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대왕 - 유교문화의 흥성 (4)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즉위 초의 성종은 그 권력 기반의 대부분을 신숙주 · 한명회 등의 공신세력과 조모후인 정희왕후에게 의지하면서 군주로서의 자질과 학문, 치도를 닦는 것으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그들에게 모든 결정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세조나 예종이 닦아 놓은 체제를 다시 재정비하면서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역대의 어느 군왕보다도 더 유교 이념에 밝았고 이를 치국(治國)에 이용할 수 있었다. 성종조에 이루어지는 정치 · 법률 · 제도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업적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변화하고 있는 조선 사회의 양상이 깃들어 있었다. 왕실 재정 문제에 있어서의 내수사 장리 운영과 관수관급제 실시 등은 그러한 시대 상황을 일정정도 수용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정책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대두하고 있는 훈구 공신 세력과 신진 사림 세력의 갈등은 그 징조를 나타내면서 정치사의 일대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건은 암울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말하자면 성종조는 조선 초기의 문물과 정치, 사상의 집대성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조선중기 사림정치와 이상적 군주론의 시기로 전환되는 시점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성종의 치적과 연산군 때의 파탄은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완벽한 인간상으로서의 군주 혹은 정치지도자란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 없는 꿈인지도 모른다. 다만 정치 지도자의 입장 혹은 군주의 입장에 있으면서 얼마만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과 신료들의 신뢰가 절대적 상관 관계를 맺으면서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종의 생각 역시 이러한 정치 이념을 체현(體現)하는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연산군 - 생애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생애
성종 · 연산군대의 정치운영과 왕실사에 있어 모든 변화의 핵심이 되는 한 아기씨의 탄생이 1476년(성종 7) 11월 7일에 있었다. 이 아기의탄생은 그의 생모인 숙의 함안윤씨 개인뿐만 아니라 성종에게 있어서도 중대한 운명의 전환을 가져왔다. 숙의란 내명부(內命婦)의 종2품 벼슬로 임금의 부실(副室)로서 교명문(敎名文)을 받게 되면 빈(嬪)으로 승격되는 지위이다. 당시 함안군(咸安君) 윤기견(尹起죻)의 딸인 숙의 윤씨는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으로서 어찌보면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라 하겠는데, 그녀에게 연산군 융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갔을까하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하겠다. 궁인으로서, 왕의 부실로서 궁중의 생활을 반복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가 성종과 자리를 같이하고 연산군을 잉태하고 왕비로 책봉되는 것은 왕실 혼인사에 있어서 큰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어려서부터 성종과 부부의 연을 맺고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의 지위에 올랐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후사없는 죽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1474년(성종 5)의 일이었다.
안주인이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격요건만 갖추어진다면 누구라도 안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나 제왕의 경우 그 경쟁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는데 군주가 어느 침소에 들 것인가 하는 것은 곧 그 침소의 주인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종이 숙의 윤씨의 침소를 찾게 되고 숙의 윤씨 또한 정성껏 성종을 모심으로써 모든 경쟁상황에서 12살 연상의 윤씨가 어찌보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성종 7년 인정전(仁政殿)에서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받음으로써 왕비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씨는 곧바로 연산군(燕山君)으로 봉작되어 왕실의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된다. 윤씨가 아직 정비로 책봉되기 전인지라 아기는 군(君)의 봉작을 받은 것이다. 1477년(성종 8) 이러한 속에서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는 병에 걸려 숭례문(崇禮門) 밖에 위치하고 있던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있으면서 요양하게 되었다. 원자는 강희맹의 부인 안씨(安氏)의 극진한 보살핌, 즉 춥고 따뜻함을 조절하고 젖을 알맞게 먹음으로써 10일이 지나자 건강하게 되었다. 또 안씨는 원자인 연산군이 잘못하여 실꾸리를 삼켜 목에 걸렸을 때 서두르지 않고 손가락으로 실꾸리를 빼냄으로써 자칫 위험할 뻔한 상황을 벗어나게 하였다. 이후 원자는 건강하게 자랐고 여느 아이들처럼 활발하게 놀았는데, 특히 강희맹 집안의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그 소나무에 금띠를 둘러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이렇게 원자는 건강을 찾아갔지만 궁중의 분위기는 더욱 차가와져 갔다. 