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군파 약사

경명군


성종대왕의 10남이고, 어머니는 숙의 남양홍씨로서 집현전 제학 일동(逸童)의 딸이다. 공은 숙의의 7남 중 다섯째이다. 경명군파는 현 종손 택구에 이르기까지 16세, 500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경명군의 유택은 서울의 북쪽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산25-1 효자봉 기슭에 모셔져 있으며, 약 5만 평의 묘역에는 경명군의 두 아들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 13기도 함께 있다. 이 곳에 경명군과 그 후손들의 묘소가 모셔지면서 산봉우리의 이름이 효자봉으로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셔진 분들의 효성과 청백(淸白)의 선비정신을 흠모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균관 대사성 김창협(金昌協)이 찬한 경명군의 묘지(墓誌)에는 `공은 일찍이 훌륭한 명성으로 여러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는데, 간사한 사람이 공을 거짓 허물로 모함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공은 중종대왕께 상소하여 스스로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니, 중종대왕도 별다른 허물이 없음을 알고 명하기를 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공은 병을 핑계로 조정회의와 임금 앞에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밤낮으로 술을 마신 지 수년만에 결국 별세하였다.'고 하였다.

4세손인 창림군(昌林君) 세지(世智)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감금하자 장차 국가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종친들과 함께 임금에게 이이첨(李爾瞻)의 당파를 물리칠 것을 상소하였다.

5세손인 송파공(松坡公) 생인(生寅 : 1586∼1616)은 일찍이 성균관 장의(掌議)로 있으면서 정인홍(鄭仁弘)의 명현(名賢) 무고(誣告)한 죄를 상소하여 당시에 유명하였다.

이 때 이위경(李偉卿)이 권력을 잡고 당파를 만들어 인목대비를 폐위할 것을 요청하면서 송파공의 덕망이 높음을 알고 귀양보내라는 말이 상소문의 내용에 있었는데, 공은 그 날부터 아산(牙山)의 서호(西湖)에서 친구와 더불어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그 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별세했다.

6세손인 취수헌(醉睡軒) 제형(齊衡 : 1605∼1664)은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집의(執義)를 하였는데 별세한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장천사원(長川祠院)에 모셔졌다.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품행이 돈독 진실하며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우애가 노년까지 변함없었다. 또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이 지성에서 나왔고 우아고상하고 소박검소하여 말쑥하기가 가난한 선비 같았고, 비록 관직에 있으나 몸에는 옷을 껴입지 않았고 음식에는 반찬을 여러 가지 들지 않았으며, 항상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것으로 생활규칙을 삼아 날마다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태도가 엄연하였다. 이 때문에 부하들에게 위엄부리지 않아도 엄숙하였다.

자녀를 가르칠 때 자상히 공부를 권장하여 학업을 성취시켰다. 청백의 지조에 있어서도 타고난 성품이 근본이 되어 재산에 욕심이 없고 세 번이나 고을의 원을 지내면서도 한치의 땅도 마련하지 않았으며 세 고을 사람들이 다 청백을 기려 떠난 뒤에 사모하는 비석을 세웠고 영광(靈光)사람들은 공을 장천사원(長川祠院)에 모시고 제사지내고 높이 받들었다.

7세손 쌍호당(雙壺堂) 단석(端錫 : 1625∼1677)은 대과에 합격하고 8도 관찰사와 관북병마절도사 그리고 중앙부서의 참판(參判)을 두루 거쳤다. 별세한 후에 민진장(閔鎭長), 리유(李濡), 이사(李奢), 김창집(金昌集), 조태채(趙泰采), 리이명(李?命), 남구만(南九萬) 등의 정승들이 연달아 임금께 다음의 글을 올렸다. `돌아가신 참판(參判) 리단석(李端錫)은 청렴결백하고 고난속에서 지조를 지켜 같이 있던 모든 신하들이 다 칭찬, 감탄하는 바이오며, 가난하여 초상을 치르지 못하고 처자가 생활할 방법이 없으며 여러번 관직을 거치며 벼슬이 참판에 이르러서도 궁핍함이 이 같으니 그 고난을 극복한 굳은 지조는 마땅히 표창을 내리셔야 합니다.'

임금은 담당관에게 특명으로 품신(稟申)한 대로 하도록 하였고 이같은 청렴한 절개에 대한 표창은 사후 37년에 걸쳐 일곱 번이나 있었으며 이조판서와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장천사원(長川祠院)에 배향되었다. 공은 전주리씨 8명의 청백리 가운데 한 분이다.

※ 청백리(淸白吏) 8명
석근(石根 : 익평군) · 세장(世璋 : 관찰사) · 원익(元翼 : 영의정) · 직언(直彦 : 찬성) · 시언(時彦 : 우찬성) · 제(濟 : 우윤) · 선필(善弼 : 참찬) · 단석(端錫 : 참판)8세손인 충민공(忠愍公) 의연(義淵 : 1692∼1724)은 영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여러 간신들이 국정을 잡고 왕의 총명을 가리우므로 의연히 상소문을 올려 `전하께서 하여야 할 일은 가장 먼저 소인의 무리가 임금을 가로막고 난동을 부린 죄부터 빨리 바로잡아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먼저 임금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또 소인 무리의 음흉악독한 죄를 바로 다스려 춘추(春秋)의 불의는 반드시 친다는 뜻을 밝혀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류범휘(柳凡輝), 이광우(李光佑), 이거원(李巨源)등에게 몰려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옥중에서 운명하였으니 향년 32세였다. 공이 선비의 곧은 절개로 희생된 데 대하여 1779년(정조 3)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1853년(철종 4)에는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증시(贈諡) 충민(忠愍)이 주어졌다.

13세손 학승(學僧 : 1852∼1894)은 1894년(고종 31) 장성(長城) 월평(月評)전역(戰役) 선발대장으로서 폭도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향년 43세였다. 한 사병이 공을 붙잡고 도망하기를 청하니, “사나이는 죽을 뿐 위험에 다다라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다.” 하고는 장렬히 싸우가가 순국하였다. 고종태황제는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여 충혼을 위로하였으니 만대에 본보기를 세우고 신하의 본분을 삼기 위한 뜻이 지극하였다. 기우만(奇宇萬) · 김성규(金星逵) · 박영순(朴榮淳) · 박만승(朴萬升) 등 그 지역 유생들이 주동이 되어 순의비가 세워졌고 비명은 판서 최익현(崔益鉉)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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