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대왕 - 직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 (3)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이 때 3도의 도둑이 크게 성하여 경차관을 나누어 보내어서 4월 초 2일에 모두 잡기로 약속하였다. 여러 고을 수령들이 진법(陣法)을 연습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일시에 거두어 잡았는데 충청도에서 도둑 4백 4명, 경상도에서 2백여 명, 전라도에서 70여 명을 잡았다.”

라고 하여 이때의 도둑소탕령의 결과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잡아들인 하삼도의 도둑에 대한 처리를 위해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농사철인 관계로 조속히 하여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왕의 도둑소탕령으로 당시 지방 산천 깊숙한 곳에서 도둑질을 하던 이들을 금단함으로써 촌민들의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은 어서(御書)로 제도 관찰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효유(曉諭)하였다. 왕의 애민(愛民)정신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다. 즉,

 “대저 여러 도를 능히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관찰사와 수령에게 명하여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오로지 농상에 힘쓰고 병기를 정비하며, 도적을 금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도록 할 따름이니, 백성을 해치고 스스로를 어지럽게 하려고 한 뜻이 아니다. 내가 과덕하고 암매하여 대업을 이어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얻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고통스러워할까 두려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생업에 편히 하고자 하였는데, 지난번 듣기에 충청도에 갇힌 사람이 4백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만약 도둑질을 범하여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는 그만이겠지만, 가벼운 죄로 갇힌 자는 속히 결단함이 옳으니, 어찌 옥중에 굳이 억류해서 농사를 폐하게 할 것이냐? 관찰사와 수령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아 혹 옥사를 지체하지 말게 하라.”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왕은 둔전병에 의해 경작되고 있던 둔전의 경작에 대한 일대 개혁을 취하여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제도와 제읍에 있는 둔전의 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둔전의 경영에 있어 일대 개혁이 필요한 판국이었다. 정작 문제의 해결법은 간단한 곳에 있었다. 바로 농사는 농사꾼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1469년 6월 갑자일에 예종은 호조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려 이를 확인하였다. “제도(諸道) · 제읍(諸邑)의 둔전(屯田)을 내년부터 백성들이 농사짓도록 하고 관에서는 절반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 라고 하였던 것이다.

 예종조는 그 짧은 치세기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짜임새있는 문화업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그것은 세조가 시도하다가 끝마치지 못한 일을 완성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세조의 뜻을 잘 받들어 일을 마친 예종의 업적에 대한 평가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1468년(예종 즉위) 12월 계사일에는 문사(文士)로 하여금 <세기대전(世紀大全)>을 편찬하여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으며, 1469년(예종 원년) 6월 계유일에는 <천하도(天下圖)>가 이루어졌고, 7월 무자일에는 <무정보감(武定寶鑑)>이 완성되었다. 또한 원년 9월 정미일에는 상정소에서 <경국대전>을 지어 바쳤다.  마지막으로 당시대에 예종의 생애에 대해 평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왕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예종의 행장 중 마지막 부분에서의 평가이다.
예종대왕 - 직전제의 시행과 지방통치 (4)
제 8대조   이름(한글):예종대왕   이름(한자):睿宗大王

“……왕은 영명(英明) 과단(果斷)하고, 공검(恭儉) 연묵(淵默)하였다. 세자가 되었을 때부터 고전[墳典]에 유의하여 시학(侍學)하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세 차례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기한 성서(祈寒盛暑) 일지라도 일찍이 폐지하지 않았다. 혜장왕(惠將王 : 세조)이 일찍이 이르기를, `세자는 육예(六藝)에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왕은 즉위한 뒤 국무를 처결하는 여가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독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싫어하지 아니하여, 금석(今昔)의 사변을 관철(貫徹)하였다. 교령을 내릴 때에는 모두 수찰(手札)로 쓰고, 또 친히 <역대세기(歷代世紀)>를 찬술하여 상하 수천재(數千載)의 사실을 역력히 밝혀 유루(遺漏)한 것이 없게 하였으니, 진실로 사학(史學)의 요령이었다.