왕비 윤씨가 제대로 기반을 잡지 못하고 성종과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되자 차츰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투기로 인해 몰래 독약(毒藥)을 품고서 궁인(宮人)을 해치고자 하다가 그 음모(陰謀)가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연산군 - 생애 (2)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그러한 가운데 급기야 1479년(성종 10) 원자의 나이 4살이 되던 때 성종은 윤씨를 폐서인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왕실 최대의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성종은 다시 원자인 연산군이 7살이 되던 해인 1482년(성종 13) 8월, 윤씨가 폐치(廢置)된 뒤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복권을 꿈꾸고 개과천선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 이로 인해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 되자, 윤씨를 사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윤씨에게 원자가 있음을 들어 반대하는 대신들의 간언을 물리치면서, 또한 자신이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까지 하여 그 굳은 결심을 나타냈다. 즉,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원자는 건강상의 이유와 왕실내부의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해 궁궐생활보다는 궐외에서 요양을 하면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철저하게 윤씨와의 관계를 차단하면서 자라도록 배려하였던 것인데, 그것은 연산군의 건강과 혹 있을지 모르는 생모 윤씨와 관련한 불미스런 일을 막고자한 성종의 생각이 결합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원자는 건강을 되찾음과 동시에 성종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즉, 1483년(성종 14) 2월 6일,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치면서 그가 폐비의 자식이지만 이미 원자로서 인정받고 자라온 관계로 그 서열상 당연히 세자에 책봉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으로대두되었다. 또 당시 왕실의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는 숙의로 있다가 왕비 윤씨가 폐비된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지만 이때까지도 아무 소생이 없었다. 훗날 중종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진성대군, 즉 중종은 정현왕후 윤씨로부터 1488년(성종 19)이 되어서야 태어났던 것이다. 당시 27세의 청장년의 나이에 이른 성종으로서도 후계를 정해두어야 왕실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또 원자의 나이가 8세라는 사실은 왕실의 관례상으로도 정당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나이였다.
마침내 원자는 8살의 나이로 성종 14년 2월 6일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5월 6일에는 명의 황제가 칙봉(勅封)을 내려 이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다음의 내용은 성종이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내린 하교이다.
“승조(承?) · 주창(主쾕)하여 나라의 근본을 무강(無彊)하게 튼튼히 하고, 세자를 세워 명분을 바로하여 국운을 흔들리지 않게 이어나가야 한다. 원자(元子) 융은 그 지위(地位)가 총애받는 적자(嫡子)이고 성품이 온화하며 품위가 있어 만백성의 칭송을 받고 있으니, 이미 신인(神人)이 소망에 부응하여, 종사(宗社)가 이어지고 중외(中外)의 마음이 믿게 될 것이다. 기량이 이미 이루어져 능히 두어 자의 글을 깨치었으며, 나이가 비록 어리나 삼조(三朝)의 예(禮)를 폐하지 아니하였다. 장자(長子)에게 대[世]를 전함은 진실로 천하의 상경(常經)이며, 어진 자에게 계통을 잇게 함은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자의 소임을 기탁하여서 감무(監撫)의 권한을 맡기니, 바라건대 오궁(五宮)의 즐거움을 받들고 삼선(三善)의 덕을 온전히 하라.”
연산군 - 생애 (3)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이를 보면 연산군을 세자 책봉의 당위성으로써 적자(嫡子)인 점과 왕자의 성품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세자로 책봉된 연산군은 곧바로 차세대 군주로서의 수업에 들어가게 된다. 즉 2월 17일에 세자사(世子師) 정창손(鄭昌孫) 등이 아뢴 대로 세자의 서연에 빈객(賓客) 1인, 낭청(郎廳) 2인, 대간(臺諫) 각각 1인이 진강할 것과 아침에는 빈객이 낮에는 낭청이 입시하여 아침에 읽은 것과 전에 사흘 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고 매달 15일에는 사부(師傅)와 빈객이 모여 강하도록 하였다. 당대 최고 수준의 이른 유신(儒臣)들로부터 경사(經史) 등 제반 학문을 강하고 토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아동교육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교육과정은 상당부분 역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가(私家)의 아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학문을 닦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하겠으나,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왕으로 내정된 세자인지라 그만큼의 규제와 근면, 성실은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제왕(帝王)의 삶은 어떻게 보면 신비와 존엄성 등에 가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개인적인 생애를 보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변화 와 자유가 없는 규정된 삶을 살아간다. 세자는 이렇게 짜여진 교육과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고, 철저히 그 행동거지에 대해 규제를 받았던 것이다.
