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조대왕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20세 도조대왕의 제2남으로 이름은 자춘(子春)인데 자도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1360년 8월에 장례지냈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배위는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이니 본적은 영흥(永興)이요,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를 받고 조선조에서 판문하(判門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을 추증받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화릉(和陵)으로 환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사자는 태조고황제이고, 장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환조대왕은 따로 두 배위를 두었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완산실록> <동국세기> <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환조대왕은 가난하여 방랑하느라고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때 조조(趙祚 : <동국세기>에는 趙助, <충효전>에는 趙礎)란 갑부가 있어 자식은 무남독녀라 훌륭한 가문의 신랑(<동국세기>에는 金仁智의 아들, <충효전>에는 金之仁)을 맞아들여 재산의 반을 주고 노후를 위탁하려 했다. 그러나 그 딸은 천생배필이 따로 있다고 거절하고 버티었다. 그런데 갑술년 3월 7일에 환조대왕이 매우 남루한 옷차림으로 조조네 집 사랑채 퇴마루에 걸 터앉아 있었다.

이때 그 처녀가 낮잠을 자다 꿈을 꾸니 두 마리 용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 한 마리는 울타리 밖에 서려 있고 또 한 마리는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처녀는 곧 하인을 보고 밖을 살펴 보라 하니 환조대왕이 밖의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지라, 부모에게 종용하여 맞이해다가 날짜를 택하여 혼인하니 이 한쌍의 부부는 요조숙녀(窈窕淑女)요 군자호구(君子好逑)라 했다. 이에 이 소문이 7월 18일에 경산태수(慶山太守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慶興府使) 안유(安裕)의 꿈속에 조짐으로 나타나 알게 되고, 또 당시 동요에 `주 초(走肖 : 趙)가 이 여자를 낳았고 이 여자가 용손을 낳는다네(走肖生是女 是女生龍孫)\'라는 말이 유행하여, 안유가 조조를 불러 신분을 감추라고 권유하며, 조조는 어머니 성을 쫓아 최씨로 성을 바꾸니 이분이 최한기(崔閑奇)로서 태조고황제의 외조부라 하였다. 그리고 이 최 씨 여인이 잉태한 지 14개월만인 을해년 10월 11일 묘시에 아들을 낳으니 곧 태조고황제이다.

환조대왕 - 탄생지(誕生地)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탄생지(誕生地)

 환조대왕의 탄강연도는 1315년(고려 충숙왕 2) 을묘년이요, 탄강지는 함경남도 덕원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의하면 도조대왕은 환조대왕을 낳은 경비(敬妃) 박씨(朴氏)가 돌아가신 후에 영흥(永興 : 和州)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환조대왕의 탄강지는 영흥으로 이주하기 전의 주소인 덕원이다.

환조대왕 - 가법 승전(家法 承傳)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가법 승전(家法 承傳)

 처음에 도조대왕의 정실(正室) 경비(敬妃) 박씨(朴氏)는 두 아들을 낳으니 자흥(子興 : 몽고명 塔思不花)과 자춘(子春)이다. 계실(繼室) 조씨(趙氏)도 두 아들을 낳으니 완자불화(完者不花)와 나해(那海)이었다.
 
도조대왕이 돌아가심에 적자인 자흥이 이어받았으나 자흥은 계승한 지 두달만에 돌아가고, 그 아들 교주(咬住)는 또 나이 어리었다.

 이해 계실 조씨는 자신의 둘째 아들 나해에게 관직을 이어받게 할 목적으로 흉계를 꾸며 거상(居喪) 중에 선명(宣命)과 인신(印信 : 도장)을 훔쳐 갔다. 그러나 관내의 군민(軍民)들은 모두 이르기를 “조씨는 적실이 아닌데 나해가 어찌 어버님의 관직을 이어받을 수 있느냐”하고, 노하였다.

 결국에 원나라 정부는 환조대왕으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받게 하고, 한편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해를 목베게 하였다.