천성이 또 인효(仁孝)하여 모비(母妃)를 섬기는 데 날마다 세 차례씩 조근하여 정례(情禮)를 극진히 하였고, 구족(九族)을 친목하고 군하(群下)를 예우(禮遇)하였으며, 가법(家法)이 매우 엄하여 여알(女謁)을 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혜장왕의 치평(治平)한 시대의 뒤를 이었으므로 비록 사방에 근심이 없었으나, 무비(武備)를 해이(解弛)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은부(殷富)하였으나 재용(財用)에 검박하였고, 대신을 연방(延訪)하고 허탄한 마음으로 간쟁(諫諍)을 받아들였으며, 정치가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이로운 일과 병폐로운 일을 강구하여 시정하였다. 수령(守令)들이 탐오(貪汚)함을 염려하여 감사(監司)를 계유(戒諭)하여 엄혹하게 법으로써 다스렸고, 도둑들이 백성을 해롭게 할 것을 걱정하여 사신(使臣)을 제도에 보내어 순행하면서 도둑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더욱 죄인의 옥고(獄苦)를 염려하여 자주 고계(告戒)하는 교서를 내려, 죄의 경하고 중함과 일의 어렵고 쉬움으로써 재판의 한계를 정하여, 죄수로 하여금 원통하게 지체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모든 신료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정치의 득실을 자문하고 부지런히 듣고 결단하며, 날이 늦도록 먹는 것도 잊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며, 농사를 권하고 학문을 일으키며, 중국 조정을 공경하게 섬기어 진헌(進獻)하는 물품을 반드시 친히 검찰하였다. 무릇 호령을 내어 사업을 조치하는 것이 모두 전열(前烈)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므로, 이 백성들이 바야흐로 좋은 세상이 될 것을 우러러 바랐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애달픈 생각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성종대왕 - 생애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생애

 지난 한 세월속에서 왕조의 풍상과 광명이 교차된 역사는 벌써 한 갑자를 훨씬 지나 완숙의 시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태조로부터 예종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일관되게 왕권의 노정은 많은 굴곡을 그리면서 이어져왔다.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은 영원함은 곧 성인(聖人)의 노력하는 바이고 만물의 바라는 것으로 노래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흐름이라는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부딪치고 막히고 돌아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인왕산과 북한산의 차가운 기운이 벌써 산줄기를 타고 궁궐을 휘돌아 나가면서 가을이라는 계절을 느끼게 하였다. 개국이래 최대의 옥사라고 할 수 있는 계유정난을 겪고 단종(端宗)으로부터 선위받아 왕위에 오른 세조로서는 한시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되었고 계절의 흐름은 이러한 그를 비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도 많이 흘린 피의 작업은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면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이러한 시기에 하늘의 운명을 받아 태어난 아기씨는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턱이 없었고, 세자궁의 안락함 속에서 세상의 온화함을 받으면서 그 고성을 우렁차게 터뜨렸다. 훗날 소혜왕후(昭惠王后)로 불려지는 세자빈 한씨도 그 산고를 겪으면서도 건강을 잃지 않았다. 이 아기씨가 외조부 한확(韓確)의 학식과 할아버지인 세조의 결단력을 갖춘 훗날의 성종이 된다.

 그러나 건강한 아기씨의 탄생과 산모의 건강은 모두 축하를 하였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데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대통을 이을 세자로 학문에 전념하고 있던 의경세자가 병을 앓기 시작하여 왕실의 분위기는 침통했고, 그를 위해 불사(佛事)를 행하여 병의 쾌차를 빌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경세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9월 2일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여러 면에서 예정되어 있던 안배를 변경시켰다. 사실 본래대로 승계가 이루어진다면 지금 태어난 아기씨보다 2년 먼저 태어난 형 월산대군이 원손으로 정해지게 되고 따라서 이 아기씨는 지친으로서 대군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의경세자 즉 덕종의 죽음으로 흐트러졌던 것이다. 하나의 우연은 그에 따르는 많은 필연의 요소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에 의해 그 자리는 메꾸어지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은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점차 만들어지고 그 흐름은 다시 한 제왕에게로 모여지게 된다.