서연(書筵)에서 강하는 것에 대해 어린 나이로서 감당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당시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면 8세의 왕자에게 얼마나 큰 중압감을 주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부왕인 성종이나 김종직(金宗直)과 같은 대유(大儒)들은 오히려 학문을 통하여 혈맥을 강화시키고 근본을 튼튼히 할 수 있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세자의 학습강도에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자의 서연은 나날이 계속되어갔고, 마침내 성종 15년 8월 초하루에는 <소학(小學)>의 강독을 마치게 되었다. 이에 성종은 그 기쁨을 나타내어 창덕궁(昌德宮)에서 서연관들에 대해 공궤(供饋)하고 세자로 하여금 친히 잔을 잡고 술을 마시게 하였다. 이와 함께 세자가 10세가 되던 성종 16년 12월에는 마침내 <소학(小學)> · <대학(大學)> · <중용(中庸)> · <논어(論語)> 등의 경서를 모두 읽게 되었다. 다음 단계로써 서연(書筵)에서 세자가 먼저 읽은 것을 강(講)할 때에 아울러 뜻을 해석하도록 하였다. 경서의 가르침에 대해 단순히 읽고 외우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행하고 뜻을 체득하는 것도 고려되었다.
세자의 학문기초가 닦여지고 예를 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입학(入學)의례와 납빈(納嬪)이 조정에서 의논되었다. 대개 세자는 10세를 전후하여 입학하고 11세에 납빈하여 왕자수업과 후사를 위한 과정을 밟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성종은 이를 사람의 기질이 같지 않으니 왕자가 13, 14세가 될 때를 기다려 행하겠다고 하였다. 성종은 당초의 이러한 뜻을 바꿔 1486년(성종 17) 1월 23일, 세자의 납빈을 위해 경외의 처녀로서 나이 8세로부터 15세에 이르는 여자에 대한 금혼령을 예조에 내렸고, 이듬해 3월 1일에 승정원에 전교하여 병조 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하였다.
신씨(愼氏)에 관하여는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왕실의 기풍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재위기간 중 신씨가 보여준 기품을 고려할 때 연산군이 군왕의 도를 잘 지키고 행하였다면 신씨는 역대 왕후 가운데 뛰어난 자취를 남겼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1488년(성종 19) 2월 6일, 본가에서 거처하고 있던 신씨를 세자인 연산군이 친영(親迎)하여 마침내 가례를 행하게 되었다. 이 때 세자의 나이 13세였다.
연산군 - 생애 (4)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세자가 당시 일반적으로 입학을 하게 되는 나이인 열두살이 되자, 성종은 그를 성균관에 입학시켜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접어들도록 배려하였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세자인 연산은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어머니로서의 정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러한 서글픔은 다음의 일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연산은 입학례(入學禮)를 치른 뒤 궐밖으로 공식적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이 때 연산은 모자간의 행복함을 매우 부러워하게 된다. 즉, <연산주행록(燕山主行錄)>의 기록은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궐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뒤 성종이 그에게 물었다.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성종은 세자의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그러나 당시 연산주는 정현왕후를 친모로 알 뿐 자신이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 보면 이른바 천륜(天倫)이라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혈연으로 이어진 자신의 자식이 아님과 자신의 부모가 아님은 그것이 천연(天緣)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라 할 수 있는 8세에서 12세까지의 아동기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행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을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다양하게 작용한다는 점도 부인하기는 힘들지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는 역시 부모이기 때문이다. 과정과 연유야 어쨌든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 몬 성종과 또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모정(母情)을 주지 못하는 정현왕후는 연산군에게 그 따뜻한 사랑을 심어주지 못하였다.
