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군파 약사

회산군 염(恬)


성종대왕의 5남으로서, 회산군파는 현 종손 형구에 이르기까지 15대를 내려오고 있다. 공은 10여 세가 되어 부왕의 뜻과 의도하는 마음을 잘 헤아려 조심불변(操心不變)하고 산회지청직(山檜之靑直)하라는 뜻에서 회산군(檜山君)으로 특봉(特封)되었다.

회산군은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공정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중종 때 대신 김안로(金安老)가 간교한 말로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공이 면전에서 크게 꾸짖어 물리쳤다. 일찍이 연산군이 아우 영산군(寧山君)의 용력(勇力)과 청렴강직(淸廉剛直)을 시기하여 숭례문(崇禮門) 앞을 말을 달려 먼저 입궐하는 자는 생(生)이요 늦는 자는 사(死)라 하니, 영산군이 근심하던 차 회산군이 아우 영산군의 말이 연산군 준마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빠른 준마를 구하여 영산군에게 빨리 달리게 하여 화(禍)를 면케 하니 공의 충성심과 우애심을 가히 알 수 있다.

회산군이 아들이 없자 중종대왕이 특별히 명하여 공의 아우 견성군(甄城君)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 수계(壽誡)로 후사를 이으라 명한 것도 중종의 각별한 배려로 사료된다. 회산군 계자(繼子)인 계산군이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장남 풍성군(豊城君) 전(銓)은 청렴 강직한 성격으로 효심이 극진하였다. 후손들은 계산군 묘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준(? : 덕인정) · 향(? : 덕릉정) · 일화(一花 : 군자정) · 광국(光國 : 선원록 光衛) · 성범(聖範 : 부호군)과 같은 후손을 배출하였고 남양주, 포천, 서울 등 각지에 약 350여 세대가 분포되어 살고 있다.

계산군 2남 의성부정(義城副正) 강(鋼)은 당대 명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수업(修業)하였으며 문장의 대가로, 명나라 융경 황제에게 문괴(文魁)라는 사호를 받았다. 후손들은 양주, 포천, 장단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감(堪 : 서원군) · 훈(壎 : 서평수) · 용(墉 : 서창수) · 종립(宗立) · 수립(秀立) · 광노(光魯) · 규정(奎禎) · 시정(時禎) · 영달(英達) · 창우(昌雨)와 같은 후손들을 배출하였으며 경기 양평, 여주, 전남 영암, 충북 청원, 강원 원주, 황해 토산, 서울 등 각지에 약 700세대가 분산 거주하고 있다. 의성부정의 증손 광주(光周) · 광하(光夏) · 광조(光朝 : 선원록 광한(光漢))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에게 수업(修業)하였으나 조정에 불사(不仕)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계산군 3남 단성군(丹城君) 진(鎭)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고 노후에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에 낙향하여 인근 문사들과 시서를 교류하였으며 후손들이 포천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선(? : 덕의부령) · 지(콒 : 덕녕군) · 정립(正立 : 부호군) · 양립(陽立) · 지립(志立) · 운재(雲裁) · 이도(?道) · 근령(根寧)과 같은 후손들을 배출하였으며 가평, 양주, 춘천, 원주, 홍천 등지에 약 380세대의 후손들이 분산 거주하고 있으며, 회산군 손 단성군 장자 덕의부령의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포천군 소흘읍에 `더렁말'(덕의부령 마을)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있다.