성종대왕 - 생애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성종대왕(이하 성종이라 함)의 유년기 시절에 관련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의 성장과 학문에 대해 접근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다만 단편적으로 그의 인물됨이 뛰어나 세조에 의해 태조와 비교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제왕지재(帝王之才)가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어릴 때의 총명함과 재기(才氣) 및 용기 등이 서술되는 것은 모든 영웅들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서 기록하기를,

 “왕은 천자(天資)가 영이(穎異)하고 기도(器度)가 웅위(雄偉)하므로 혜장왕께서 기특히 여겨 사랑하셨으며,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셨습니다. 왕이 일찍이 동모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왕궁에 있었는데 마침 천둥과 비가 갑자기 몰아쳐 시인(寺人 : 어린 宦官을 말함)이 곁에 있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놀라 넘어지면서 넋을 잃었으나 왕은 조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니, 혜장왕께서 더욱 기이하게 여기셨습니다.”
라고 하여 세조가 그의 대담함을 칭찬하였다. 이것이 그의 성장기와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일화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그 성품에 대해서는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롭다고 하였다. 세조는 어린 손자의 대담함을 칭찬하면서
“이 아이는 기도가 우리 태조와 비슷하다.”
라고 함으로써 그 비범함을 일찍 간파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범한 손자를 위해 가르침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던 듯하다. 손자들을 궐 밖에 살게 하지 않고 궁안에서 자라도록 배려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고 학문에도 매우 신경을 썼던 것이다.

 여하튼 둘째 손주인 이 아이는 5살 되던 해(1461)의 정월에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해지게 된다. 봉군되는 명칭이 매우 특이함이 느껴지는데 왜 이렇게 봉군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는 왕의 형인 월산군(月山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1468년(예종 즉위)에 현록대부(顯祿大夫)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올려졌다고 했는데 현록대부는 종친의 정1품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다만 그 품계만 현록대부로 올려진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1464년(세조 10) 이전에 잘산군(?山君)으로 개봉되었던 것이다. 이 후 성종이 세조조에 등장하는 것은 몇 차례 되지 않고 또 그 내용도 사냥에 동행하거나(세조 10년 8월 8일) 하사품을 내리거나, 농장 혹은 노비들을 내릴 때(13년 11월 · 14년 3월 · 4월)와 길례(吉禮)를 올릴 때(12년 8월 · 13년 1월), 사신을 접대할 때(14년 7월), 세조가 불예(不豫)하여 그의 집으로 왔을 때(14년 8월) 등이다.

