 860여 명이었다. 1459년(세조 5)부터 256년만에 비로소 묘역을 정성들여 봉축하였으니 우러러 천은을 입어 감격한 눈물이 어찌 지극하지 않으리. 세월이 흘러가면 그 전 일이 인몰될까 두려워 간략한 전말로 후세에 일화가 전한다.

한남군의 신위를 모신 곳은 장릉(莊陵) 충신 상단(忠臣上壇),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충북 청원군에 있는 죽계서원(竹溪書院), 포천군 소흘읍의 충목단(忠穆壇), 경남 함양의 송호서원(松湖書院) 등 다섯 곳이며 충주 용관동에 한남군 사당을 모시고 있다.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755-2번지에 있으며 경상남도지정 기념물 제165호이다.

1990년 7월 27일 신도비를 세웠으며 비석 · 사대석 · 장군석 · 장명등 · 혼유석 · 상석 · 향로석 · 동자석 · 망주석 등이 있다.

사당에는 혜빈 양씨와 한남군과 배위 군부인 안동권씨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데 충북 충주시 용관동 산 15-4에 소재한다.

자손들이 한말까지 경기 일원, 강원도 철원, 충청도 충주 · 예산 · 부여 · 서천 등지에서 세거해 왔다.

현조(顯祖) 중에는 이조참의 · 참판 등과 군수 · 현감 · 현령 등을 지낸 이가 있다.

이 후에 각종 전문직과 학계의 교수 · 박사학위 소지자도 늘어나고 있다.

한남군 어(쉾)는 호조좌랑 증 지돈녕 권각(權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흥안군(興安君) 중생(衆生)을 두었다. 흥안군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호천군(湖川君) 옥근(玉根)이고 차남은 이인도정(利仁都正) 숙근(叔根)이다.

호천군은 6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공성군(功城君) 식(植) · 차남은 의성군(義城君) 적(캞) · 3남은 영성군(永城君) 축(?) · 4남은 간성수(杆城守) 격(格) · 5남은 계성군(桂城君) 용(桶) · 6남은 의천감(義泉監) 기(機)이다. 이인도정은 아들 둘을 두어, 장남은 단성령(丹城令) 청(淸)이고, 차남은 한성군(漢城君) 영(쨾)이다.

이미 속적(屬籍)이 끊어져 민오(民俉)에 편입된 지 79년이 되었다. 이리하여 1534년(중종 29)에 호천군의 대궐 앞 상언으로 비로소 왕계(王系)로 복원되었으며 명종대왕 때에 처음 이 일을 더 사뢰어 이에 어(王於)를 추봉하여 한남군으로 하고 배위 안동권씨는 군부인(郡夫人)이 되고 중생(衆生)은 흥안군(興安君)으로 하고 한남군의 적사(嫡嗣)로 하여 승습 부정(承襲副正)으로 승진하였다.

호천군은 1570년(선조 3)에 노직(老職)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차남 적(캞)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에 추증군(追贈君) 되었었는데 1576년(선조 9)에 별세하였다. 양주 고주내 구랑동 선영 축좌에 안장하였다.

호천군이 별세한 후에 자손들이 각자의 뜻대로 지방 각처로 분산하여 살았다. 공성군의 아들 헌경(獻慶)은 충주(忠州) 두담(斗潭 : 현 충주시 용관동)으로 낙향하고, 좌랑공의 아들 언선(彦瑄)은 수원시(水原市) 매산리(梅山里)로 내려가고, 간성수(杆城守)의 아들 성경(晟慶)의 자손은 인천 목과동(木果洞 : 현 시흥시 과림동)에 낙향하였다.

계성군의 아들 정경(禎慶)은 전라도 옥구군으로 낙향하고, 의천감의 아들 예원(禮元)은 황해도 평산군으로 내려가고, 이인도정은 서울에 살다가 손자인 진경(震慶)이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사임하고서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가신리에 내려가 살았다. 단성령의 아들 항경(恒慶)은 충청도 노성군(魯城郡 : 현 논산시 노성면)으로 낙향하였다.

100여 년 후에 수원 매산리에 낙향한 의성군 자손 기형(基馨)은 후사가 없으므로 포천거주 이인도정의 8대손 중환(重煥)으로 양자하여 포천에 의성군파와 이인도정파가 같은 동네에 살게 되었다. 간성수의 차남 승경의 손자 희윤(喜胤)이 충남 부여군 홍산으로 이주하고 4남 담경의 자손이 김포 강화로 이주하였다.

의성군 후손 중 일부가 경기 광주(현 성남시)로 이주하였고 한성군 후손 일부가 충청도 예산과 강원도 철원과 충남 서천으로 이주하였다.

종손 갑성(甲成)은 한남군의 17대손이며 공성군의 14대손이다. 공성군의 아들 헌경이 낙향 후 무려 400여 년 동안 대대로 현 충주시 용관동에 소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한남군 사당 아래 종손댁이 있다. 1864년(고종 1) <선원속보(갑자보)> 발간 및 한남군 종친회를 통합하고 1981년 8월 30일 한남군파종회를 창립하였으며 1989년에는 양주재실 구옥을 철거하고 신축하였다. 1990년 7월에는 한남군 묘역에 신도비를 건립하고 1991년 7월에는 함양재실 구옥을 철거하고 신축하였다.

