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대왕 - 세조의 정통성 확인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세조의 정통성 확인
조선 전기 특히 단종에서 세조로, 세조에서 예종으로 이어지는 승계 과정을 살펴 본다면, 전자는 앞서 밝힌 개혁과 강화로 이어지는 단계였으며 후자의 경우는 그 확인을 위한 노력의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종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확인하고 왕실의 위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세조의 묘호를 정하는데 있어서 나타나고 있다. 예종이 즉위한 달인 9월 경진일의 실록기사를 보면, 정사를 대리하는 정승 영성군 최항과 도승지 권감에게 지시하기를,
“돌아간 임금은 존호를 미처 올리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슬픈 마음이 그지 없다. 이제는 시호를 빨리 올리려고 한다. 옛날에는 초상난 달이 바뀐 다음에 시호를 정하였다. 이것은 자식으로서 자기 부모를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뜻이었지만 그러나 이미 염도 하고 빈전도 꾸리었으니 이제야 더 무엇을 말할 것이 있겠는가. 존귀한 시호를 빨리 올리자는 것이 대비나 나의 간절한 소원이다.”
라고 하여 시호를 올릴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최항 등은 옛 제도를 참고하여 아뢰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올린 묘호와 혼전 및 능호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세조 자신도 물론 자신이 재위한 것에 대해 말년에 이르러 그 계통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비쳤지만 그것은 겸사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세조 자신이 이룩한 업적은 왕권의 강화 뿐만이 아닌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있는 것이었고 묘호나 능호 등은 이러한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이러한 의미를 포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역대 군왕의 경우 대부분 이 방식을 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예종이 신하들이 올린 안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종대왕 - 세조의 정통성 확인 (2)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신료들의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묘호는 신종(神宗) · 예종(睿宗) · 성종(聖宗) 중에서, 시호는 열문 영무 신성 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로, 혼전(魂殿)은 영창(永昌) · 장경(長慶) · 창경(昌慶) 중에서, 능호는 경릉(景陵) · 창릉(昌陵) · 정릉(靖陵) 중에서 하소서.”
라고 올리자 예종은 이를 본 후 불만을 표하면서 권감(權톯)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승천 체도(承天體道) 네 글자는 본래 존호인데 내게 이르기를, 그대로 한다고 하였다가 이제 없앴으니 이는 나를 꾀는 것이다. 저번에 내가 한계희(韓繼禧)에게 이르기를, 자수(字數)를 제한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제 여덟자로만 제한하였으니 내가 어리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가?”
라고 하니 좌우에서 삭연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 때 좌의정 박원형(朴元亨)이
“승천 체도 네 글자는 헛된 것 같기 때문에 신이 참으로 의논하여 없앴습니다.”
라고 하자, 예종은
“대행 대왕께서 재조(再造)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라고 하여 보다 부왕의 업적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진노한 예종의 심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정인지 등은 여덟 글자로 한 것은 자신들이 제한한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의 시호가 모두 4자 · 6자 · 8자이기 때문에 이를 따른 것이고 세조라 정하지 못한 것은 세종(世宗)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종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 세조가 있고 또 세종이 있었는데 왜 할 수 없는가 라고 되물었고 이에 참석한 신하들이 대죄(待罪)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다시 시호는 `승천 체도 지덕 융공 열문 영무 성신 명예 인효 대왕 (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大王)\' 으로, 묘호는 `세조(世祖)\'로 하여 계달하자 예종은 여기에 더하여 인효 위에 의숙(懿肅)을 더하고, 능호는 태릉(泰陵)으로, 전호(殿號)는 영창(永昌)으로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25일 신숙주가 광주(廣州)로부터 돌아와 복명하자 어제 정한 것을 보이니, 신숙주는 능호를 태릉이라 함은 당나라의 현종의 능호가 있는데 현종이 훌륭한 임금이 아니니 고칠 필요가 있으며 `승천 체도 열문 영무\'의 존호를 시호 앞에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시호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의숙 인효 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 聖神明睿懿肅仁孝大王)\'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묘호 · 시호와 관련된 당시의 논란은 부왕인 세조의 업적을 높이려던 의도 이외에도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부왕의 죽음으로 혹 느슨해질 수 있는 정치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우회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세조에 대한 지극한 추모를 왕 자신이 보이고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예종이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승하하게 된 배경으로 실록의 기사와 애책문(哀冊文)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왕에 대한 효성심에서 비롯되어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채 격무에 시달려서 갑작스럽게 서거한 것으로 지문(誌文)에 실려있다.