 공식적인 승계 절차인 적장자 상속이라는 왕위 계승 절차를 밟지 않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왕실에 적장자가 없고 차자가 있을 경우, 둘째는 왕실의 혈통이 끊어져 지자(支子)들이 있을 경우, 셋째는 적장자는 있더라도 순서를 뛰어넘어 권도(權道)로서 시국에 따라 왕위에 오르는 경우 등이다. 성종의 즉위는 바로 세번째에 해당한다. 그 의미는 바로 제왕지기(帝王之氣) 혹은 천명(天命)이 그에게 내렸음을 나타내며 당시의 상황은 왕의 형인 월산군의 잦은 병치레 등은 왕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여 주었다. 더구나 조부인 세조의 총애와 정희왕후의 기호(嗜好), 장인인 한명회와의 관계 등은 왕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성종대왕 - 생애 (3)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이 시점에서 성종의 혼인 문제가 어떻게 맺어지고 행해졌으며 그 자손으로는 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명회의 딸로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가 세상을 떠난 뒤 이어서 계비가 된 윤씨가 폐비되는 과정과, 다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맞이하는 것은 성종조 최대의 왕실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강력한 왕권의 행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기도 하다. 즉 연산군의 실정이 그의 친모인 폐비 윤씨로 인한 것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중종반정은 정치권의 또다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먼저 성종이 처음으로 맞이한 배필은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의 둘째 딸이었다. 한명회의 첫째 딸은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였지만 5세로 일찍 죽은 인성대군(仁城大君) 분(糞)을 낳고 열 아홉의 나이로 죽었다. 둘째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와 장순왕후와는 11살의 차이가 있으며, 성종은 장순왕후의 작은 조카였다. 그러나 공혜왕후는 성종보다 한 살 위여서 배분상의 문제가 있을 뿐 연령상으로는 적합했다. 그리하여 1466년(세조 12) 8월에 잘산군의 나이 10살, 공혜왕후는 11살로 배필이 정해진 뒤 이듬해 1월 12일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 성종이 1469년 11월 30일에 즉위하자 그녀 역시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성종 5년(1474) 4월에 소생없이 열 아홉 꽃다운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이즈음의 자을산군(者乙山君) 즉 성종의 근황은 점차 궁궐내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 세력들로부터 그 능력과 품성이 뛰어남을 인정받고 있었다. 가령 1468년(세조 14) 6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온 강옥(姜玉)과 김보(金輔)가 서성군(西城君) 한치인(韓致仁)의 집에 이르렀을 때 마침 성종이 발 안에 앉아서 그들을 보고 있었는데 처음에 김보는 그가 한치인의 아들인 줄로 착각하여 “어린 아들을 오라고 부르십시오.”라고 하자 한치인이 두 아들로 하여금 보게 하였다. 그러자 다시 김보는 “저 발 안에 아름다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면서 궁금해 했다. 그가 이렇게 관심을 둔 이유는 발 안에 있는 그의 모습 속에서 어떤 신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제왕의 어떤 기운을 감지했던 것이리라.

