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시대상 (3)
제 10대조   이름(한글):연산군   이름(한자):燕山君

후원(後苑)에 응준방(鷹?坊)을 두고, 팔도의 매와 개 및 진귀한 새와 기괴한 짐승을 샅샅이 찾아 모두 가져오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을 생포하여 압송해 와서 우리에 길렀다. 선릉(宣陵) · 광릉(光陵) · 창릉(昌陵)에 수시로 가서 사냥하였다. 선성(先聖) · 선사(先師)의 위판(位版)을 처음에는 태평관(太平館)에 옮겼다가 얼마 뒤에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기고 또 서학(西學)에 옮겼다. 그리고 강당(講堂)과 사전(祠殿)은 흥청들이 음희(淫?)하는 장소로 변하였다. 사선(私船)을 빼앗아 경회루(慶會樓)에 끌어들여서 못 위에 연결하여 놓고, 그 위에 채색 무대를 만들어, 첫째 `만세(萬歲)\', 둘째는 `영충(迎忠)\', 셋째는 `진사(鎭邪)\'라 하였는데, 세 산이 높직이 치솟아 사치와 화려함이 극치에 달하였다. 궁전(宮殿)과 사우(寺宇)를 연이어 짓고 은은히 보이도록 온갖 기묘한 솜씨를 다 부려 화려한 채색이 눈부셨는데, 집을 짓는 데에 쓰인 물건은 모두 시인(市人)에게서 나왔다. 스스로 시를 짓기를,

 `씩씩한 기운 어린 선봉(仙峯)은 푸른 하늘에 치솟았고,
 신비한 자라 신령스런 학은 때맞추어 조화되었도다.
 뭇 영걸은 향연에 감동되어 충성스런 마음이 흡족하고,
 외로운 귀신은 유수(幽囚)되어 오장 육부가 타도다.
 안개 어린 누각의 단장한 자태 용가(龍駕)가 우뚝하고,
 구름 사다리의 가관(歌管), 봉루(鳳樓)는 아득하도다.
 머물러 완상하려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영원히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로다.\'

라 하였다. 또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세 산의 이름붙인 뜻을 시로 지어 편액(扁額)에 쓰게 하고 흥청(興淸)을 거느리고 한껏 향연하였다. 또 그네놀이를 벌여서 모두 여름이 지나기까지 철폐하지 않았다.
 도성(都城) 사방 1백 리 이내에는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했다. 항상 단기(單騎)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치달리고 왕래하였으며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는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 두모포(豆毛浦) · 제천정(濟川亭) · 장단(長湍)의 석벽(石壁), 장의(莊義)의 수각(水閣), 연서정(延曙亭) · 망원정(望遠亭) · 경회루(慶會樓) 후원(後苑) 등의 곳에서 항상 흥청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노닐며 향연하니, 당시 이를 일컬어 작은 거둥, 큰 거둥이라 하였다.

 사직북동(社稷北洞)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仁王岾)에서 동쪽으로 타락산(퀮駱山)까지 크게 민정(民丁)을 징발하여 높직이 돌성[石城]을 쌓았다. 광주(廣州) · 양주(楊州) · 고양(高陽) · 양천(陽川) · 파주(坡州) 등의 읍을 혁파(革罷)하고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어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살게 하고, 혜화(惠化) · 흥인(興仁) · 광희(光熙) · 창의(彰義) 등의 문을 폐쇄(閉鎖)해 버렸다. 또 나루터[津渡]를 금지하고 다만 육로와 교량만 통하게 하였으므로, 나그네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땔나무를 하기도 또한 어려웠다.
연산군 - 시대상 (4)
중종대왕 - 생애
중종대왕 - 생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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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대왕 - 생애 (4)
중종대왕 - 생애 (5)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2)
중종대왕 - 중종과 기묘사화 (3)