“처음에 세조께서 병에 걸렸을 때, 왕이 시선(視膳)하고 상약(嘗藥)하였으며, 밤낮으로 시병(侍病)하여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여러 달이었다. 세조가 승하함에 미쳐서는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어 작음(勺飮)도 마시지 않아서 드디어 절선(節宣)을 어기었다. 겨울에 이르러서는 병이 생겨서 날로 심하였는데, ……”
라고 하여 영양 섭취와 휴식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에서 병이 생긴 것으로 밝힌다.
예종대왕 - 세조의 정통성 확인 (3)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예종은 혹 세조와 관련하여 유언비어가 돌거나 왕실 내에서의 이상 기류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조사 처벌하였다. 특히 예종 자신이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렸을 때 이에 응하는 글에서 세조를 약간이라도 비방하는 글이 있는 경우에도 이를 문제삼았던 것이다. 구언에 대한 응지진서(應旨進書)의 경우 대간(臺諫)들이 상소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내용에 대해서도 처벌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예종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왕위 계승 자체에 대한 논의로 진전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과감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세 번째로는 사옥(史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면서까지 그러한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옥은 예종 원년 4월 24일부터 27일까지의 4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있어 1차 기록인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에 관련된 것이었다. 즉 24일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세조대왕실록>을 편수하면서 사초를 거두어 들였을 때 봉상첨정(奉常僉正) 민수(閔粹)가 사초에 대신의 득실을 쓴 것을 지우고 고친 일이 발각되었다. 본래 사관의 사초에는 기록자의 이름을 기재하는 것이 관례인데 민수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대신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과, 들어 알게 된 사실들을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초를 내어다 준 강치성(康致誠)과 관련자로 지목된 원숙강(元叔康) · 이인석(李仁錫) 등이 국문과 친국(親鞫)을 당하고 마침내 부처(付處)되었다.
이 사옥에서 분명한 것은 민수 등이 대신의 시비에 대한 것을 고쳐 쓰고 임금 즉 세조의 허물은 그대로 쓴 것에 대해 예종이 크게 진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문 과정에서 민수가 가까이 있는 대신의 처벌은 두려워하고 군왕의 처벌은 좀 더 멀어 그러하였노라고 하는 대답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를 좀 더 확대해석한다면 조정에는 대신이 모든 정사를 처결한다는 논리로 나아가 군주의 위상이 매우 미약해지게 된다.
더구나 세조와 관련해서는 그 허물을 그대로 쓰면서 대신들의 허물은 고쳐 썼다는 것은 그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예종으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종은 이러한 사옥을 통하여 전례를 따르는 처벌을 하면서도 왕권의 위상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다시 재천명하고 모든 신료들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1469년(예종 원년) 7월에 마련되고 있는 종친을 규찰하는 조문의 내용은 종친의 위상을 재고하는데 있어 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종친 자신이 왕과의 혈연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학문을 게을리 하거나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그 처벌을 두려워 하지 않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왕실의 위상과 존엄을 생각한다면 이는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종친의 경우 나라의 가장 큰 권력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친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친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규제였다. 그러나 종친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세워나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안은 없었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예종 원년 7월 임오일에 영의정 한명회와 서평군(西平君) 한계희 등이 만든 법식이다.