 당시에는 세자로서 예종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왕위 계승 수업을 순조롭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1468년 9월에 세조가 서거한 뒤 예종이 왕위에 올라 세조의 죽음 뒤의 정치질서를 다시금 바로 잡았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예종에게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순왕후의 죽음과 인성대군의 조졸은 일차적으로 후계가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를 다시금 잇기 위해 안순왕후(安順王后)를 계비로 맞아들여 일찍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제안대군(齊安大君)이고 1녀는 현숙공주(顯肅公主)였다. 제안대군이 태어났고 또 예종의 춘추가 한창 왕성한 때인 스물 전후의 나이인지라 누구도 예종의 혈통에서 왕실을 계승하리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즉위할 때의 예종은 건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기 시작한 예종은 1469년 11월에 승하하였다.
 그것은 갑작스런 그야말로 천붕(天崩)과 같은 일이었다. 이에 따르는 왕위 승계의 혼란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제안대군이 미처 세자로 정해지기도 전인지라 그 혼란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어린 세자 혹은 어린 군주의 등극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대 입장을 품고 있던 왕실로서는 예종 후사로 1순위인 제안대군에 대해 일단 재고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4살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왕실에서는 예종의 후사로 누구를 정해야 할지에 대해 설왕설래하였다. 예종의 혈통이 일단 제외된 후 다음 왕실의 적통에 가장 근접한 후보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었다. 당시 그는 열다섯이라는 비교적 장성한 나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대왕 - 생애 (4)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이러한 복잡한 관계와 배려 속에서 일단 왕실과 각 정치 세력들은 예종의 후사로 성종의 즉위에 따랐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단서가 될만한 조건들이 붙여졌다. 그것은 성종이 일단 나이 아직 어리고, 또 세자로 책봉되어 왕자 수업을 익힌 것도 아닌 상태였다. 물론 그에게 제왕의 자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치자(治者)로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모두 갖췄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세조비 정희왕후가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성종이 친정할 수 있을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고 이와 함께 대신들이 그를 보좌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군주등극의 적정 연령이 대략 스무살로 상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살 되어 입학하고 길례를 행하며, 세자로서의 수업을 행한 뒤 스물이 되어야 비로소 정사를 돌보는 성인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종의 학문적 자질이야 익히 알고 있는 바이나 당시 왕실에서는 어떠한 준비로 그의 성장을 도와주었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경연(經筵)을 통하는 방법이었다. 역대 제왕들은 치도(治道)를 확립하기 위해 유교 경전의 강습을 시행하는 한편 그 적용범위와 의미에 대해 충분한 숙고를 하였다. 더불어 과연 그 내용이 덕화(德化)에 적합하느냐, 그리고 현실성이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강론을 통해 직접하게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대 최대의 석학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들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정하여 학습을 돕게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경연관은 군주의 정치상을 확립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자군(王子君)에 있을 때는 어떻게 경전에 대한 공부를 하였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예종 원년 7월에 마련된 종친규찰조문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즉, 내용을 보면 종부시 제조와 종학관은 매달 문(文)을 닦는 종친에게 사서 오경 · 사학(史學) · 무경(武經) · 병요(兵要) 등의 한 책에서 세 곳을 강하여 4계월(季月)에 통(通) · 불통(不通)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할 것과, 종부시 제조와 도총관은 무를 닦는 종친에게 화살 3개씩 과녁에 쏘기를 두 차례 시험하여 4계월에 맞힌 수를 갖추어서 아뢸 것, 문무 종친이 전강할 때와 관사할 때에는 경서와 사어(射御)를 시험한 뒤 4계월에 획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혹은 가자(加資)하고 혹은 준직(準職)할 것 등이었다.
 즉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와 종학관(宗學官) 및 도총관(都摠管)을 중심으로 경사(經史)는 물론 무예의 학습훈련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종도 왕자 시절에는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거쳤고 특히 그의 능력 정도는 발군의 실력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실질적인 통치 능력을 기르는 일이었다. 선대의 과정을 보면 세자시절 왕을 대신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거치거나 섭정(攝政)을 통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먼저 배우고 있다. 이는 세자가 장성한 나이가 되거나 당시의 군주가 후계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져 미래를 도모할 수 있어야 가능한 과정이다. 그런데 태종-세종, 세종-문종, 세조-예종의 경우는 이를 실시하여 그 성과를 분명히 거두었다. 또 그렇게 해야 왕위에 오르는 세자가 군권(君權)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러한 과정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조비(世祖妃)이자 성종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수렴청정 및 한명회(韓明澮) · 신숙주(申叔舟) · 구치관(具致寬) · 최항(崔恒) · 홍윤성(洪允成) · 조석문(趙錫文) · 김질(金?) · 윤자운(尹子雲) · 김국광(金國光) 등 원상(院相)의 보좌가 이루어지게 된다. 청정(聽政)과 관련한 <예종실록>의 기사는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성종대왕 - 생애 (5)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즉, 신숙주 등이 대비의 청정(聽政)을 계청(啓請)하였다. 태비가 전교하기를,
