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군파 약사

봉안군(鳳安君)


성종대왕의 6남으로 1482년(성종13) 9월 29일 태어나시고, 1504년(연산10) 6월 21일에 별세하였다.

휘는 봉(㦀), 자(字)는 성지(誠之), 호는 풍애(楓崖), 시호는 정민(貞愍) 이다.

어머니는 貴人 草溪鄭氏로 2남 1녀를 낳으시니 즉 安陽君 항(성종대왕의 3남)과 봉안군 형제 그리고 정혜옹주이다.

배위는 宜春郡夫人 平壤趙氏로 判書 贈 左贊成 기(紀)의 따님으로 1480(庚子)년 10월 23일에 태어나 1506(丙寅)년 7월 16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합폄(合窆).

공은 연산군때 형 안양군과 더불어 같은 날 적소(敵所)에서 원화(寃禍)를 당하였다.

이후 고종 9년(1872)에 작위를 복귀시켜 시호를 정민(貞愍)이라 내리시니, 지조(志操)가 청백(淸白)하여 굳고 곧은 것을 貞이라하고, 백성을 은혜로 부리는 것을 愍이라 한다. 같은 해 11월 고종태황제께서는 제문을 지어 종정경(宗政卿) 인설(寅卨)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묘소는 고양 대자동 해좌(亥坐)에 모셨다.

봉안군은 외아들 경瓊 을 두었으니 사옹원 제조를 지낸 嘉德大夫 흥원군 이다. 흥원군은 성종대왕 8남 익양군의 손자 箕城君을 계자로 두었으며 기성군의 품계는 崇憲大夫에 顯綠大夫로 증직(贈職)되었다. 기성군은 7형제를 두었는데 彰善大夫 坡林令, 明善大夫 富林君, 義林令, 明善大夫 陽林都正, 昌林令, 崇憲大夫 崇林令, 顯綠大夫 錦林君 등이다.

부림군은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폐위할 때 18인의 종친과 더불어 글을 올려 적도(賊徒) 이이첨을 성토하였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長城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별세하다. (1622년 4월 23일) 이후 복권되어 숭헌대부의 증직이 가자(加資)되었다.

금림군은 선조25년 1591년 7월 10일에 태어나서 품계는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1617년 광해군이 인목모후를 폐위할 때 구천군(龜川君) 수(?)등 18종친과 더불어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려 賊徒 이이첨을 성토했다. 인조 甲子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하자 왕의 파천행차를 모시었고, 丁酉(1627)호란 때는 왕의 행차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왕의 명을 받아 마전, 적성 등지에 가서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하여 운송하고 3월에 和約후 임금의 행차를 모시고 환도하였다. 병자호란(1636년)때는 인목대비의 우주(虞主)를 모시고 강화로 들어가 마이산 바위굴에서 13일간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顯宗 1672년 12월 25일 졸하니 현종께서 친히 제문을 짓고 제사를 올렸으니 글에 이르기를 【은하수 쓸쓸하니 세상을 떠났도다 그 성품 인자했고 그 모양 義로왔다 혼탁한 세상 만나 나라가 위태로우니 나라위해 근심 했고 공로는 남았도다. 혼조(昏朝)에 상소하여 역조를 내쳤도다. 성군만나 포용되니 벼슬이 높았도다 나라운수 불행하여 난리가 이어지니 卿은 오직 분주하여 세 번이나 호종(扈從)했네. 충성심은 충천했고 공로는 더욱 컸네 나라에 큰일 나면 卿은 또한 뛰었고 매사를 엄숙하게 그 정성을 다하니 질서는 회복되고 능력 있게 처리 했네 밖에 나가 왕명 받고 궁중에선 호위 했네 심신을 가하여 바친 정성 그 한두번이 아니었네 남다른 복을 받아 오래오래 장수 했도다 평생에 쓰던 杖屢는 주인 잃어 쓸쓸하고 행적은 조정에 남고 몸은 하늘로 귀화했도다. 경은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산사람 감회만 깊도다 이에 정성으로 술잔을 올리니 영령은 흠향하소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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