25년의 재위기간 중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성종은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는 정치방식에서 나름대로 풍류를 잡아갔다. 이에 따라 성종은 이미 죽은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를 포함해 12명이라는 많은 부인을 두게 되었고 자식도 16남 12녀를 두게 된다.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세자인 연산군은 항상 보이지 않는 방어막에 의해 쌓여져 있어야만 하였다. 행여 폐비 윤씨와 관련한 사실이 그에게 알려지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커다란 정치적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연산군에게는 왜곡된 정보가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가까이 있는 신하들 및 왕실 사람들 모두가 조심해야만 하는 상황을 가져왔고, 당연하게도 연산군과 그들은 무엇인가 친밀감을 서로 느낄 수 없었다.
성종은 이러한 연산군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는지 차츰 폐비 윤씨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성종의 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로서 혹은 남편의 입장에서 폐비 윤씨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의 내용은 1489년(성종 20) 5월 16일의 일이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다만 어미가 자식 때문에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며, 후일의 간악함을 방비하는 것은 임금의 정사이다. 지금 세자의 정리를 생각하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 지금 특별히 일정한 제사를 드려 자식의 심정을 위로하여 영혼이 감응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록 내가 죽은 뒤에라도 영원토록 바꾸지 말고 아비의 뜻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연산군 - 생애 (5)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어쨌든 기록상으로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뒤에야 폐비 윤씨가 생모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으로 되어있다.
세자 시절에 연산군의 학문은 성취되었지만 뛰어난 자질은 아니었던 듯하다. 세종이나 문종, 혹은 단종 · 예종 등과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하였고, 이러한 점에 대해 부왕인 성종은 나름대로 더욱 정진할 것을 명하곤 하였다. 성종 21년 연산군이 15세가 되던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세영(李世英)이 와서 세자의 학문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한 내용에 대해 성종은 세자는 문리(文理)를 다 통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는 조강(朝講)에 읽은 바를 숙독(熟讀)하는데 미치지 못하는 까닭으로 다시 석강(夕講)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이어 시강원 관원(侍講院官員)으로 하여금 2, 3일 간격 혹은 5일 간격으로 세자와 강학(講學)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세자가 보여주고 있는 학문적 성취도는 뛰어난 문치를 남기고 있는 성종으로서 매우 불만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사군(嗣君)될 자로서 흠은 없었다. 따라서 성종은 더욱 서연관들을 채근함으로써 세자의 학문을 완성시키고자 하였던 듯하다. 1491년(성종 22)에는 서연을 더욱 강화하여 조강 · 주강(晝講) · 석강 외에 야대(夜對)도 하도록 정하여 낮에 읽은 것을 밤에 항상 논란(論難)하도록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의 역사를 야사와 함께 전해주고 있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내용을 보면, 연산군은 세자시절부터 학문의 수양을 멀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즉, 세자시강원 필선 허침(許琛)과 보덕(輔德) 조지서(趙之瑞)가 세자를 지도하고 있을 때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 전연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성종의 훈계가 엄함을 두려워하여 서연에 억지로 나올 따름이라고 말하였다. 연산군은 이를 지적하는 조지서에 대해 큰 소인(小人)이고, 부드러운 말로 조용히 깨우쳐 준 허침에 대해서는 큰 성인(聖人)이라고 연산군 스스로 벽에 써 붙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즉위 후 갑자사화 당시 스승인 조지서를 죽이고 가산을 적몰하는 보복조치를 취하였으니, 그의 성품은 도량이 좁고 음험하여 은원(恩怨)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즉, 군주로서의 덕이 아무래도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일화로 사슴과 관련한 기사를 적고 있다. 즉,
일찍이 성종이 사향 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날 폐주가 옆에서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폐주를 젖게 하였다. 폐주가 발로 그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히 여기면서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스러우냐?” 하였다. 뒤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폐주가 왕위에 오르자 그 날 손수 그 사슴을 쏘아 죽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볼 때 세자시절의 연산군은 주위에 대해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혹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보상심리로 깊은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이러한 심리적 불안과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 데에는 역시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그리고 조모인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보여주는 애정의 결핍에 있었다 하겠다. 그 원인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수 없었던 그였지만, 즉위 후 그가 보여준 행로는 마음속에 내재되었던 갈등이 폭발하여 나타난 것이라 추측케 한다.
