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파 약사

연령군(1699∼1719)


휘는 훤(日日)이요,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숙종대왕의 6남으로 어머니는 명빈(示冥嬪) 박씨이다.

연령군은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근실했다. 1703년(숙종 29)에 군으로 봉해지고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연령군이 5세 때 어머니 명빈 박씨가 별세했다. 1707년(숙종 33) 상산김씨 수찬(修撰) 동필(東弼)의 딸과 혼인했다. 1708년 연령군 저택을 마련해 주라는 왕명이 내렸는데 신하들이 호화주택을 반대하여 선조대왕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사서 주었다.

1711년(숙종 37) 11월에 연령군은 10여 일간 마마를 앓았다. 그리고 1718년(숙종 44) 4월에 도총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 향년 21세로 별세했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차남 상대(尙大 : 譜名 晉錫 : ?∼1733)를 계자로 삼고 이름을 공()이라 고쳤다.

1725년(영조 1) 배위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 김씨(1698∼1725)가 29세로 별세했다. 1727년(영조 3) 1월 연령군집 종이 시민과 싸웠는데 종부시에서 그 시민을 잡아가 문초하다가 죽어 물의를 일으켰다. 그 해 12월에 계자 공을 상원군(商原君)으로 봉했다. 1733년(영조 9) 상원군이 자식도 없이 별세하여 파양(破養)하고, 낙천군(洛川君) 온(縕)으로 계자를 삼았다. 그리고 1736년(영조 12) 낙천군 온을 시직(侍直) 김치만(金致万)의 딸과 혼인시키려 했는데 김치만이 끝내 반대하자 김치만을 삭탈관직했다. 그러나 낙천군이 조졸하니 달선군(達善君) 영(泳)을 낙천군의 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 달선군 영을 파양했다. 이유인즉 낙천군 부인 서씨(徐氏)가 양아들 달선군 영과 며느리 신씨(愼氏)를 괴롭히자 달선군이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777년(정조 1) 은신군으로 연령군의 후사를 삼았다.

장조대왕의 2남인 은신군(1755∼1771)은 휘가 진(?)으로 어머니는 숙빈(肅嬪) 임씨이다. 1771년(영조 47) 장조대왕을 아사케 충동질한 김구주(金龜柱 : ?∼1786) 등의 무고로 제주도에 귀양가서 병사했다. 정조대왕이 즉위하자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증직되고 소민(昭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871년(고종 8)에 충헌(忠憲)이라고 개시(改諡)되었다. 배위는 남양홍씨인데 후사가 없어 인평대군파 5대손 생원 병원(秉源)의 차남 유학(幼學) 채중(寀重)을 구(球)로 개명하고 남연군(南延君)으로 봉하여 은신군의 후사로 삼았다.

남연군 구(球 : 1788∼1836)는 흥녕군(興寧君) 창응(昌應 : 1809∼1828) · 흥완군(興完君) 정응(晸應 : 1815∼1848) · 흥인군(興寅君) 최응(最應 : 1815∼1882)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 : 1820∼1898)의 4남을 두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대통을 이어 고종황제가 되자 고종황제의 아들 순종황제와 황태자 영왕으로 선원세계가 이어지고 그 나머지 지손들은 연령군파에 속하게 되었다.

연령군파의 인물로는 최응이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을 지냈고 그 아들 재긍(載兢 : 1857∼1881)은 판서를 지냈으며 재긍의 양자 지용(址鎔 : 1870∼?)은 한일병탄의 중역을 담당했다. 창응의 아들 재원(載元 : 1831∼1891)은 이조판서를 거쳐 갑신정변 때 3일천하의 영의정을 했으며, 정응의 아들 재완(載完 : 1855∼?)은 이조판서 · 내무대신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큰 아들 재면(載冕 : 1845∼1922)은 판서 · 영돈녕을 지냈고, 그 아들 준용(埈鎔 : 1870∼1917)은 참판을 거친 이른바 준공(埈公)이라는 분이다.

현존인물로는 의친왕의 아들인 석(錫 : 海錫), 흥선대원군의 종손이면서 현손인 청(淸), 흥완군 정응의 후손인 해영(海英 : 전 서울대 교수) · 철주(鐵柱 : 전 연세대 교수) · 계주(桂柱 : 숙대 교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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