예종대왕 - 세조의 정통성 확인 (4)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내용은 종부시 제조와 종학관은 매달 문(文)을 닦는 종친에게 사서 오경 · 사학(史學) · 무경(武經) · 병요(兵要) 등의 한 책에서 세 곳을 강하여 4계월(季月)마다 통(通) · 불통(不通)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할 것과, 종부시 제조와 도총관은 무(武)를 닦는 종친에게 화살 3개씩 과녁에 쏘기를 두 차례 시험하여 4계월(季月)에 맞힌 수를 갖추어서 아뢸 것, 문무 종친이 전강할 때와 관사할 때에는 경서와 사어(射御)를 시험하여 4계월에 획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혹은 가자(加資)하고 혹은 준직(準職)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검토 속에서 예종조 왕실의 위상은 정통성 계승과 이의 강화를 꾀하였다는데 있다. 자칫 원상(院相)이나 공신 세력들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었던 정국의 방향을 왕실 중심 체제 그대로 유지하였던데 있었다 하겠다. 그것은 아쉽게도 예종조에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그의 그러한 의도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정희왕후 및 자신의 친정을 통해 왕실의 위상을 분명히 해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종대왕 - 왕권의 안정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왕권의 안정
왕실의 위상과 그 권위를 분명히 한 예종은 더욱 정치권의 긴장과 부정을 막으면서도 합리적인 정국 운영을 시도하였다. 즉위 초에 있었던 남이(南怡)의 옥사를 통해서는 긴장을, 분경금지(奔競禁止)를 통해서는 인사 부정에 대한 처벌을, 탐주법(探籌法)과 경연을 통해서는 군주로서의 해야 할 일과 군권(軍權)의 실체에 대한 접근 등을 도모하였으며 예종은 이를 통해 다시금 강력한 왕권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예종의 이러한 업적을 그 동안 접근하지 못한 점은 그가 너무도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하였기 때문이며 또 단지 강력한 왕권을 표방한 세조와 이를 보다 세련되면서도 극대화시킨 성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재위한 것에 기인한다.
예종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듯 그의 세자 수업에 대한 세조의 관심은 지대한 것이었고 그 또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철저한 군왕 공부를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초는 세조 말년 정사에 참여하면서 실질적인 것으로 변하였고, 점차 군도(君道)가 어디에서 그리고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즉위한 이후에 오히려 더 구체화될 수 있었다.
정권의 변동은 혼란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기회로 작용한다. 또한 정치 세력간의 갈등이 가장 표면화되면서 다시금 교통정리가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예종이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정국에 임했는가와 그가 행하고자 한 왕권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남이의 옥사는 1468년(예종 즉위) 10월 24일 저녁 무렵의 일로 시작된다. 즉 어두울 때에 병조 참지 류자광(柳子光)이 남이가 반역을 도모하고자 성변(星變)을 거론하며 그 뜻을 비추었다고 계달하였고, 이로 인해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와 의산위의 아들로서 당시 불과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와 겸사복장의 지위에 올랐던 남이는 능지처참 당하게 된다. 여기에 연루된 이들은 남이의 당여라 하여 모두 극형에 처해져 능지처참과 유배, 적몰(籍沒) 등을 받았다. 그러나 그 국문 과정은 차치하고라도 그 배경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면 과연 남이가 역모를 일으키고자 하였을까 하는 회의가 생긴다. 성변(星變)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세조의 상사(喪事)는 당시의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 와중에서 남이가 강순 등과 더불어 보성군(寶城君) 합(?)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그 진실을 떠나서 즉위 초에 있을 수 있는 정치적 동요가 그대로 그 배경이 된 것이라 하겠다. 예종은 이러한 남이의 옥사를 처결하고 나서 남이의 죄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예종대왕 - 왕권의 안정 (2)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권신(權臣)에게 아부하여 스스로 위복(威福)을 만든 것이 첫째 죄이요, 자기의 공을 나타내고자 하여 깊이 반복(反覆)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이 둘째 죄이요,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이 셋째 죄이요, 인심을 권장하고 유혹하여 자기의 술책 중에 빠뜨린 것이 넷째 죄이요, 적신(賊臣)의 말을 믿고 들어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 것이 다섯째 죄이요, 인심을 거짓으로 유혹하여 위협(威脅)으로 신칙한 것이 여섯째 죄이요, 법을 범하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혀 민심으로 하여금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게 한 것이 일곱째 죄이요, 스스로 힘이 강한 것을 믿고 주상을 경멸한 것이 여덟째 죄이요, 신하가 되어 불충한 것이 아홉째 죄이요, 법을 어지럽히고 당류(黨類)들을 모아 백성들에게 학대를 베푼 것이 열째 죄이다.”