 “나는 이미 박복하여 일이 이와 같으니, 심신을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양하려고 한다. 또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粹嬪 : 성종의 생모이자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를 말함)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여 일단은 사양하였다. 신숙주 등은 다시 아뢰기를,
 “옛날부터 고사(故事)가 있고, 또 온 나라 신민의 여망(輿望)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태비가 두 번, 세 번 사양하자, 원상과 승지 등이 굳이 청하고 인하여 글을 올려서 이르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가 성상의 슬픔을 만나 재앙과 근심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세종대왕께서 향년이 길지 못하였는데, 또 이제 대행대왕도 갑자기 만기(萬機)를 버리시었고, 계사(繼嗣)가 유충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니, 자성왕대비(慈聖王大妃) 전하(殿下)께서는 슬픔을 조금 누르시고,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시어, 위로는 옛 전례를 생각하고, 아래로는 여정(輿情)에 따라 무릇 군국의 기무를 함께 듣고 재단(裁斷)하다가 사군(嗣君)이 능히 스스로 총람(摠攬)할 때를 기다려서 정사를 돌려주시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와 같은 실록의 내용은 성종의 즉위 및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 대한 배경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이는 또한 원상과의 합의를 통한 정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성종 초년의 치국 내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수렴청정과 원상(院相)의 보좌라는 군주 체제의 보완 장치는 이 후 비슷한 경우 모범 사례로 거론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들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척도를 잴 수 없다는 진리를 간과했던 것이다. 더불어 당시의 구성원들의 개인적 능력과 충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그 동안의 관례에 따라 예종이 승하한 뒤 곧바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성종은 면복(冕服)을 입고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즉 그것은 전왕(前王)이 서거하면 곧바로 세자 내지는 왕으로 정해지는 사왕(嗣王)이 그날로 즉위를 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것이었다. 예종이 진시(辰時) 즉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에 서거(逝去)하고 신시(申時) 즉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즉위한 것이니 그 급박함은 그야말로 하루종일 대궐 안팎으로 먼지가 자욱했다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진하(陳賀)하였으며, 종묘 · 영녕전(永寧殿) · 영창전(永昌殿) · 사직(社稷)에 예종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고하였다. 또한 석전(夕奠)을 거행함으로써 당일의 절차를 모두 끝내었다.
 비록 정사는 조모인 정희왕후와 원상들의 도움으로 처단한다고는 하지만 이제 그것은 왕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고 이를 위한 준비 수업을 해야만 하였다. 1469년(성종 즉위) 12월 8일에 만들어지는 경연사목(經筵事目)은 바로 그 첫 과정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신숙주(申叔舟)가 아뢴 내용이다. 이는 세자로서 혹은 군주로서 처음하는 경연을 어떻게 시행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사목(事目)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논어(論語)>를 진강(進講)할 것, 1. 조강(朝講)에는 음(音) · 석(釋)을 각각 3번씩 하고 난 후에 임금이 음(音) · 석(釋)을 각기 1번씩 읽고, 주강(晝講)에는 임금이 아침에 배운 음(音) · 석(釋)을 각기 1번씩 읽도록 할 것, 1. 조강(朝講)에는 당직(當直) 원상(院相) 2인, 경연당상(經筵堂上) 1인, 낭청(郎廳) 2인, 승지(承旨) 1인, 대간(臺諫) 각 1인, 사관(史官) 1인과 주강(晝講)에는 승지 1인, 경연낭청(經筵郎廳) 1인, 사관(史官) 1인이 궁중(宮中)에 입시하여 상시로 음(音) 20, 석(釋) 10번을 읽을 것.”
성종대왕 - 생애 (6)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그리고 1470년(성종 원년) 정월 7일에 처음으로 보경당(寶敬堂) 경연에 나아갔고, 이 때 입시(入侍)한 이로는 영사(領事) 신숙주 · 윤자운(尹子雲), 동지사(同知事) 정자영(鄭自英) · 도승지(都承旨) 이극증(李克增) · 대사헌(大司憲) 이극돈(李克墩) · 대사간(大司諫) 강자평(姜子平) · 시강관(侍講官) 류승(柳勝) · 기사관(記事官) 김종(金悰)이 있었다. 정자영이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을 진강하면서 음독(音讀)과 해석을 각기 세 번씩 하고는 임금이 음독과 해석을 각기 한 번씩 하였다. 같은 날 주강(晝講)에서는 이극증 · 류승 · 김종이 입시하였고, 성종이 아침에 수업한 음독과 해석을 각기 한 번씩 읽어 내려갔다. 이와 같이 처음으로 성종은 궁궐에서 군주로서의 경연을 시작하였다.