연산군 - 생애 (6)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다시 한번 돌아보면 성종 자신도 폐비 윤씨를 생각할 때 연산군과는 부자관계상의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던 것이고, 이런 이유로 아들인 연산군을 아버지로서 엄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사랑으로 감싸안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연산군에게도 성종에게도 업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종의 태도 자체도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하였다. 군주의 입장이 애매모호하여 신료들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또 폐비 윤씨와 관련한 상황에 대해 그 연유 곡절을 모두 알고 있는 신하들로서도 세자인 연산군을 대할 때 매우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상황은 그렇게 왕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지느냐하는 것이 성종 승하 뒤에야 표면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긴장 속에서도 세자인 연산군과 세자빈 신씨의 사이는 좋았던 듯하다. 그것은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많은 폐행을 저지르면서도 신씨에게만은 유달리 험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세자빈 신씨는 그렇게 연산군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부부의 사랑을 간직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젊은 부부는 새로운 생명을 만듦으로써 왕실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38세의 장년에 이른 성종이 마침 건강이 좋지 않아 조정이 침울해하던 시기에 원손이 태어남으로써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성종은 손자가 태어나자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여 원손의 탄생을 칭경(稱慶)하는 예(例)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고, 이에 의해 백관의 진하(進賀)와 반사(頒賜)를 행하였다. 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도 못한 채 한달만인 3월 29일에 죽게 된다.
그 해 12월, 성종이 보위에 오른 지 25년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정침에서 마침내 승하하게 되고, 동시에 이미 사군(嗣君)으로서의 정당성과 지위를 모두 확보한 연산군이 등극하게 된다. 이것이 1494년 12월 24일 그의 나이 19세의 일이었다.
성종의 죽음은 아들인 연산군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자신을 질책하던 아버지 성종의 시선이 없어진 상황은 그에게 한편으로 홀가분함을, 또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동시에 유발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종의 죽음은 15세기에서 16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크나큰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간 태종과 세조조에 많은 혼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위상이 안정되고 또 발전되었지만, 이제는 비호 및 견제 기능을 하는 왕실세력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군주독재의 길을 열어놓은 단초가 된 것이다. 그렇게 강화된 군주권은 견제장치가 사라지자 폭군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즉위 초 연산군은 군주로서의 위상을 범연히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것은 부왕인 성종이 정사를 운영하던 것을 옆에서 줄곧 보아왔던 탓에 그다지 큰 낯설음이라든가 어려움 혹은 중압감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주로서의 치도(治道)를 몸소 익히기 위해 <시경(詩經)> 빈풍(?風)의 7월편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편을 등사하여 벽과 병풍에 붙일 정도였다. 노사신이나 성현 등과 같은 원로대신이 국정을 보필하고 있어 왕실은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성종조를 거치면서 등장하던 사림(士林)세력 역시 도학(道學)정치를 표방하면서 그 세력을 점차 확장시켜 가고 있었다. 변방도 또한 안정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야인이나 왜구들이 간간이 출몰할 정도였다.
연산군 - 생애 (7)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다만 성종의 상을 치르느라 연산군의 건강이 나빠진 것이 유일한 문제였는데, 그것은 소식(素食)과 거애(擧哀) 및 추위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선(肉饍)과 휴식 등을 취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국가와 왕실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성종조의 평화와 번영은 지속되리라 모두가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밖이 아니라 왕실 깊숙한 곳에서 잊혀진 비극을 꺼냄으로써 표면화된다. 그리고 그 기폭제는 우려한 바 대로 연산군의 원죄(原罪)라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접하면서 불이붙기 시작하였다.
1495년(연산군 원년)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이 완성되어 그 내용이 상달되었다. 그 가운데 다음의 내용은 연산에게 의혹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왕이 성종(成宗)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른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죻)이란 이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를 기견(起죻)이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하자,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사실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은 곧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혼란을 일으켰다.