 환조대왕은 큰 조카인 교주가 점점 자라감에 선친의 관직을 그에게 돌려주려고 하니, 교주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는 후에 숙부님 환조대왕을 따라가서 공민왕을 뵈오니 왕이 교주를 우달치(迂達赤)란 시위병에 소속시켰는데 벼슬이 중순군기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환조대왕 - 동북면 수복(東北面 收復)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동북면 수복(東北面 收復)

 1352년(고려 공민왕 1) 전후였다. 대륙에서 북방 몽고족의 영화(榮華)는 가실 줄을 모르던 중, 마침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 : 1320∼1370)가 음락(淫樂)에 빠져 국정을 문란케 하였다. 만백성은 생활고로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남방 한인족(漢人族)의 반란군 은 사방에 벌떼와 같이 일어난 것이다.
 
영평(永平 : 河北省)에선 한산동(韓山童) · 유복통(劉福通) 등의 홍건적이 군사를 일으키고, 대주(臺州 : 浙江省)에선 방국진(方國珍)이, 호주(濠州 : 安徽省)에선 곽자흥(郭子興)이, 고우(高郵 : 江蘇省)에선 장사성(張士誠)이, 곽자흥 부하에선 주원장(朱元璋 : 명태조 · 1328∼1398) 등이 일어나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드디어 때는 온 것이다. 공민왕은 이 절대호기를 놓칠세라 고려국의 왕권복고라 하는 자못 진취적인 시정정책을 세웠다. 공민왕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정책을 세우고 있던 바로 그때 개경(開京)에 홀연히 한 어른이 나타난 것이다. 다름 아닌, 동북면에서 후덕하고 가법 이 엄연하기로 이름 난 `리씨호족\' 신흥세력의 우두머리 어른인 환조대왕이었다.

환조대왕 - 동북면 수복(東北面 收復) (2)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1355년(고려 공민왕 4) 환조대왕은 고려조의 궁궐에 들어가서 공민왕을 뵈오니, 왕이 이르기를 “경의 조부[翼祖]가 몸은 비록 나라 밖에 있었으나 왕실에 마음을 두고 있었으므로 나의 조부[忠烈王]가 참으로 총애하고 가상히 여기셨었다. 지금 경은 경의 조부에게 질 바가 없구나. 나는 장차 그대가 성공하도록 소중히 여길 것이다.” 하였다.
 
그때 원나라가 동북면을 점령하여 영흥에 설치한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는 동북면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종족들은 황후의 세력을 믿고 점점 난폭해졌다.

 이때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 : ?∼1356)은 원나라 대사도(大司徒)로서 쌍성 관리인 조소생(趙小生) · 탁도경(卓都卿) 등과 몰래 통하여 고려에 반역을 도모한 것이다.

 환조대왕은 공민왕을 뵈온 지 그 이듬해에 다시 올라와 공민왕을 뵈었다. 왕은 반가히 맞으면서 이르기를 “경은 우리 고려인의 군민을 관령하면서, 악한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느라고 그 얼마나 수고하는가?” 하고 위로하였다.

 환조대왕이 떠날 무렵에 공민왕은 또 간곡히 당부하면서 이르기를 “경은 우선 돌아가서 내외의 백성을 모두 편안하게 하라. 그리고 혹시 변고가 있으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할 것이로다.” 하였다.

 드디어 환조대왕은 두번째로 왕을 뵈옵고 돌아온 바로 그해 1356년(고려 공민왕 5) 5월에 고려정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류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의 영흥에 있는 원나라 쌍성총관부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류인우 군대는 겨우 안변(安邊 : 登州)까지 진군하였다가 영흥까지의 거리 200여 리를 남겨 두고 북방의 한 신흥세력인 전주리씨 세력의 위력에 억눌려 도저히 진군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민왕과 환조대왕 사 이는 이미 깊어졌고 환조대왕은 또한 천하의 대세를 미리 밝게 알고 있었다.