라고 하여 그 죄명을 밝히고 있으나 구체적이지 않고 다만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따라서 남이의 옥사와 관련하여 예종이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는 데에는 왕권에 대한 어떠한 도전에 대해서도 엄벌에 처함으로써 그 권위를 확보하고자 한 데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예종의 의지는 분경(奔競)을 금지하고자 한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인사 청탁이 거론되는 분경은 역대 제왕들이 모두 금지시키고자 하였지만 별반 소용이 없었다. 분경은 사사로운 친분 관계에서 비롯되어 진급과 근무지 변경 등을 세력가에게 부탁함으로써 그들간의 특수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결국 왕권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히 어긋난 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러한 분경에 대해 약간은 눈감아 주거나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종은 바로 왕권의 위상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즉, 즉위년 10월 4일에 승정원 · 이조 · 병조 · 사헌부에 전지하기를
“정사는 나라의 큰 권한인데, 사(私)에 따라 공(公)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하건대, 정시(正始)의 초기에 혹시 세력으로 인하여 청탁을 얻어서 천록(天祿)을 외람되게 받음이 있으면, 이제부터 대사헌 및 집의(執義) 이하 1원이 정청(政廳)에 와서 참여하고 위장(衛將)이 2부를 거느리고 모든 분란(紛亂)을 금하며, 마음대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비록 종친 · 재추 · 공신일지라도 즉시 쇄항(鎖項)하고 뒤에 계문(啓聞)하며, 만일 숨김이 있으면 마땅히 족주(族誅)하겠다.”
라고 하였다. 보름 뒤인 10월 19일에는 선전관(宣傳官)을 종친과 재추의 집에 분견(分遣)하여 분경(奔競)을 적발하였다. 또한 감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헌부(司憲府)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하여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왕이 직접 분경으로 적발된 이들을 문초하여 그 의지의 완강함을 보였던 것이다. 임금은 한 사람인데 권문을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왕의 문초 내용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강력한 군주로서 군림하였던 세조가 승하 하자 정국은 일시적인 권력 공백 상태가 형성되었고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느냐가 왕에게 닥친 관건이었다. 특히 왕권의 부재란 결국 권신들과 대신들의 세력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분경(奔競)이나 반역 도모, 여러 사회적 불안요소들은 이러한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왕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와 함께 왕 자신의 군주상을 조성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종대왕 - 왕권의 안정 (3)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이를 위한 작업으로 왕이 시행하였던 것은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분경 금지와 남이의 옥사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왕이 시도한 것은 바로 왕실 종친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특히 단종조 이후 분열된 왕실 지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두고두고 왕실의 상처로 남을 여지가 있었다. 보성군(寶城君) 합과 구성군(龜城君) 부자의 문제를 처리한 과정이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왕실들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었다. 또한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을 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서쪽에서 여흥 즉 여주의 영릉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길지가 아니라는데 따른 것이었고 특히 예종의 이 같은 영릉의 천릉은 성군으로 추앙되는 세종을 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에 대한 재확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분경을 금지케 하는 조처와 함께 대납(代納)을 금하는 조처에 대한 어찰을 내렸다. 그 내용은,
“1. 일을 부탁하는 자는 비록 중한 것이라도 그 실정에 따라 죄를 논하고,
1. 이제 비록 대납을 금하였을 지라도 만약 수령이 이것으로 인하여 수렴한다면 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는 더욱 가혹하므로 능지함이 가하며,
1. 수령 · 만호 및 관찰사 · 절도사 등은 명을 받아 일을 나누어 맡아서 지방을 진어하는데 만약 백성에게서 수렴하여 많이 싣고 올라오면 이는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 도둑을 금하겠는가? 이와 같이 하는 자도 죄가 같다.