연산군은 먼저 자신의 모후에 대한 처리과정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다음달 4월 11일에는 이러한 의도가 표면화되었다. 즉, 승정원에 폐비(廢妃)의 묘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고 성종 때 이에 관련된 <승정원일기> 및 성종 10년 폐비에 관한 교서, 신축년(성종 12)의 장사에 관한 내용, 더불어 기유년(성종 20)의 결정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비로소 연산은 당시의 사정에 대한 상황파악을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조의 문풍과 신료들의 존속은 연산군의 독자적 행보를 간언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고, 이를 의식한 연산군 역시 자신의 뜻을 곧바로 행동에 옮길 수도 없었다. 이것이 잠재되어 있다가 서서히 표면화되어가는 과정이 연산군 즉위 초에 나타났는데, 과연 권력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었다. 물론 왕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에따라 소위 권신 혹은 훈신세력과 신진세력으로 일컬어지는 사림 혹은 간쟁(諫爭)을 맡아보는 대간세력들과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권신세력은 왕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흐르고자 하였고, 반면 대간세력들은 왕도정치 즉 군주와 신권이 조화되고 도(道)를 지키는 방향에서의 정치를 원하였다. 이러한 갈등요인은 결국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왕권 및 왕실을 보위하던 노사신(盧思愼)을 탄핵한 것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는 연산군에게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의 연산군의 말은 이러한 세력갈등 속에 놓인 그의 심정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알게 해 준다.
“예전 제왕의 일들이야말로 본받을만한 것이 어찌 적을 것이며 성종의 일은 무엇인들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랴. 다만 근래에 대간이 말을 내놓으면 기어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산이니, 권세가 장차 아래에 있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국문해야 한다.”
연산군 - 생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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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언급 속에는 결과적으로 대간과 연산군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군주의 독주(獨走)에 대해 의견을 정리하고, 그 시비를 논하며, 그 명분을 논함으로써 군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 올바른 왕도정치를 도출하는 길이라면, 이러한 갈등의 증폭은 그 앞날이 어떠하게 될 것인가를 직감하게 해 준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조절해 줄 수 있는 것이 경험과 노련미이고 그들이 바로 노사신이나 어세겸, 성현과 같은 노성(老成)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이들로서는 회복할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 후 연산군의 정치행로는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극도의 정쟁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연산군 초기의 권력관계 속에서 올바른 길과 명분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도 찾아내기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그 울타리 속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쉽게 그 해법을 구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자신의 정도와 명분, 실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올바른 길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말하자면, 하나 하나의 요소가 각각의 논리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다지 큰 변수가 당장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모여서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관계를 갖게 될 때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굉장히 복잡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조사회에서 가장 큰 변화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왕권으로 대표되는 군주의 성격과 뜻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옛 성군(聖君)이나 현신(賢臣)들이 왕위계승자에게 끊임없는 수양과 학문을 쌓기를 권하고 제도화한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몸짓 하나, 말투 하나라도 만백성의 위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의 판단력과 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당시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도 군주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고 어떠한 제도적 틀로 덕치를 해나갈 것이냐는 그만큼 중요하다 하겠다. 군주로서의 자질과 능력, 품행, 덕 등이 모두 입체적으로 고려되고 또 그를 보위할 수 있는 신료의 존재, 더불어서 천지자연의 조화 등이 합쳐진 가운데 군주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러면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왕위에 오른 뒤 그가 보여준 권력행사의 측면과 일탈의 모습, 또한 외적으로 볼 때 왕권으로 대표되는 왕실의 위상이 무소불위(無所不爲) 라 할 정도로 확대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그를 폭군 혹은 혼주(昏主) 등으로 규정하고 `반정(反正)\'이라는 당시기의 역사적 평가로 이어지게 하였다.
부왕인 성종과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가졌던 가족 내의 갈등은, 단순히 부부간의 갈등이 아닌 전체 권력관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투기를 이유로 한 폐비의 정당성 문제, 나아가 사약을 내리는 것에 대한 논란, 이 두 가지는 당시기 뿐만이 아닌 시한폭탄과 같은 연결성을 가지고 어떠한 형태로든 폭발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권력기반은 결국 연산군이라는 기형적 군주를 낳았던 것이다.