계산군 4남 창성부수(昌城副守) 명(銘)은 당대의 효자로 조정에 불사하고 포천에 기거하였으나 후대에 인천 도림동으로 옮겨 집성촌을 이루었고 약 110세대가 인천, 경기, 서울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탄(坦 : 청송부령) · 원립(元立) · 형립(亨立)과 같은 후손들을 배출하였으며 도림동에는 이씨문중이 대대로 거주하였음을 말해주는 도이산(桃李山)이 있고 이대(李垈)고개가 있는데, 고개를 전후로 창성부수 후손들이 집성으로 터를 잡고 살아 이대고개라 지금까지 전해온다. 현종손까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회산군파 2세 계산군 수계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풍성군 · 의성부정 · 단성군 · 창성부수이다. 3세 풍성군은 덕인정(德仁正) 준(콀) · 덕릉정(德陵正) 향(土向) · 덕안령(德安令) 운(雲)을 두었다. 4세 덕인정은 아들이 없어 무립(茂立 : 의성부정의 손, 생부 서평수 壎)을 계자로 입양하였고, 5세 무립(茂立)은 광연(光燕) · 광초(光楚) · 광국(光國) · 광조(光趙)의 4남을 두었다. 6세 광연(光燕)은 명재(命載) · 명신(命新)의 2남을 두었고, 7세 명재(命載)는 익방(益芳)을 두었고, 8세 익방(益芳)은 희징(喜徵) · 재징(再徵)의 2남을 두었고, 9세 희징(喜徵)은 동식(東植)을 두었다. 10세 동식(東植)이 아들이 없어 원상(元相 : 단성군의 8대손, 생부 )을 입양하였고, 11세 원상(元相)도 아들이 없어 영(楹 : 단성군의 9대손, 생부 顯敬)을 입양하였다. 12세 영(楹)은 상민(尙旻) · 상현(尙賢) · 상룡(尙龍)의 3남을 두었고, 13세 상민(尙旻)은 근천(根天) · 근지(根地) 형제를 두고, 14세 근천(根天)은 명훈(明薰) · 석훈(錫薰) · 양훈(陽薰) · 성훈(成薰)의 4남을 두었고, 15세 명훈(明薰)은 형구(亨九) · 정구(晶九) 형제를 두고, 16세 형구(亨九)는 길우(吉雨) · 용우(龍雨) 형제를 두었다. 회산군파 종손(宗孫)은 주로 양주에 살다가 현재 종손 형구의 5대조로부터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초가팔리에 살고 있다.

파종회 발전을 위하여 문장(門長) 정재(貞栽)가 1864년<갑자보>를 발간하였으며 1900년<경자보>는 도유사(都有司) 우승(友承)이 주관하여 발간하고 1933년에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봉리에 영모재(永慕齋)를 세웠다. 그 후 1968년 3월에 현재 위치인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회산군 묘하에 이축(移築)하니 음력 4월 5일과, 11월 4일 회산군 양위분 기신제를 이곳에서 모시고 있다. 그 후 1950년 6 · 25전쟁으로 숙의 남양홍씨 묘에 참반하는 종현(宗賢)이 없어 4∼5년간 향화가 끊어졌다가, 회산군파종회 도유사 근준(根俊)이 포천에서 상거 30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4∼5명의 종원과, 충청도 아산에 사는 경명군파(景明君派) 근제(根濟)와 함께 제수를 준비하여 1954년 음력 10월 1일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숙의 남양홍씨 묘에 참배하였다. 앞으로의 제향 문제를 논의하다가 7파 대종회(완원군, 회산군, 견성군, 익양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를 소집하여 궐향이 없도록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1955년 3월 6일 회산군파 홍구(턓九) 자택에서 회의를 하고 7파 도유사에 근준(根俊)이 선임되고 익양군파 홍구(弘九)가 부장재(副掌財)직을 맡았다. 그리고는 각 파별로 성금을 모금하여 위답(位畓) 10두락을 매입하고 1956년 봄에 묘막(墓幕) 9칸을 건립하였다. 그 해 11월 기신제에 여주 사는 중훈(重薰)이 자비로 유기로 된 제기를 회산군 파종회에 헌납하니 종사에 대한 제종(諸宗)의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회산군파보 편찬을 서두르게 되어 1959년<기해보>를 도유사 근준(根俊)이 주관하여 발간하였다.

가장 근세 파보는 1990년<경오보(庚午譜)>이다. 당시 회장 근옥(根玉)과 성구(成九) · 석우(奭雨) · 병구(秉九) · 덕구(德九) · 중구(重九) 등이 주축이 되어, 편찬위원장 근옥(根玉), 고문 덕구(德九), 부위원장 성구(成九) · 동우(東雨), 그리고 재정에 석우(奭雨)와 기타 종현(宗賢)의 협조로 빈약한 재정상태에서 5개월여 만에 발간하였다. 그 후 8대 회장으로 석우(奭雨)가 회산군묘역 정화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제반 행정규제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다가 재정이사 익훈(益薰)의 활약으로 인허가 문제가 어렵게 타결되어 정화사업이 원만히 마무리 되었다.

아울러 파종회 사무실을 1993년 10월 서울 도봉구 방학동 690-54 시은빌딩 4층에 개설하여 숭조(崇祖)와 돈종(惇宗)의 장으로 현재에이르다.

종원 분포 상황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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