단종의 아보[保育人] 혜빈 양씨(楊氏)
양씨(楊氏)는 청주양씨로서 현감 경(景)의 딸이며 찬성사(贊成事) 지수(之壽)의 증손녀이다.

세종대왕 때 후궁으로 뽑혀 입궁하여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혜빈은 한남군 어(王於), 수춘군 현(玹), 영풍군 천(?) 등 3남을 두었다.

1441년(세종 23) 세자빈 권씨(權氏)가 단종대왕을 동궁에서 낳고 이튿날 승하하자 세종대왕은 궁중에서 어진 이로 혜빈을 선택하여 아보(阿保)로 원손(元孫)을 보양하도록 명하였다. 혜빈은 기출의 3왕자와 함께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보호하고 음식과 기거를 지성스럽게 섬기었다.

세종 · 문종대왕이 연이어 승하하고 단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 종실의 영걸(英傑)들이 포진하고 있어 국세가 위태로웠을 때 혜빈이 옥체를 편안하게 호위하여 극진히 봉양했다.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에 피화되었다.

장남 한남군은 귀양가서 순절하고 차남 수춘군은 이보다 앞서 순의(殉義)하였다. 3남 영풍군은 함께 당하여 4모자가 똑같이 의롭게 생을 마치었다.

혜빈의 유해는 빈의 종조부 병사공 양치(楊治)가 남몰래 거둬다가 포천(抱川) 기당리(機唐里) 세장산에 묻고 평토를 하여 극비에 붙였다.

이러한 내력은 단종대왕의 누님 경혜공주의 한글 수기로 전해 진다.

1713년(숙종 39)에 왕명으로 `혜빈의 묘를 봉분하라' 하였으나 장소를 찾지 못하였다. 1900년(광무 4) 수춘군 파종회에서 고양군 원당에 단을 축조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1791년(정조 15)에 혜빈의 시호를 추증하며 `민정(愍貞)'이라 하였다.

임금은 유문(侑文)을 만들어 말하기를 “슬프다. 오직 양씨(楊氏)는 옛적의 아보(阿保)와 같다. 칭송은 주빈(周嬪)처럼 드러나고 공(功)은 한모(漢母)보다 고매한데 병자 정축년을 맞이하여 화가 후궁에 미치었다. 두 아들과 같이 죽었으니 6신들과 같이 돌아갔구나. 시대는 달라도 방모와 같고 여자로서 굳세고 인자하였다. 두견새는 옛 누각에서 우는데 봄은 신단(新壇)에 다시 찾아왔구나. 의는 천추에 일어나기에 예로써 제현(諸賢)과 강신(降神)의 잔을 드린다. 생각컨대 6궁에서 제일 높았는데 어찌 제사를 똑같이 한단 말인가. 지난 일을 감히 말하자니 슬픈 감회가 지극히 깊고 깊구나. 예를 거행하여 이름을 바꾸어 `민정(愍貞)'이라 한다.”하였다.

임금은 제물을 드리며 이르기를 “내가 진심으로 내려주는 것이며 법도를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이에 명을 내려 현판을 만들게 하고 제사를 오래 이어가도록 한다. 일이 이 때를 기다린 것 같고 이 보은은 실로 선왕 때부터 있었던 터이다. 관(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성스레 모시도록 하였으니 바라건대 이 제물을 흠향하소서.” 또한 시호를 한남군에게는 `정도(貞悼)'라 하였으며 영풍군은 `정열(貞烈)'이라 하고 장릉 충신단에 배향케 하였다.

매산거사(梅山居士) 홍직필(洪直弼 : 1776∼1852)은 “혜빈이 세종대왕의 후궁의 반열에 있으면서 많은 희빈(嬉嬪)들을 가르쳐 내재(內宰)의 직분을 다하고 아보(阿保)의 임무를 받아 원손을 보양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수고로움을 게을리 하지 않고 마침내 상전이 벽해가 되고 세상이 변천할 즈음까지도 의를 붙잡아 떳떳한 것을 지켰으니 아아 장열하구나.
부인이란 성품이 유하여 화와 복에 걸터앉아 자손의 견제로 해서 스스로의 주장을 못하는 자가 많은데 혜빈만은 빛나는 묘당에서 얼마든지 평안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다만 단종대왕 있음만 알고 자기 자식도 돌보지 않고 진력하다가 모자가 함께 죽고도 뉘우침이 없었다. 이른바 천지가 변화해도 그 바른 것을 얻으려 한 분이다.

의로운 충성이 지극하여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투게 되었다. 이는 저승에 돌아가 세종대왕을 배알할 적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내치가 성대하여 슬기롭고 밝았음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조대왕 때 충절이 높이 드러내고 어진 것을 이룰 수 있게 하고 잠기고 숨은 것을 밝혀내어 시호를 내리고 유문(侑文)을 극진하게 내리고 뿐만 아니라 혜빈의 두 아들(한남군 · 영풍군)을 장릉에 배식토록 하였으니 구부렸다가 펴고 나타났다가 어두워지는 것이 스스로 그 때가 있고 천도(天道)가 갚고 베푸는 것을 시험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혜빈의 가슴 속에 가득 찬 열혈은 천지가 다하도록 썩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또한 어찌 극진히 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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