연산군 원년 5월 22일, 성종의 상제 등이 거의 수습되고 자신의 건강도 회복되자 연산군은 처음으로 경연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 때 기록상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시강관(侍講官) 성희안(成希顔), 검토관(檢討官) 박억년(朴億年), 집의 김율(金?), 사간 홍형(洪泂) 등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경연이지만 연산군 때의 경연은 성종이라든가 여타의 군주와 비교할 때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 횟수뿐만 아니라 군신이 경연에서 벌인 대화는 서로가 평행선을 달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군주는 신하가 지나치게 강성하다하여 꺼리고, 신하는 자신들의 논박을 군주가 수용하지 않는다고 평하는 이러한 자리는 군주의 덕과 학문을 쌓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모두에게 불만만 쌓이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연에 집중적으로 참여하여 학문을 논하고 시사를 논하며, 군주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예문관(藝文館) · 성균관(成均館) · 사헌부(司憲府) 등에 속한 유신(儒臣)들은 정치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연산군 - 생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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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성종의 부교(父敎)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연산군의 모후를 위하는 천친(天親)을 따를 것이냐에 놓여 있었다. 다음 대간이 아뢰고 있는 내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496년(연산군 2) 9월 7일 경술일의 일이다.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는 것이 천친의 중함을 위하는 일이지만, 유교(遺敎)도 또한 천친의 유교입니다. 부모가 다 함께 천친이지만 존비(尊卑)와 경중이 저절로 그 분별이 있는데, 모후(母后)의 천친만을 알고 부교(父敎)가 더욱 중함을 모르신다면 존비가 차례를 잃고, 경중이 마땅함을 잃는 것입니다. 신 등도 역시 인자(人子)인데, 어찌 부생 모육(父生母育)의 지극한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이러한 간언에 대한 연산군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즉, 폐비가 선왕에게 죄를 얻기는 하였지만 모자간의 정리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직무가 예와 명분을 바로하며, 기강을 바로잡는데 있음을 믿는 대사헌이나 대제학 등과 같은 신료들로서는 이러한 연산군의 태도에 대해 사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로 연산군의 의도에 따라 폐비에 대해 입주(立主) 입묘(立廟)의 방향으로 흐르면서 조정은 그 구체적 사안 및 절차 등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497년(연산군 3) 4월 9일 윤필상(尹弼商) · 노사신(盧思愼) · 정문형(鄭文炯) · 어세겸(魚世謙) · 한치형(韓致亨) · 이극돈(李克墩) · 박안성(朴安性) · 조숙기(曺叔沂) 등이 윤씨(尹氏)의 묘호(廟號)를 의논하고 사당은 효사(孝思), 묘소는 회(懷)라고 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이 즉위 초부터 모후에 대한 강력한 입장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하여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성종조의 유풍(遺風)이 그대로 남아 있어 문치(文治)가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연산군 스스로도 군주로서의 도를 행하기 위해 그 동안 수업하고 지켜봐 온 일들을 그대로 실현하고자 애쓰고 있는 점이 엿보였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류자광이나 임사홍 등과 같은 폐행(嬖幸) 등이 아직 등장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실정과 이들의 재등장이 서로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위 초 연산군이 보여준 정사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재위 중후반기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살펴볼 때, 연산군의 실정이 오직 개인의 치부로 돌릴 수 없음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성군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현신이라 할지라도 당시의 상황을 이끌고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훌륭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포기하거나 관계없다고 냉소적으로 대할 때 결국 그 피해는 그 자신들 뿐만이 아닌 모든 만천하의 백성들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정치란 모든 이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연산군 즉위 3∼4년간에 이루어지는 정치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다소 번거롭더라도 이를 연대순으로 정리함으로써 연산군의 행적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왕이자 부왕인 대행대왕의 묘호를 정하여 성종의 시대를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즉 당시 묘호를 `인(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성(成)\'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의가 갈라졌는데, 당시 `성(成)\'으로 할 것을 주장한 윤필상 · 노사신 · 신승선 · 한치형 · 어세겸 · 이극돈 · 한간 · 권건 · 안침 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