1. 알면서 고하지 아니하는 자도 또한 율에 의해 논단하라.”
라고 하였다. 이를 엄격히 시행토록 하기 위해 12월에 거리에 방을 붙여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1469년 (예종 1) 4월에는 사헌부에서 호패법(號牌法)과 관련하여 늘어난 노비에 대한 변정과 추쇄를 청하자 그 사목에 따라 행하도록 조처하였다.
관료의 천전법(遷轉法)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여 그 기한과 고과에 맞도록 조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삼관도목천전법(三館都目遷轉法)이었다. 이것은 한명회의 건의로 복구된 것으로, 천전법은 국초 삼관(三館)을 두어 처음 과거에 올라 산관(散官)을 받은 자를 분속하고 차차로 올려 매 1도목마다 1원을 올려주었던 것인데, 예종이 다시 설치한 천전법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인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운용하는데 있어 문 · 무과를 동시에 볼 때 이를 원하는 자의 경우 번갈아서 시험하도록 하였고, 무거(武擧)는 향시(鄕試) · 원시(院試) · 회시(會試)는 여러 날 동안 시취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개장하도록 하였으며, 전시(殿試)의 경우는 하룻만에 끝내기 때문에 양과에 든 자를 시재하기 위해서라도 무거의 전시는 매번 문과 다음 날에 치르도록 정하였다.
예종대왕 - 왕권의 안정 (4)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또한 성균관 유생에 대해서는 매년 춘 3월과 추 9월에 공궤(供?)하고 의정부 · 본조 및 관 각 당상이 성균관에 모여 혹은 강론하고 혹은 제술하게 하되, 삼서(三書)를 대통한 자와 3차에 1등한 자는 회시문과(會試文科)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고 유학(幼學)으로서 1서를 통하거나 혹은 1차에 1등한 자는 통계하여 생원 · 진사시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고 전강(殿講)의 횟수를 헤아리게 하였다.
사학(四學)의 경우도 유생 80인을 간택하여 남학(南學)에 한꺼번에 모아 공궤하고 시험은 성균관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6월에는 예조에서 과거시에 의당 행하여야 할 건으로 올린 8가지의 조목을 그대로 따랐다. 그 내용은 거자(擧子)에 대한 것, 과시 감독 관원에 대한 것, 과장에서의 금지사항 및 지켜야할 원칙 등이어서 과장의 관리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 정해진 원칙에 따라 조선 시대의 과거는 이후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원년 5월에는 예문관 · 성균관 · 전교서 · 훈련원의 7품 이하의 천전(遷轉) · 거관(去官)하는 절목을 정하여 하급관리의 서용에 있어 지나친 적체나 지체를 막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거와 관리 임용에 있어서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처리와 함께 왕이 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형옥과 관련한 부분이었고, 대체로 세조조에 마련된 <경국대전>의 형전을 따랐지만 그 법규가 미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보충하기도 하였다. 혹한이나 가뭄, 질병, 심한 고문 등에 대한 형벌의 적용과 사면을 적절히 하거나 혹 일의 사유를 알고도 판결을 잘못한 관리에게는 `임금의 교지를 어긴 율 즉 위제율(違制律)\'로써 논하도록 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3월 을사일에 예종은 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함으로써 법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혔다.