 고려군이 안변까지 가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환조대왕에게 `협조해 달라\'는 교지를 전하였다. 왕은 교지와 아울러 또한 예의를 갖추었는데, 환조대왕에게 시소부윤(試小府尹)을 제수하는 동시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또 품계를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올려 주었다.

 그렇잖아도 환조대왕은 오직 조국강토의 수복을 일념으로 생각하던 때인지라 즉각 군졸과 군마를 단속하여 친군(親軍)으로 하여금 류인우의 군사와 합군하게 하였다.

 이렇듯 환조대왕과 태조고황제 부자는 류인우의 군대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쳐부수니, 조소생과 탁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연달아 환조대왕 · 태조고황제는 진격을 계속하여 동북면의 14주(州)와 함주(咸州 : 咸興) 이북의 합란(哈蘭 : 咸興) · 홍헌(洪獻 : 洪原) · 삼살(三撒 : 北靑)의 땅을 모두 탈환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땅이 원나라에 점령당한 해로부터 99년만에 수복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류인우는 재물을 탐내어 살육을 심하게 하다가 매우 인심을 잃었다.

 공민왕은 환조대왕에게 보훈으로 대중대부(大中大夫)의 사복경(司僕卿 : 궁중의 고등관)을 임명하고, 동시에 개경의 제1구(區)에 저택을 하사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
환조대왕 -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 겸임(兼任)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 겸임(兼任)

 드디어 환조대왕은 서울인 개경으로 이주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왜적이 양광도(楊廣道 : 경기도)에 침입하여 개경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이때 환조대왕은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 군기감의 판사)에다가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되어 나아가 왜적을 물리쳤다.

 공민왕은 환조대왕에게 또 보훈하기를 통의대부(通義大夫)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나아가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 : 대장의 윗계급)이라고 하는 군부 최상의 계급을 제수하였다.

환조대왕 - 삭방도병마사(朔方道兵馬使)로 승진(昇進)
제 0대조   이름(한글):환조대왕   이름(한자):桓祖大王

삭방도병마사(朔方道兵馬使)로 승진(昇進)

 공민왕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3월에 환조대왕에게 다시 영록대부(榮祿大夫)의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란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시에 목조대왕 · 익조대왕 · 도조대왕 · 환조대왕 4대에 걸친 군부의 천호(千戶)관직에서 만호(萬戶)관직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삭방도 (朔方道 : 함경도)로 출발하게 하였다.
 
이때 환조대왕은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라고 하는 여진 접경지대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출발하려 하자 고려정부의 사대부들은 모두 홀적청(忽赤廳)에 모여 송별연을 열어 위로하고, 연이어 회빈문(會賓門) 밖까지 나열하여 환조대왕을 정중히 전송하였다.

 공민왕은 드디어 환조대왕에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제수하였다.

 환조대왕이 삭방도로 떠나고 얼마 안가서 치보(馳報 : 급히 달려가서 알림)가 도달하였다. 그에 이르기를 “고려인으로서 학정에 못이겨 여진땅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환조대왕의 명령에 따라 모두 되돌아왔다.”고 하였다.

 환조대왕이 함경도로 떠난 그해 1360년(고려 공민왕 9) 신축년 4월에 갑자기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환조대왕의 보령이 46세였다.

 환조대왕 승하의 부고에 접한 공민왕과 고려정부의 사대부들은 모두 애석히 여김을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함흥부의 귀주동에 장사지내니 이곳이 정릉(定陵)이다.

 정릉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환조대왕이 승하하자 태조대왕이 부왕의 산소 자리를 찾던 중, 집안의 나무꾼 아이가 나무하다가 도승(道僧)과 사미승(沙彌僧)이 산줄기를 가리키며 저곳이 왕이 나올 자리라는 소리를 엿듣고 달려와 태조께 아뢰어, 태조고황제는 달려가 정중한 예로 맞아 대접하고 그 중 들의 도움으로 부왕의 장례를 마치니 이곳이 바로 정릉(定陵) 자리라 하였다. 이때 도승은 고려말의 유명한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이요, 사미승은 후일에 유명했던 무학대사(無學大師)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