 새벽에 침소에서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면서 경연(經筵)을 통해 경전의 내용과 뜻을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 익히는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부족한 공부를 단시간에 채우고자 하였다.
 왕은 이에 짜증이나 싫증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철저히 스스로 단련하여 학문이 정점에 달한 이후에는 반대로 신료들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의 경연을 통한 학문적 성숙은 이 후 성종조 유교 정치 문화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종이 이렇게 서서히 군주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정희왕후와 정치권은 왕권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세조 때 많은 군공(軍功)을 세우면서 총애를 받던 구성군(龜城君) 준(浚 : 임영대군 2남)에 대해 견제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종조를 지나면서 구성군은 이미 그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고, 중외의 신망이 두터워 그의 정치력은 왕실 비호 세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군주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정치력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따라서 예종의 서거 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력 관계에서 왕실의 혈통 즉 예종과 덕종의 혈손을 제외하고서는 그의 입지가 가장 단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왕위계승자가 정해짐에 따라서 그의 존재는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숙주 · 한명회 · 정인지 등의 원상과 대신들은 성종이 즉위한 후 곧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구성군의 역모라는 정치적 치명타로서 제거하고자 하였다. 정희왕후도 이러한 대신들의 인식과 그 뜻을 같이하면서도 주저하였다. 구성군은 왕실의 지친이고 또 세조와 예종이 총애했던 이유에서였다. 결국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로서는 성종의 왕권을 안정시켜야 된다는 절대적 명제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470년(성종 원년) 1월 14일에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입장을 대표해서 신숙주가 아뢴 말을 보면,
 “준(浚)이 세조조(世祖朝)에 있으면서 큰 죄를 범했는데도, 세조께서 임영대군을 우애하여 차마 법에 처하지 못했던 것인데, 만약 오늘날에 있었다면 세조도 또한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니, 법으로써 빨리 결단하소서.”
라고 하여 구성군의 처단에 대한 당위성을 지적하였다. 정희왕후는,
 “내가 마지못해서 힘써 따르게 되니, 경(卿) 등은 잘 처리하라.”
라고 하여 결국 대의(大義)를 좇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후 구성군은 공신(功臣)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직첩(職牒)을 회수당한 뒤 경상도 영해(寧海)에 1479년(성종 10) 1월 28일 별세할 때까지 안치되었다. 이 구성군 사건은 결국 왕위 계승과 왕권의 안정이라는 대의에 의해서 비롯되고 또 이를 위해 그 결론이 맺어졌다.
성종대왕 - 생애 (7)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왕권의 안정을 위한 이러한 예비적인 조치가 이루어진 뒤 정희왕후는 성종의 친부모인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수빈(粹嬪) 한씨, 그리고 예종의 세자빈이었던 장순빈에 대한 예우의 문제에 대한 것을 정하였다. 즉, “장순빈(章順嬪)의 시호는 휘인 소덕 장순 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로 하고,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하고, 의경세자의 시호는 온문 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묘호는 의경묘로 하고, 능호는 경릉(敬陵)으로 하고, 어머니 수빈(粹嬪)의 휘호는 인수 왕비(仁粹王妃)로 일컬어 올리도록 하라.”라고 하여 성종의 즉위에 따른 존호의 변경에 대해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성종의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선왕의 후계자가 `자(子)\'가 되는 예에 따라 예종 빈인 장순빈을 장순왕후로 올림으로써 왕실의 존엄함을 보이는 동시에 성종의 즉위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성종은 3왕후, 즉, 할머니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 생모 덕종비 인수왕비(소혜왕후) ·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를 모두 훌륭히 받들어 모자람이 없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왕실의 위계절차를 마련함으로써 왕실의 존엄함과 왕권의 정당함을 마련하게 됨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초기인 5년에 평생의 배필로 맞이한 왕비 공혜왕후를 잃게 된다. 한명회의 둘째 딸로 몸이 허약할 뿐 모든 면에 있어 훌륭한 내조자로서 잠저 시절에 성종과 가례를 맺었었다. 이 후 군주지도(君主之道)를 배우느라 몸과 마음이 피곤한 성종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지만 5년 4월 15일 결국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더불어 한명회의 아픔도 또한 컸다. 그것은 예종비로 들어간 장순왕후와 성종비인 공혜왕후가 모두 소생이 없었고, 열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그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능은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산에 자리한 순릉(順陵)이다.