“임금이 법을 세운 것은 반드시 행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근래에 형벌을 받는 사람이 자못 많아서 바깥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다만 사람을 형벌하는 것만 듣고 나를 가지고 새로 임금이 되어 함부로 형벌한다고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내가 깊이 근심한다. 중외에 교시하여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내 뜻을 자세히 알게 하고자 한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세조조에 만세 성법으로 기획되어 역대 법전 및 중국의 법전, 현행 조선에서의 실상 등을 고려하면서 만들어진 <경국대전>은 세조 말년에 거의 형태가 갖추어졌으며, 1469년(예종 원년) 9월에 이르러 상정소 제조 영성군(寧城君) 최항 · 우의정 김국광 등이 <경국대전>을 보완하여 비로소 그 체제가 거의 완성되었다. 왕은 이에 따라 도승지(都承旨) 권감(權톯)이 “<대전>은 세조께서 가장 유의하신 일이니 비록 종묘에 두루 고하지는 못할지라도 청컨대 영창전(永昌殿)에는 고하소서.”라고 하자 이를 그대로 따랐다. 예종의 정치 법체제는 이렇게 완성된 <대전>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고, 그 기본적인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종대왕 - 직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직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
직전제는 왕권의 강화 및 안정과 함께 늘어난 관인층에 대해 그동안 국가에서 그 댓가로 전지(田地)를 사급하였으나 그 수요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취해진 조처로써 그 주요한 내용은 현직 관료에 대한 우대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봉사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체계인 과전법(科田法)의 기본정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의 안정은 곧 관료 체제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고, 관료 체제가 안정되면서 용관(冗官)이나 산관(散官), 혹은 적체되는 인사 관리가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뚜렷한 경제적 대책이 없는 한 그들에 대한 보상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조가 주의한 점은 바로 수조권의 세전(世傳)을 막는 것이었고 1466년(세조 12)에 비로소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신전(守信田) · 휼양전(恤養田)에 대한 조사 및 몰수가 이루어져 이를 다시 관료들에게 사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세조의 직전제에 대한 조처는 예종조에 들어서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바로 <경국대전>의 규칙을 따랐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신축일의 기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적고 있다. 즉,
“종친 및 동반 · 서반 각품의 직전은 매년 10월 그믐날을 기한으로 기한 전에 벼슬을 받은 자는 수조하게 하고, 비록 기한 후일지라도 상(喪)이 있거나 자신이 죽으면 반록(頒綠)하는 예에 의하여 수조하기를 허락하며, 또 새로 정한 <대전>의 사사전(寺社田) · 사전(賜田)은 1결마다 18부 3속을 적출하여 국용 세미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적출한 토지는 국용으로 붙이며, 무릇 수세(收稅)는 모두 이듬해 2월로 기한하소서.” 라고 하여 직전제 시행에 따르는 시행 원칙을 보충하였다. 이러한 예종조의 과도기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경국대전》체제가 완성되는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안착되게 되었다.
왕은 지방관 특히 수령의 임기에 대한 개정을 시도하였다. 1469년 2월 경인일에 상정소에서 아뢴 내용에 대한 재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수령의 체임은 육기법을 쓰되, 만약 당상관이거나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아니한 연변 수령일 것 같으면 삼기법을 쓰도록 하고, 또 부민은 종사에 관계되는 일과 비법살인(非法殺人)만 고소하게 하고 자기의 원통한 일을 호소하는 것 이외에 이전(吏典) · 예복(隸僕)으로 그 관원을 고하는 자와 품관 · 이민(吏民)으로 그 감사나 수령을 고하는 자는 모두 청리(聽理)하지 말고 장(杖) 1백대에 도(徒) 3년으로 논죄하고, 품관과 이민은 마을에서 내치며, 은밀히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관가에 고한 자는 그 죄도 또한 이와 같게 하소서.”
