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파 약사

소현세자(1612∼1645)


휘는 왕(?),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인조대왕의 맏아들이며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 소생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 1625년(인조 3)에 세자로 책봉,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을 당하여 소현세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과 함께 청나라의 심양으로 볼모가 되어 가서 몽고말도 배우고, 서역원정(西域遠征)에 출전도 하였다. 부왕 인조의 노력으로 귀국할 때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친밀하여 천문 · 과학에 관한 서양의 문물과 성교정도(聖敎正道)에 관한 많은 번역서적 · 지구의(地球儀) · 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귀국 후 2개월만에 병사하였고 서적들도 불살라져서 모처럼의 천주교 전래의 기회도 놓치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8년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올 때 청 태종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게 소원을 물었다. 소현세자는 “청 태종 어전에 있는 벼루 용연(龍硯)을 달라.” 하고 봉림대군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조선 본국인을 달라.” 하였다. 이에 청태종이 두 왕자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귀국 후 인조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세자를 불러 대노하여 용연을 세자에게 던져 그것에 맞아 병이 들어 소현세자가 별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645년(인조 23)에 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조소용(趙昭容)과 반목이 생겨 싸우던 중, 세자가 죽자 이것을 기회로 조소용은 세자를 강빈이 죽였다고 무고하고 왕실을 저주한다고 고하여 강빈은 후원에 유치(幽置)되었다가 1646년(인조 24) 3월에 사사되었다. 1647년(인조 25) 5월에 강빈사건(姜嬪事件)이 다시 문제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전부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 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남 석린(石麟)은 8세, 3남 석견(石堅)은 4세로, 정언황(丁彦璜) 등이 상소하여 부당함을 말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이 세아들이 바로 경선군(慶善君) 백(栢 : 1636∼1654) · 경완군(慶完君) 석린(石쬨 : 1644∼1654) · 경안군(慶安君) 회(檜 : 1644∼1665)이다. 경선군과 경안군은 아명을 나중에 고쳤다. 경선군은 혼인도 하지 못하고 19세에 별세하여 아우 경안군의 차남 임성군(臨城君) 황(? : 1665∼1690)을 계자로 맞이했다. 그러나 26세나 살았지만 무사하여 형 임창군(臨昌君) 혼(턏 : 1663∼1729)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 : 1689∼1750)을 계자로 삼아 장손파가 이어 내려왔다.

소현세자의 차남 경완군 석린은 귀양시 제주도에서 11세로 죽어 후사가 없다. 셋째 경안군 회는 소현세자가 인질로 붙들려가 있던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나 1647년(인조 25) 5월에 8세의 어린나이로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효종 때 석방되어 돌아와 복작되어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이르렀다. 이 경안군이 아들 둘을 낳아 큰 집으로 양자를 보냈으니 소현세자파는 실제적으로 이 경안군의 혈손들이다. 그래서 경안군의 장손 밀풍군(密豊君) 탄(坦 : 1698∼1729)이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소현세자파에서는 문과급제자로 재영(載英 : 1830∼1870)과 필용(弼鎔 : 1848∼?)이 있고, 기타 무과출신과 참봉 약간이 있을 정도로 밀풍군 사건으로 후손들이 몰살되다시피 되어 약세의 파종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璿源續譜

종원 분포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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