 한편 성종이 장성하면서 성종의 친정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체제에 대한 바로 1476년(성종 7)에 그 동안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가 병이 생겼다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거둘 것을 밝히는데서 나온 것이다. 이미 1475년(성종 6)에 이러한 섭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종의 친정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익명서에서는 바로 대왕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하여 승정원에다 이를 붙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이듬해인 1476년 이 때 성종이 보령 스물이 되었고, 그 동안의 경연과정에서 보여준 성종의 수업내용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점 및 정사에 참여하면서 충분히 군주로서의 국정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판단한 결과 수렴청정을 거두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또 자신의 건강이 안좋아진 것도 그 한 요인이었다.

 성종의 친정은 이와 같은 과정을 밟으면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세종조의 찬란한 유교 정치 문화는 성종조에 다시금 화려하게 피어오르게 되었다. 그 바탕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당시 유교 문화의 축적과 성종의 개인적인 성향과 노력, 정치적 안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성종대왕 - 생애 (8)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그러나 성종의 치세에 오점으로 남아 있는 왕실의 검은 먹구름은 공혜왕후의 죽음 뒤 성종 7년 왕비로 책봉된 제헌왕후 함안윤씨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성종보다 12살 연상이었고 숙의(淑儀)로서 내명부(內命婦)에 있다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원자의 수태와 출산에 있었다. 그녀를 왕비로 봉할 때 성종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내렸다.

 “예전의 현명한 임금이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반드시 내치(內治)를 먼저함은 그 근본을 바르게 한 것이다. …… 그대 윤씨는 일찍이 덕행으로 간선되어 오랫동안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궁의 총애를 받았다. 이에 예법을 거행하여 왕비로 책봉한다. ……”

내치(內治)와 덕행(德行), 정숙함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 후 윤씨의 행실은 이러한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인(內人)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즉 투기(妬忌)와 관련된 것이었다. 윤씨의 경우 이것이 특히 심하였던 것이다. 일설에는 윤씨의 행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성종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성종의 여성 편력이 심하였기 때문에 윤씨가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투기를 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측면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은 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군왕의 경우는 모든 면에 있어서 달랐고 윤씨 자신도 국모로서의 체통을 지키면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훗날 윤씨를 폐하면서 가장 주된 요인으로 실행(失行)을 들고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윤씨는 이미 연산군을 낳아 원자의 친모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여서 이후의 정국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그 거취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논의는 성종의 보령 23세가 되던 10년 6월 2일을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폐출과 관련하여 성종의 의지에 찬동하는 측과 반대로 설령 윤씨가 실행했다 하더라도 원자를 생산한 상태에서 폐비를 할 경우 그 정치적 여파가 적지 않다고 하여 이에 반대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승지(承旨)의 일부와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 6조의 판서와 참판들, 은천군 이찬과 옥산군 이제 등은 중궁의 폐출을 반대하였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6월 2일에 은천군 이찬 · 옥산군 이제가 와서 아뢰기를,
 “이제 폐비(廢妃)한다는 말을 듣고 그 죄를 알지 못하여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왕비(王妃)는 이미 원자(元子)를 탄생하였고, 또 대군(大君)을 낳았으니, 전하(殿下)께서는 모름지기 국본(國本)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臣) 등은 평범한 신하와 견줄 바가 아니고 이에 나라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같이 할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청합니다.”
라고 하여 그 죄됨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고 청하고 있다. 또 <연려실기술>에서 윤씨의 폐사(弊死)와 관련한 기록 중 손순효(孫舜孝)의 소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예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칠거지악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 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 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마땅히 의리가 은혜보다 앞서야 되겠지만 부자와 부부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