라고 하여 6년 임기의 6기법 채용과 수령의 직책을 보장하는 내용을 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국가의 부(父)는 왕이고 지방의 장(長)은 수령이므로, 수령은 곧 그 지방의 모든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데 수시로 바뀌거나 혹은 통치하는데 있어 혹 부민(部民)들의 고소 등으로 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를 막는 것이었고 이것은 지방 질서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즉 지방민은 수령을 어버이 따르듯 하며, 수령은 백성을 잘 이끌어 선정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원년 3월 예종이 제도(諸道) 관찰사에게 유시한 다음의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예종대왕 - 직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 (2)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하늘은 만물을 내고 기르는데 바람 · 서리 · 천둥 · 번개가 있는 것은 숙청해 죽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그러지고 편벽되고 요사스럽고 사나운 것을 부득불 씻어 없애고 대화원기(大和元氣)의 조화 속에 들게 하는 것이다. 임금이 만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데 항양(桁揚)과 부질(쯘?)을 쓰는 것은 형벌과 위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흉악하고 사납고 거스르는 것을 부득불 베어 없애고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정사를 행하려는 것이다. …… 대소 신민들이 혹 나의 흠휼(欽恤)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형벌의 위엄을 가볍게 쓴다하여 비난하고 속으로 그르게 여기는 것을 염려하여 중외에 전파하여서 모두 알도록 하라. 수령은 백성의 부모인데 만일 법령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재물을 탐내어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이 또한 스스로 형륙(刑戮)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나는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스스로 공경하고 삼가여 유사(有司)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여 형벌을 적용하는 뜻과 이에 대한 백성의 오해를 불식하고, 또한 수령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적고 있다.
왕이 특히 형벌 적용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즉위 초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정치 질서 및 사회상을 바로잡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즉위초의 상황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것이고 이를 어떻게 잘 조치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집권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왕은 원년 5월 임자일 문폐사(問弊使)를 각 도에 파견하여 지방 통치의 대강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도둑의 체포와 연변의 방어상황, 수령과 만호에 대한 감찰, 송사(訟事)의 청리(聽理), 군기(軍器)의 적간(摘奸), 당번 군사의 점고, 봉수(烽燧)와 성자(城子)의 적간, 진상 물건의 조사 등이었다.
이러한 지방 통치 질서의 확립 의지는 특히 도둑의 체포 및 금지에 관한 조처에서 더욱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둑의 횡행은 지방 질서 뿐만 아니라 결국 국가 통치 질서의 마비 및 취약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각 부분이 서서히 썩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초기에 진압치 않으면 결국 불안한 사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왕은 이들 도적들에 대한 진단을 올바로 시의적절하게 내렸던 것이다. 먼저 1468년 12월 형조 판서 강희맹이 품신한 도적을 다스리는 사목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잘 반영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도적은 자복치 않더라도 증거에 의해 죄를 정할 것, 도둑질한 장물에 관계되면 정적이 명백하지 않더라도 고신(拷訊)을 행하여 그 정상을 캘 것, 절도에게는 자자(刺字)를 하며, 5관(貫)이상을 간직하면 수범(首犯) · 종범(從犯)을 묻지 않고 모조리 경면(?面)할 것, 강도 · 절도에 대해 엄한 형벌을 적용할 것, 강도의 정상을 아는 와주(窩主)는 초범이면 참형, 재범이면 교형(絞刑) 및 보오(保伍) · 이정(里正)에 대한 지정불수율(知情不首律)을 적용할 것, 도둑질하여 한꺼번에 모두 나타난 장물은 아울러 계산하여 단죄할 것, 적당(賊黨)을 같이 옥사(獄事)시킬 것, 신장(訊杖)의 재목을 수정목(水精木)으로만 하며 그 크기를 큰 머리는 지름 7푼, 작은 머리는 지름 5푼으로 할 것 등의 구체적인 사항들이었다.
도둑 체포 사목과 관련하여 왕은 원년 2월에 문폐경차관(問弊敬差官)을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에 보내어 `도적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적은 사목(事目)에는 그 임무가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 도적과 관련하여, “여러 고을의 아전과 고을 안의 군사를 적당하게 헤아려 뽑아서 거느리고, 3도에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 도둑을 잡도록 하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에 대해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